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담임 하나님 조롱하자 자퇴 결심
검정고시 후 신학대학 조기 진학과 유학
아이들의 의심과 질문으로 메시지 시작
‘하나님 마음 보이는 스토리텔링’ 노력

김성경
▲김성경 전도사는 “하나님께서는 ‘너의 모든 눈물은 내가 너에게로 달려가는 길이었다’고 말씀하신다”고 전했다. ⓒ이대웅 기자

“막막한 연기 속에 갇혀 있을 때, 그 어둠의 골목을 지나고 있을 때, 믿어 보세요. 내가 하나님을 보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당신을 보고 계세요.”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드는 질문이 뭐예요? 하나님은 왜 내 미래와 앞을 다 아시면서 내 실수와 실패를 막아 주지 않으시는가? 왜 이 고난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가? 대답은 한 가지입니다.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큰 그림에는 당신의 완벽함과 성공도 필요하지만, 또한 넘어짐과 실패도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을 위해 전하던 메시지가 책에 담겨 있다. 교회를 등진, 돌아오고 싶지만 그럴 힘조차 없는 이들을 위해 ‘세상이 교회로 들어오지 않겠다면, 교회가 세상으로 나가겠다’고 기도하며 시작한 원디사이플 미니스트리 김성경 전도사의 <안심하라, 하나님의 타이밍은 완벽하다>가 토기장이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김성경 전도사는 지금 원디사이플 미니스트리가 있는 청주 지역을 넘어, 기독교 뉴미디어 ‘교회친구다모여’의 ‘메시지 크리에이터’로서 많은 크리스천, 그리고 넌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과 위로를 전하고 있다.

김 전도사는 중학교 자퇴 후 열다섯 살의 나이에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최연소 신학대학생으로 입학했고, 졸업 후 열아홉 살에 미국 사우스웨스턴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 과정을 수학한 이력을 갖고 있다. 짧지만 순탄치만은 않았던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타이밍은 완벽하다’고 고백하는 김 전도사의 이야기.

안심하라, 하나님의 타이밍은 완벽하다
김성경 | 토기장이 | 216쪽 | 12,500원

-책에 중학교를 자퇴했다고 써 있네요.

“입학하자 과학을 가르치던 담임 선생님이 첫날부터 ‘교회 다니는 아이들 일어나라’ 하시곤, 혼자 일어났던 제게 ‘쟤처럼 머리가 없는 놈들이 터무니없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런 꼴통 있으면 여기서 나가라’면서, 하나님을 조롱하는 말씀을 하셨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시골길에서 펑펑 울었어요. 제가 사랑한다고 하는 주님을 위해 한 마디도 못했기 때문이예요. 오히려 순간적으로 부끄러워했다는 게 비참했어요. 울면서 기도했어요. ‘저 너무 비참한데, 이 중·고교 6년 과정 대신 하나님을 위해 공부해도 되겠냐’고요. 6년을 하나님께 걸어보자고 결심했어요.

화가 나서 나온 게 아니라, 비전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풀어드리는 학생이 되자 다짐하고, 홀로 검정고시를 준비했어요. 1년 반 정도 공부해 열다섯 살 겨울쯤 중·고교 과정을 다 통과했어요.

그리고 열여섯 살 되던 해, 한국침례신학대학교에 입학했어요. 덕분에 6년을 다 바쳐 하나님에 대해 공부할 수 있게 됐어요. 열아홉 살 때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대학으로 신학을 공부하러 유학을 떠날 수 있었어요.”

-부모님은 자퇴를 반대하셨을 것 같아요.

갓 열네 살 된 아이가 얼마나 훈련이 돼 있었겠어요. 목회자인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다 그땐 ‘너 같은 애가 목사 되면 삯꾼 된다’고 걱정하셨어요. 너무 어렸죠. ‘저도 제 모습을 알아요. 깨지겠으니 허락해 주세요. 이 길을 가고 싶어요’ 설득했어요.

