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한 갈등과 긴장 속 긴밀한 협조관계 유지
한국의 지정학적 위상과, 거시적 지혜의 산물
미국, 권위주의 체제 후원하며 민주주의 압력
세계와 인류 공통 과제 함께 추구하며 발전을

한미사 박명림
▲박명림 교수(왼쪽)가 발표하고 있다. 그 오른쪽으로 정성진 목사, 박명수 교수, 박용규 교수. ⓒ한미사
‘한미 수교 140주년 회고와 미래방향’을 주제로 하는 학술회의가 ‘한미 수교 140주년 한국 기독교 기념사업회(이하 한미사)’ 주최로 지난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신관에서 온·오프라인 동시 개최됐다.

이날 학술회의 제1부 ‘한미조약 역사와 기독교’에서는 상임대표 정성진 목사(크로스로드)를 좌장으로 박명수 명예교수(서울신대)가 ‘조미수호통상조약(이하 조미조약)의 배경에 대한 재고: 슈펠트를 중심으로’, 박명림 교수(연세대)가 ‘한미수교, 한미동맹, 한미관계: 과거, 현재, 미래’를 각각 발표했다.

◈순응과 저항, 적응과 도전, 접근과 긴장의 결합

박명림 교수는 주로 해방 후 이어져 온 한미관계의 거시구조적 역사와 궤적에 주목하면서, 미국이 일방적으로 한국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상호 끊임없이 갈등함으로써 오히려 동맹이 단단해지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주지시켰다.

박 교수는 “국가 건설 이래 전체 관계의 표면을 먼저 볼 때, 한미관계는 궁극적 파국으로 가지도 않고 철저한 종속으로 가지도 않은 상태에서, 국가안보·경제·민주주의를 발전시킨 대표적 사례의 하나다. 둘은 상당한 갈등과 긴장 속에서도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다”며 “한미관계에서 그 대면 방식의 요체는 서로 다른 기조를 갖는 ‘순응과 저항’, ‘적응과 도전’, ‘접근과 긴장의 결합’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건국 이래 한미관계에서 갈등과 타협이 동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는 없었다. 이러한 ‘동맹 속의 갈등’, ‘갈등하는 동맹’은 역사적으로 드문 사례”라며 “이는 한국의 지정학적 위상과 거시적 지혜의 산물이었다. 불안한 세계질서 속에서 미국을 생존과 안전의 기축 동맹국가로 붙잡았기에, 누천 년간의 위협요소인 중·소(러)·일을 견제할 수 있었다. 한미동맹은 모든 국제관계와 외교지평 확대의 출발점이요 기축”이라고 설파했다.

박명림 교수는 “그러나 동맹 체결 후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중·소·일의 오랜 야욕과 지배, 한국전쟁 경험에 비춰 미국에게서 튕겨져 나가는 극단적 선택은 불가능했다”며 “그렇다고 미국 요구대로만 순응할 수도 없었다. 여기에 한미관계의 핵심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한국의 발전 요소는 미국에의 접근과 순응이 아니라, 저항과 도전이었는지 모른다. 한미관계 성공의 요인이 긴장과 갈등이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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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한미사
박 교수는 “냉전시대 약소국들에게 국가 전략의 핵심은 결국 미국과의 관계 문제였다. 극우친미의 몰락과 극좌반미의 실패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글로벌 패권국가가 존재하는 국제사회에서 친미와 반미의 극단적 양자택일은 바른 선택이 아니라는 점”이라며 “외부 시각에서 한국은 친미 정책만 편 사례처럼 보일지 모르나, 한미관계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한국은 적응과 저항을 거의 예술적으로 결합하며 급속한 발전을 이룩한 희귀한 사례”라고 덧붙였다.

그는 “미국은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의 등장을 허용하면서도, 김대중 구출 노력 등 인권 보호 정책을 중단하지 않았다. 얼핏 이중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정책이 기실 미국 대한 정책의 본질이었다”며 “미국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기를 거치며 반공 권위주의 체제 등장과 유지의 기본 후원자인 동시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도록 압박한 압력자였다”고 분석했다.

또 “미국은 1987년을 마지막으로 한국 국내정치에 개입할 레버리지를 상실했다. 경제원조와 배분, 민주주의·인권과 시장경제를 위한 압력을 넣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후에는 이것이 주로 안보·북한 영역으로 전이돼 표출됐다”며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친미반북-반미친북 구도를 넘어, 미국과 북한을 함께 포용하려 했다. 그런 점에서 한미관계 설정의 변수는 미국뿐 아니라 한국이며, 특히 민주화 이후 한국 시민사회가 결정적으로 중요해졌다”고 했다.

박명림 교수는 “이렇게 심각한 갈등을 지속하면서도, 한미 간 튼튼한 동맹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①한국의 독특한 지정학적 위상 ②역사적 경험과 학습의 중요성 ③냉전시대 동북아 지역의 독특한 국제질서 ④한국전쟁 경험이 갖는 결정적 의미 ⑤한국의 빠른 발전 등의 요인이 있었다”며 “특히 ⑥친미와 반미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던 국내적 균형이 중요했닫. 이는 국제관계와 국내정치의 ‘이중 긴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끝으로 전망에 대해선 “냉전 해체, 한국 성장, 북한 추락이라는 복합적 요인들로, 한미관계는 더 이상 과거 약소국 시절 받았던 특수이익의 보장과 시혜관계가 결코 아니다. 이제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배려받을 특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특히 냉전시대 지정학, 한국전쟁과 남북대결로 누렸던 위치는 지속되고 있지 않다. 워싱턴의 돌출하는 북핵 인정 가능성 시사와 한미 FTA 재협상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 바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단기적·사안적 우려에도, ①중화체제 이래 한국 생존과 지속이 유증한 지혜와 전략의 영향 ②건국 이래 급속한 발전과 성장의 교육 효과 ③시민사회의 교정 능력 등 3가지를 근거로 거시적·장기적 낙관론을 개진했다.

