본문: 요 13:34,35, 요일 4:7-11, 신 10:17-19
장소: 서울 개포동 사랑의빛교회
일시: 12월 5일 오전 11시

한복협 2016년 4월 김명혁
▲김명혁 목사. ⓒ크투 DB
제가 한 평생을 살고 나서 할 수 있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제일 좋은 사람과 제일 필요한 사람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을 사는 착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얼굴이 예쁜 사람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와 우리 교회와 우리 사회에 필요한 사람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을 사는 착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을 사는 착한 사람이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드리면서 그리고 이웃과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드림과 나눔”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시는” 너무너무 귀중하신 착하신 분들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시는” 귀중하신 착하신 분이시라고 오래 전에 구약성경이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신 10:18,19).

제사와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주 귀중하지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지 않는 제사와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라고 아주 강하게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 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여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5-17).

성부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금식과 기도가 바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선행이라고 아주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6-9).

성부 하나님께서는 또한 악독이 가득한 니느웨 사람들과 동물들까지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신 너무너무 착하신 분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0,11).

성자 예수님께서도 모든 죄인들과 모든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면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시는 착하신 분이시라고 말씀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 10:38).

성자 예수님께서는 또한 제자들을 향해서 그리고 교회들을 향해서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4,16).

성자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달아 못 박는 로마 군인들까지 불쌍히 여기시고 저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너무너무 착하신 분이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눅 23:34).

성령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들을 위해서 탄식하시면서 기도하시는 착하신 분이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러면 이제부터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편”, “착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줄여서 하려고 합니다.

저는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전이고 성령님의 행전이지만 사실은 “착한” 사람들의 행전 이라고 생각합니다. “착한” 사람들을 통해서 사도들과 성령님께서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이란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하는 따뜻한 사람을 말합니다. “착한” 사람이란 돈이나 소유에 집착하는 대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돈이나 소유를 기꺼이 바치는 희생적인 드림의 사람을 말합니다.

“착한” 사람이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짓밟는 대신 그들을 변호하고 격려하면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따뜻한 사람을 말합니다. “착한” 사람이란 자기를 내 세우는 대신 다른 사람을 내 세우는 이타적인 겸손한 사람을 말합니다. “착한” 사람이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고와 고난을 기쁘게 받는 수고와 고난의 사람을 말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사회에 필요한 사람은 유식한 사람도 유능한 사람도 아니고 설교만 잘하는 사람도 진리만을 외치는 사람도 능력만을 나타내는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사회에 제일 필요한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루살렘교회 신자들이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신자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지만, 무엇보다 가장 힘쓴 것은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일이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 2:44,45).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 이러라 바나바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 4:32-37).

결국 “착한” 사람들의 선행을 통해서 예루살렘교회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고 그 결과로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예루살렘교회 신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로, 예루살렘교회의 집사들이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집사들이 무엇보다 전력을 다해서 힘쓴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일이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행 6:3,4).

일곱 집사들은 구제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면서 전도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구제와 함께 전도하면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구제하는 “착한” 일에 힘쓴 스데반 집사의 마음 속에는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사울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악한 세력을 향해서 진리의 칼을 휘두르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착한” 마음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는 사울을 위해서 속죄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하신 기도와 비슷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처절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기도로 사울이 나중에 회개하게 되었고 예루살렘 교회는 부흥하게 되었고 사도행전의 역사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착한” 사람 스데반 집사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억지로 전도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순수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일로 인해서 전도가 저절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교회 집사들은 무엇보다 먼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셋째로, 욥바에 살던 도르가도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했습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행 9:36). 가난한 과부들에게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나누어주는 “착한” 일을 심히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수고”를 너무 많이 해서 그랬는지 도르가는 병들어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도르가의 “착한”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고, 수많은 욥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고 했습니다.

결국 도르가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억지로 전도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착한” 일과 선행과 구제하는 일만 하면 되었습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행 9:36-42).