하나님이 많이 깨뜨려 주시는 과정이 있었고, 지금은 부모님이 많이 응원해 주세요. 할 수 있는 한 빨리 사역의 길에 뛰어들고 싶다고 기도했는데,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어요(웃음).

자퇴하던 날, 담임 선생님이 비웃듯 그러셨어요. ‘성경아, 네가 믿는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한다고 하는 자녀를 자퇴시키는 분’이냐고요. ‘적당히 믿으라’고 하셨는데, 용기였는지 모르지만 제가 ‘언젠가 하나님이 어떻게 살아계시는지 꼭 보여드릴께요’라고 답했어요.”

김 전도사의 말처럼, 자퇴는 조기 대학 입학과 유학이라는 ‘전화위복’을 가져왔다. 열 여섯 나이에 대학 입학을 하게 된 그는 2년 전 자신을 자퇴하게 했던 담임 선생님을 다시 찾아간다.

“대학교 입학증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떠올랐던 분이 담임 선생님이었어요. 입학증을 들고 아침 일찍 찾아갔는데, 교문 앞에 나와 계셨어요. 학교에 있던 친구들이 미리 귀띔했나봐요.

선생님은 제 손을 잡으시면서 ‘성경아, 네가 이렇게 공부 잘 하는 놈인 줄 알았으면 말을 했어야지. 그러면 너를 키워줬지’ 하고 안아주셨어요. 그때 하나님 앞에 감사했어요.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구나. 내 삶을 들어 써 주셨구나.’ 선생님은 그때 일을 기억하지 못하실 거예요.”

안심하라, 하나님의 타이밍은 완벽하다

-그런 일을 한 번 겪는다고 다 자퇴하진 않는데요.

“부모님 덕분인지 모르지만, 모태신앙으로 자라면서 자퇴 1년 전, 열세 살 때 하나님을 뜨겁게 만났어요. 그 감격이 다음 해까지 이어진 게 아닐까요. 그렇다고 열세 살 때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예요.

신앙생활을 하지만 여전히 갖고 있던 의심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살아계시다면, 신이라면 왜 자신이 만든 인간에게 죽게 됐을까. 힘이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순간 주신 생각이 ‘예수님이 누군가 만들어낸 가짜라면, 정말 그렇게 만들었을까? 자기를 위한 신을 이렇게 만들 리 없잖아.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처럼 전능한 신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이게 오히려 진짜라는 증거 아닐까’였어요. 그러면서 형식적인 모태신앙이 깨졌고, 예배 때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깊어졌던 것 같아요.”

-목회자 자녀, ‘PK’라면 신앙적 번민이나 갈등을 한 번씩 겪기 마련인데요.

“이런 질문 많이 받아요.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묻는지 알아요(웃음). 하지만 저는 없었다고 늘 대답해요. 그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정이라 행복했어요.

작은 시골 비닐하우스에서 돗자리 깔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예배드리던 교회였지만, 너무 행복했어요. ‘이게 하나님 믿는 삶이구나’ 할 정도로. 가난해도 행복했고, 유치원도 못 다녔지만 부모님 품에서 들었던 성경 이야기가 좋았어요.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조금씩 있었지만, 그마저 부모님 신앙 안에서 건강하게 깊은 믿음으로 바뀌었고요. 부모님 품에서 잠자던 시절이 행복했어요.

어린 시절에는 단순했어요. 돈이 없어 학원엘 못 갔지만, 친구들 학원 갈 시간에 놀아서 좋았어요. ‘왜 못 다녀?’가 아니라, 안 가니 자유시간이 많아졌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했어요.”

-열여섯 살의 대학생 시절이 궁금해지네요. 왜 하필 침신대였나요.

“아버지 교단은 오순절 쪽이었어요. 저는 주의 종으로서 길을 결정할 때, 바닥을 알고 싶었어요. 순복음 쪽 학교를 가면, 받을 수 있는 도움이 너무 많았거든요.