그러면서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인해 한국은 ‘공산 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자유 한국’의 방어를 넘어, 오래 괴롭혀온 중국·소련(러시아)·일본을 모두 제어하는 국제적 안전판을 확보했다. 이는 미국이 아시아 대륙 국가와 맺은 최초의 안보동맹일 정도로 한국의 쾌거였다”며 “한미동맹은 국가 기틀을 정초한 한국 외교관계의 초석이자 근간 중의 근간이었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이제 한미관계는 한미와 한반도 범주를 넘어, 세계와 인류 공통의 가치와 과제를 함께 추구하는 보편의 지평으로 성큼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내부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며 “안이 밖이고 내치가 외교다. 내부 진영 대결과 분열을 지속한다면, 보편 가치를 갖는 국격은 어렵다. 세계와 함께 가려면, 먼저 안에서 함께 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더불어 “보편 가치와 글로벌 선도 역할을, 남북관계와 민족주의가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며 “최근 더욱 중요해진 생명과 보건, 기술과 표준, 생태와 문명의 보편성과 선도성을 발양하고 고양하기 위한 국제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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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회의 모습. ⓒ한미사
◈미국, 조미조약에 ‘선교의 자유’ 안 넣은 이유

앞서 박명수 교수는 1882년 조미조약 체결 배경에 주목하면서, 미국 측 책임자였던 해군 제독 로버트 윌슨 슈펠트(Robert Wilson Shufeldt)의 영향에 대한 재고찰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조미조약에 왜 종교 관련 부분이 없는지, 기독교 선교 문제에 대해 슈펠트가 어떻게 이해했는지 등을 살폈다.

박명수 교수는 “과거 한반도는 중화 질서에 속해 있다가, 개방과 더불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질서에 편입됐다. 그 중심에 미국과 기독교 문명이 자리잡고 있다”며 “오늘의 대한민국은 서구 질서 속에서 재구성된 나라이지만, 21세기 들어 부상한 중국의 중화 질서 회복과, 이를 막으려는 미국의 패권 전쟁이 한반도 주변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박 교수는 “조미조약은 한반도가 중화 질서에서 벗어나 서구 기독교 질서 속으로 편입된 실질적 첫 단계였고, 소위 ‘슈펠트 조약’으로 불릴 만큼 그의 영향력이 지대했다”며 “아무도 조선에 관심이 없을 때, 그를 조선에 파견한 미국 해군부도 성과가 없으면 빨리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그는 조선 개항에 집착해 이홍장과 만나 조미조약을 맺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슈펠트는 1860년대 중국에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기독교 선교에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미국 정부와 해군이 통상 문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보는 반면, 선교 문제에는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그러나 1870년대 슈펠트는 아프리카 문제를 놓고, 미국 문명과 기독교를 아프리카에 이식시켜야 한다면서 기독교에 대해 종전과 다른 입장을 보였다”고 밝혔다.

박명수 교수는 “이후 슈펠트는 전 세계를 방문하면서, 당시 많은 국가들이 미국에 의지해 서구 열강의 식민지화를 벗어나 보고자 함을 알게 됐다. 미국의 민주제도와 자유종교 사상이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미국에 호감을 갖게 했다”며 “그러나 이미 대다수 나라들이 다양한 나라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기에 슈펠트의 전 세계 순방 외교는 성공적이지 않았고 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전 세계에서 대외적으로 개방되지 않은 유일한 국가였던 조선이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슈펠트는 중국과 일본이 조선의 개항을 지지하고, 조선의 영토를 노리는 나라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미국과 교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조선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고, 정치적·종교적 간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이는 매우 중요하다. 신미양요를 지나면서, 미국은 조선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동시에 조선의 독립권을 인정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슈펠트는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다. 그는 기독교 복음이 무력에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이 복음 자체를 반대하는 것인지, 복음은 너무 존귀해서 폭력 없이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며 “하지만 그는 ‘미국 문명은 19세기 기독교 문명의 결정체’라고 주장하는 등 기독교의 위치에 대해선 분명히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는 1880년 조선에 와서 과거 유럽 국가들이 선교사를 보내 개종을 시키려 한 정책을 강력 비판했다. 아마 이는 조선이 조약을 체결하도록 한 중요 요소가 됐을 것”이라며 “슈펠트는 협상 과정에서 선교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중·미일 조약과 달리 조미 조약에는 선교의 자유가 삭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미조약은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올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고 결론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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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들 기념촬영 모습. ⓒ한미사
제2부는 ‘내일의 한미동맹과 한미 기독교’를 주제로 정경영 교수(한양대)가 ‘통일 한반도의 비전과 한미동맹’, 허문영 박사(평화한국)가 ‘절대 폭풍의 도래와 우리의 국가전략 방향’을 각각 발표했다. 좌장은 김영봉 원장(한반도발전연구원), 토론은 정대진 박사(한평정책연구소)와 이은선 교수(안양대)가 각각 맡았다. 이후 김윤태 교수를 좌장으로 종합토론이 이어졌다. 1부 토론은 박용규 교수(총신대)와 박인휘 교수(이화여대)가 전했다.

한미사는 오는 2022년 5월 22일 한미 수교 140주년을 앞두고 한국 기독교 7대 교단(순복음, 침례, 통합, 합동, 감리, 백석, 성결)과 미국 교계가 협력해 지난 9월 2일 출범했다. 한미사는 한미 수교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한미 관계 미래 발전 방향을 정립, 아시아의 복음화와 민주화, 평화라는 공동 목표를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