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투 DB
기독교 교리 중 가장 많이 왜곡되는 것 중 하나가 ‘중생(rebirth, 重生)’이다. 예컨대 옛 생활을 청산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개과천선(改過遷善)’과 동일시하거나, ‘하나님 주권’으로 되는 ‘신적 영역(divine territory)’을 인간의 주권 아래 둔다.

또 그것은 ‘구원’에 있어 예정(Predestination, 豫定), 소명(calling, 召命)과 더불어 인간 간여가 불가능한 ‘하나님 기원적인 것(the oriented-God)’인데, 이차적인(the subordinate) 것, 곧 인간의 ‘회개’ 나 ‘선한 삶’의 결과물로 치환시킨다. 성경이 가르치는 ‘중생’의 의의는 어떤 것인가?

◈죄로 죽은 영혼을 살림

성경은 “모든 인류는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롬 5:12, 약 1:15)”고 선언한다. 그 말은 “모든 인류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해 죽었다(엡 2:1)’”는 뜻이다. 나아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됐다’ 혹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됐다’는 뜻이다.

성경이 ‘영적 죽음’과 ‘영적 무지’를 동의어로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 소경이라고 한 것은(요 9:39-41) 그들이 죄로 ‘하나님’에 대해 죽어 ‘성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이에 반해 ‘중생’은 죄로 하나님에 대해 죽었던 자가 ‘하나님을 향해 살림을 받은 것(골 2:12)’이다. 환언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자가 ‘하나님을 알게 됐다’는 뜻이다.

성경은 이것을 ‘소경이 눈을 뜨는 것’에 비유했다.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영적 소경’인 죄인들의 눈을 띄어 하나님을 보게 할 것을 예표한 것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중생’을 ‘어둠 속에 있는 자가 빛을 받은 것(고후 4:6)’과 ‘눈의 열림(開眼, 요 3:3)’으로 빗댄 것 역시 ‘영적 소경’인 죄인이 빛을 받아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완고하고 강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함

사도 바울이 죄인의 마음 상태를 ‘완고함(the hardening of their hearts, 엡 4:18)’이라고 했다. 이는 죄로 하나님에 대해 ‘죽었다’ 혹은, ‘강퍅해졌다’는 뜻이다. 사람이 죽으면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듯, 죄로 하나님에 대해 죽은 인간의 마음은 그에 대해 강퍅하고 완고하다.

예수님이 선상수훈(船上垂訓)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상태가 그랬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마 13:14-15)”,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사 48:4)”.

이러한 그들의 ‘강퍅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임으로 절정에 치달았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행 7:51-52)”.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강퍅한 마음을 부드럽게 중생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시켰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5).”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11:19)”.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고전 12:3)’는 말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강퍅한 마음이 ‘성령으로의 중생(rebirth by Holy Spirit)’을 통해 예수를 주라 부르게 된다’는 말이다. ‘믿음’이 오롯이 ‘중생의 결과물’임을 천명한다.

◈부정한 죄인을 깨끗하게 함

성경은 ‘죽음’을 ‘부정(不淨)한 것’으로 말한다. 이는 그것이 ‘죄의 결과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곧[구체적으로는], ‘죄의 결과로 죽음이 왔고 죽음의 결과로 부정해졌다(혹은 죄의 결과로 부정해졌고 부정해진 결과로 죽음이 왔다)’는 말이다.

율법이 ‘사람이 죽은 사람(the dead)의 시체에 접촉하면 부정해 진다(민 19:11)’고 규정한 것은 ‘죽은 자는 부정(不淨)하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죄인의 접촉이 불허(不許)’된 것은 ‘산 자에게 시체의 접촉이 불허’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반대로 ‘산 사람(the living)’은 깨끗하다. 이는 그에게 ‘죄의 결과인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곧, “죄가 없으니 죽음이 없고 죽음이 없으니 부정하지 않다(혹은 죄가 없으니 부정하지 않고 부정하지 않으니 죽음이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죽은 자는 부정한 자’요, ‘산자는 거룩한 자’ 라는 도식이 성립된다. 나아가 ‘죄로 죽어 부정’해진 인간이 거룩하게 되는 길 역시 ‘중생’을 통해 ‘죽음을 벗어나는 것’뿐이다. 성경은 이것을 ‘중생의 씻음(the washing of rebirth)’이라고 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여기서 ‘중생(rebirth)’을 ‘씻음(the washing)’으로 표현한 것은 ‘중생’이 ‘죽음의 부정함에서 벗어나게 한다(혹은 죽음의 부정함을 씻어낸다)’는 뜻이다.

‘구원(the saving)’을 ‘중생의 씻음(the washing of rebirth)’과 연결지은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구원’은 ‘중생’을 통해 ‘부정한 죽음’에서 벗어나게 한(‘부정한 죽음’을 씻어낸) 결과물이다.

그리고 ‘중생의 원천’은 ‘부정한 죽음’을 폐하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그의 ‘거룩하신 죽음’이 우리의 ‘부정한 죽음’을 대신함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키셨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