아버지는 설교를 그렇게 잘 하시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아이디어도 없는 분이세요. 하지만 아버지를 존경하는 건, 촌스러운 스타일로 바닥부터 성도님들과 같이 울어 주시고 걸어 주시는, 무대 아래서의 삶의 모습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아버지와 같은 교단을 가면, 어쩔 수 없이 바닥을 모를 것 같았어요. 편하게 학교 다닐까봐, 가장 연관 없고 아무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교단을 고민하다 보니, 침례교뿐이었어요.

처음에는 행복하게 시작했죠. 다들 형 누나들이라 이뻐해 주시고 기특하게 봐주셨어요. 영재처럼 알려지기도 했고요. 이 모든 게 칭찬인 줄 알았는데,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좋아 보일 때 시기와 미움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열 여섯 살이 무슨 철이 들었겠어요. 형 누나들 앞에서 예의 없는 막내였을 수도 있고요.

몇몇 분들이 미워하는 걸 느꼈어요. 힘들어서 어머니께 ‘그만두고 싶다’고 한 적도 있었어요. 어머니께서 제 성격을 아셨는지 위로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래, 빨리 때려치워, 응? 괜찮아. 나이도 어린데 뭐 어때? 세상 속 영혼들은 신학교 아이들보다 훨씬 독하고 아픈 영혼들이야. 신학교에서도 못 견디면, 나와서도 못 견뎌. 지금 때려치워.’

어머니도 그땐 제가 그만두겠다는 말에 심장이 덜컹 하셨다고 해요. 하지만 제가 누군가 밟으면 더 기를 쓰고 일어나려는 성격이라는 걸 아셔서 그러셨대요(웃음). 정말, 그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어요. ‘하나님을 위해 만나려는 세상 속 영혼들은 나를 더 아프고 실망시키고 더 크게 배신할 수도 있겠구나. 여기서 극복하고 배우자’ 하고 버텼어요.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수석도 하게 됐고, 사역도 열심히 하면서 4학년 때는 학생들 투표로 채플 리더로 뽑히기도 했어요. 20세 미만이 리더로 뽑힌 건 처음이었대요.”

김성경
▲(왼쪽부터) 원소울 스튜디오에서 아버지 김순석 목사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김성경 전도사. ⓒ교회친구다모여

-이후 스무 살에 미국 유학을 떠나셨죠. 가정 재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고 하셨는데요.

“열아홉 살 때 한 학기 조기 졸업해서 6개월 여유가 있었고, 미국은 가을 학기부터 시작되니 좀 더 시간이 있었어요. 1년간 알바를 계속 하면서, 미친 듯이 벌었어요. 달라스 사우스웨스턴 침신대를 선택한 이유도 저렴해서였어요. 무조건 50% 장학금 제도이고, 기숙사비도 너무 쌌고요. 입학하면 여러 장학금 제도도 많아 믿고 갔어요.

아버지는 유학 자금이 워낙 비싼 걸 알아서 반대하셨지만, 제가 딱 1년치만 도와달라고 해서 허락을 받았어요. 그렇게 1년은 버텼는데, 2년째가 되니 돈이 금방 없어졌어요.

그래서 총장님께 돈을 벌 수 없는 신분이라 학업을 멈춰야 한다는 사정을 개인 메일로 써서 보냈어요. 그런데 제 이름 김성경을 영어로 하면 ‘바이블 킴’이잖아요? 총장님 답장이 ‘이름이 독특해서 좋다, 우리 집으로 와 보라’고 하셨어요.

저를 몇 번 만나시더니, 마음에 든다며 ‘3년간 장학금 줄께. 3년 안에 몇 학점을 들어도 좋으니 마음껏 해보라’고 하셨어요. 미국은 학점대로 돈이 나가는 구조라, 3년 안에 학업을 마치려면 최대한 수업을 많이 들어야 했어요. 미국 학생들보다 더 많이 들으면서 3년만에 간신히 목회학 석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어요. 아무래도 수업을 따라가기 힘드니, 친구들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귀국하자마자 공익요원으로 2년간 복무하면서, ‘원 디사이플’ 사역을 시작했어요. 청주 지역 믿지 않는 영혼들,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에게 직접 찾아가는 사역이예요.