욥바가 복음화가 된 것은 전도 프로그램이나 행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도르가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일로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도르가는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넷째로, 가이사랴에 살던 로마 사람 백부장 고넬료도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는 아직 예수님을 정식으로 믿지도 않았지만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많이 구제하는 “착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 10:1,2).

그런데 고넬료의 구제와 “착함”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고 유대인들의 칭찬을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천사를 고넬료에게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여 말씀을 들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행 10:22).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증거했을 때 성령께서 임하시고 가이사랴의 복음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베드로의 인간관과 그리스도관과 세계관과 선교관이 달라졌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 10:38).

결국 귀중한 모든 일이 “착한” 사람 고넬료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무엇보다 먼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섯째로, 안디옥 교회의 설립자였던 바나바는 누구보다도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 11:24). 바나바가 “착한” 사람 이었기 때문에 안디옥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바나바의 “착한” 모습을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 4:37).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행 9:27).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26).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 11:29).

나중에는 바나바와 사울이 선교지로 떠났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 13:2,3).

선교사 바나바와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고난과 핍박의 길로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가결하였노라”(행 15:26).

착하지 않은 이기적인 사람은 순수한 선교사가 될 수도 없고 복음을 위해서 고난과 핍박을 받지도 못합니다. “착한” 사람만이 누군가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릴 수가 있습니다.

결국 바나바 때문에 사도 바울이 생겼고, 바나바 때문에 안디옥교회가 생겼고, 바나바 때문에 소아시아 선교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에 의해서 사도행전의 역사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무엇보다 먼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여섯째로, 사도 바울의 후계자가 된 디모데도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 아들로 삼았고 자기의 후계자로 삼았는데 디모데는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는 그 지역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고, 자기의 일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일을 더 돌아본 이타적인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행 16:1,2).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빌 2:19,20).

“착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사람이고 그리고 자기 일보다 다른 사람들의 일을 더 잘 돌아보는 사람인데 디모데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착한” 사람 디모데가 보고 싶다고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고백했습니다.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딤후 1:4,5).

사도 바울은 그의 마지막 서신을 디모데에게 쓰면서, 디모데에게 빨리 오라고 두 번씩 부탁했습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 4:9).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딤후 4:21). “착한” 사람은 보고 싶어지는 사람입니다. 디모데는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일곱째로, 빌립보교회의 설립자 루디아도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일 사랑하고 제일 보고 싶어하고 제일 귀중하게 여기던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착한” 사람 루디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의 영에 이끌려 빌립보 강변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기도하던 루디아를 만났습니다.

루디아가 사도 바울을 만났을 때 마음을 열고 바울의 말을 청종했다고 했습니다. “착한” 사람은 마음을 엽니다. 그리고 온 집이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착한” 사람은 청종도 잘 하고 순종도 잘 하고 결단도 잘 합니다.

그 다음 집을 열고 지갑을 열어 바울의 일행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 16:15).

“착한” 사람은 집을 열고 지갑을 엽니다. “착한”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사람인데 지갑도 열로 집까지 엽니다. 결국 루디아의 집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도 바울이 가장 사랑하는 가장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습니다. “착한” 사람 루디아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루디아는 무엇보다 먼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강변교회를 개척해서 28년 동안 목회하면서 빌립보교회를 모델로 삼으면서 목회를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제가 한 평생을 살고 나서 할 수 있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제일 좋은 사람과 제일 필요한 사람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사람도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선을 행하는 “착함”의 제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지금 우리 한국교회와 사회에 필요한 사람들도 무엇보다 먼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우리들이 어떻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들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너무너무 “착하신” 분들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그리고 사도행전에 나타난 “착한” 사람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우리들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착함”을 우리 몸과 마음과 영혼에 지니고 나타내 보이는 “착한” 사람들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읽어드리므로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39-45).

개포동 사랑의빛교회 신상문 목사님과 성도들 모두에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가득하게 베풀어주셔서 모두 “착함”을 몸에 지니고 모두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착한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그래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한평생 살다가 죽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찬송가 “사랑하는 주님 앞에”(278, 220)를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