그러다 보니 청소년들이 들을 수 있는 설교, 자신들 마음에 일어나는 질문을 쉽게 마주할 수 있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짧은 영상을 만들어 나누기 시작했는데, ‘교회친구다모여’에서 좋게 보셔서 함께하게 됐고, 지금까지 함께 사역하고 있어요.

교회는 아버지가 사역하시는 모교회 전도사로 섬기고 있어요. 교회친구다모여와 원 디사이플 등 외부 사역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이해해 주는 곳은 아무래도 모교회뿐이어서요. 청주 반석교회에서는 매주 금요철야 기도회와 청년부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메시지에 짧지만 ‘한방’이 있습니다. 준비 과정과 방법이 따로 있으신가요.

“메시지 영상이 이렇게까지 쓰임받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크리스천투데이 페이스북에서 제 첫 영상을 올려 주신 것처럼, 그냥 찍어놓은 사진에 자막만 띄운 수준이었어요.

학교에서 순수하게 기도모임 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설교자를 매번 부르기 힘들테니 ‘5분 설교’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어요. 그거라도 틀어서 예배드리라고 한 것이 시작이었어요.

저는 아이들이 가진 질문에서 시작해요. 40-50분 설교를 준비할 때는 감명 깊은 본문으로 풀겠지만, 5분 안에 잃어버린 영혼을 잡으려면 내 해석과 감명 깊은 부분 대신 지금 그 아이가 던지고 있는 하나의 질문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이 던지는 의심과 질문이 무엇인지 적어놓아요. 그 질문들로 매달 영상 설교를 시작해요. 어쩌면 교회가 그동안 외면했거나, 대답하기 어려웠을 질문일 수 있어요. ‘기도하지 않아서 그래, 믿음이 없어서 그래’라고 외면했던 질문을 마주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들과 같이 공감해 주고 싶었어요. 그 의심이 당연하고, 그런 질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잖아요? 처음 나눴던 설교도 ‘하나님은 내 미래를 아시면서 왜 막아주지 않으시나요?’였어요.

제 메시지는 카리스마도 힘도 없지만 위로받는 분들이 있다면, ‘공감’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들이 하고 싶었던 질문 앞에 같이 서는 전도사라서요.

저는 ‘하나님 마음이 보이는 스토리텔링’을 하려고 노력해요. 비록 부족하지만, 있는 그대로 제가 아는 하나님 이야기가 지금 이곳의 이야기로 느껴지도록 전하고 싶어 많이 공부하고 연구해요.

스피치 전문가들을 보고 연구하고, 역사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도 옛 역사를 오늘 이야기처럼 흥미진진하게 전하는 강사들 있잖아요? 성경도 2천 년 전 이야기를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니까요. 5년 내내 그렇게 생각했어요.”

-남들과는 다른 타이밍으로 살아오셨는데, ‘책 제목처럼’ 전도사님에게도 하나님의 타이밍은 완벽했나요.

“처음엔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유학 시절은 처음엔 자신만만했어요. ‘하나님이 나를 쓰시는구나. 내 길이 열리는구나. 정말 잘 왔다’ 생각했어요. 하지만 누군가 유학 생활을 묻는다면, ‘처절하고 비참했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겸손이 무엇인지를 배운 기간이었어요. 힘도 빽도 없었고, 재능도 부족하고 쉽게 자리잡지 못해 밀리고 밀리다 보니, 하나님 앞에서 억울해했어요.

어떤 교회에서는 ‘사역자 자리는 이미 찼으니, 청소를 해 줄 수 있냐’고 물으셨어요. 2년차였는데, 너무 힘겨웠어요. 청소부 제안을 받던 그날, 고속도로에 차를 세워놓고 2시간 동안 울었어요. 나를 향한 타이밍은 없고, 남들의 타이밍은 다 빨라 보였어요.

그래서 더욱 교수가 되고 싶었어요. 유학 목표는 단 하나, 박사 학위를 빨리 따서 교수가 되는 것이었어요. 이 서러움을 보상받고 싶었어요.

그런데 서사 졸업 학기에 한국에 잠깐 들어와서, 교회를 다니다 떠나버린 청년을 만나 밥을 먹었어요. 그가 울면서 말했어요. ‘하나님이 너무 그립다’고. 이미 더러운 아이로 찍혀서, 교회로 돌아가지도 못한대요. 3시간 일찍 교회를 가서 주변만 서성이다 결국 못 들어간 날도 있었대요.

그 청년이 말했어요. ‘교회는 세상으로 나간 우리를 찾으러 오지 않아요. 철부지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너무 보고 싶어요.’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돌아가서 박사 학위 서류를 준비하는데 그 아이의 눈물이 잊혀지지 않았어요. 그들을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마음을 계속 주셨어요.

김성경
▲서울 신촌 교회친구다모여 사무실이 있는 헤브루스에서 만난 김성경 전도사. ⓒ이대웅 기자

하지만 ‘청소년 사역 하고 싶은 사람들이 널려 있는데, 이렇게 빨리 돌아가서 청소년 사역 하려고 유학 온 게 아니잖아요’ 하고 하나님께 내뱉었어요. 분노에 차서 ‘계속 이렇게 막으시면,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안 해요’라고 소리쳤어요.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야, 내가 너보다 잘해. 너보다 내가 너를 더 잘 알아. 그러니까 결국 너를 완성해 내는 나를 믿어’였어요. 그때 받은 마음이 이 문장이예요. ‘안심하라, 하나님의 타이밍은 완벽하다’.

그래서 박사 학위를 포기하고, 교수의 꿈을 버리고 돌아왔어요. 청주 지역 지하 클럽이나 공연장 같은 곳을 사비로 몇 시간 빌려, ‘원 디사이플’이라는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어요.

상처 받고 떠난 아이들을 위해, 교회의 벽을 넘어가고 싶었어요. 용기가 안 나서 술을 마시고 오는 아이들도 있어요. 술냄새 나는 더러운 바닥에 앉아 엉엉 울다가, 교회로 돌아가는 아이들도 있었어요. 이 영혼들을 만나는 게 너무 좋았어요.

5년째 그 아이들만 바라보면서 그런 메시지를 만들고 있는데, 그 덕분에 지금 침신대에서 미디어 메시지 만드는 것을 가르치는 교수가 됐어요. 그래서 느꼈지요. ‘하나님의 타이밍이 완벽했구나’. ‘저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꿈을 지켰을 때, 하나님께서 내 꿈까지 지켜 주셨구나’. 이미 다 잊고 포기한 꿈이었는데,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고 기억해 주셨어요.

침신대 총장님이 코로나 시대 속에 미디어 사역을 가르치고 현장에서 복음을 말하는 수업이 필요하다고 하셨대요. 그런 과정에 지원해서 선택을 받았어요.”

-‘한 사람을 위한 설교’, 원소울 스튜디오도 참신합니다. odg 같은 유튜브도 떠오르고요.

“교회친구다모여의 기획이었어요. 한 영혼을 앉혀놓고 메시지를 전하는 채널을 만들었는데, 메신저로 선택해 주신 거죠. 그런데 첫 대상이 (목회자인) 아버지였어요. 그 날을 잊지 못해요. 너무 당황했고,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설교였어요.

아버지 다윗의 등을 보고 자랐던 솔로몬의 마음에 대해 말씀드렸어요. 촌스럽고 바보 같은 시골 목사님이셨지만,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계셨던 아버지의 등을 보면서 했던 묵상이었어요. 서로 눈물 닦고 같은 차로 돌아오는데, 어색해 죽을 뻔 했어요(웃음). 기분 좋은 부끄러움이었어요.”

김성경
▲원소울 스튜디오 촬영 모습. ⓒ교회친구다모여

-결국 책까지 나왔네요.

“한 영혼이 있었어요. 어떤 상담을 해도, 아무리 은혜로운 영상을 보여줘도 마음을 열 수 없었던 절망 속 한 형제였어요. 제 설교 중 가장 은혜로운 내용을 보여주거나, 유명 예배팀의 은혜로운 영상을 보여줘도 마음을 열지 않았어요.

그런 말을 했어요. ‘전도사님은 진짜 절망에 빠진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고. 그 은혜로워 보이는 미디어 영상조차, 자신과 비교될 뿐이라고요. 그 화려함이, 행복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자신과 비교되어 더 비참하게 느껴진대요.

‘이 정도면 아무도 붙잡아줄 수 없겠구나. 방법이 없나’ 하는 생각으로 그 영혼을 보냈는데, 어느 날 새벽 전화가 왔어요. ‘이제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알고 보니, 그 친구를 마지막 상담하고 온 날 뒷좌석에 설교 원고가 있었어요. 상담 끝나고 ‘가져가도 되냐’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지요. 그 친구가 원고를 방구석에 꽂아놓고 잊고 있다가, 그날 새벽에 불안으로 깨서 우연히 봤는데 한 문장이 보였대요. ‘안심하라, 하나님의 타이밍은 완벽하다’.

그 방 안에서, 그 한 문장이 형제에게 말을 걸었던 거예요. 하나님과 형제의 새로운 만남이 시작됐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꿈이 생겼어요. 제게도 혹시 기회가 생긴다면, 화려해 보이는 미디어로도 담을 수 없는, 진짜 절벽 끝에 있는 영혼에게 마지막까지 흘러갈 수 있는 한 문장을 남기고 싶어졌어요.

그 끝까지 흘러갈 방법이 뭘까 생각했는데 미디어도 대화도 아닌, 그 친구에게처럼 언제 샀는지도 모를 방구석의 책 한 권이 도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 도구가 사람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디지털에서 아날로그로 돌아가는 선택이었어요. 그 때 교회친구다모여 은희승 대표님이 갑자기 청주로 내려오셔서, ‘한 영혼을 위한 위로의 책을 쓰자’고 해서 너무 기쁘게 시작했어요.

문제는 누가 출판해 주느냐였어요. 교회친구다모여는 출판사가 아니었고, 저도 사역 경험이 있지만 나이도 어리고 잘 알려진 사람도 아니었죠. SNS에서 좀 알려졌지만 정말 유명한 정도도 아니잖아요? ‘한 영혼을 위한 마음’을 같이 품어줄 곳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기꺼이 함께 가슴 뛰어 주신 곳이 토기장이출판사였어요. 그래서 함께 만들기 시작했죠.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책의 ‘진짜 주인공’들이 책을 마무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유명한 목사님들의 추천사보다 그들이 증인이 되어줬으면. 이 책을 읽을 한 영혼처럼 광야를 걷고 있는 평범한 이들의 추천사가 한 영혼의 마음을 열어주겠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감사한 것은 출판사도 동의해 주셔서, 함께해 주실 분들을 모집해 총 322명이 한 문장씩 추천사로 마음을 담아 주셨어요. 진심으로 동역하는 분들 덕분에 감사하게 완성됐어요.”

-이후 계획은 어떠신가요.

“기회가 된다면 한 권 더 책을 쓰고 싶어요. 그리고 ‘메시지 콘서트’ 전국 투어를 준비하고 있어요. 찬양 집회나 찬양 콘서트가 아니라, 말씀과 복음 하나로 더 소통과 은혜를 나눌 수 있는 집회와 콘서트를 열고 싶다는 비전이 있어요.

찬양도 있지만, 메시지가 주된 콘텐츠가 되는 콘서트예요. 지역별로 준비해서, 이 메시지가 필요한 영혼들과 현장에서 소통하고 복음 안에서 위로받는 여행을 준비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