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통파 유대인 피터스, 일본에서 기독교 세례
출중한 어학 능력으로, 한국 입국 2년 만에 한글 능통
애송하던 히브리어 시편 62편 번역 출간 <시편촬요>
영어나 중국어 중역 아닌, 히브리어 원문 직접 번역

모든 사람 읽을 수 있는 순 한글 번역, 띄어쓰기 적용
번역한 시편 주제로 17편 가사 작사해 ‘찬셩시’ 수록
잘 알려진 찬송가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등 작사도

피터스 목사
▲왼쪽부터 <시편촬요>,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 목사>. ⓒ이대웅 기자
최초의 한국어 구약성경 번역자 피터스 목사(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 한국명 피득(彼得))의 일대기를 소개한 책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 목사>와 그가 최초로 번역한 1898년 판 <시편촬요> 영인본이 발간됐다.

최초의 신약성경 번역자인 존 로스(John Ross, 1842-1915) 선교사와 달리, 구약성경 번역자인 러시아 출신 유대인 피터스 목사는 한국교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피터스 목사는 1898년 <시편촬요> 번역 후 구약성경 개역위원회 평생위원으로 선임돼 1937년 ‘개역 구약성경’을 완성했다.

저자 박준서 명예교수(연세대 구약학)는 잊혀진 존재였던 피터스 목사를 한국교회에 다시 알리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그는 ‘피터스목사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박준서 교수는 “한글 성경은 한글의 대중화, 자유와 평등 사상의 확산, 민족 독립정신 고취 등 국민 계몽과 근대화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쳐온 것이 사실”이라며 “구약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 주신 피터스 목사는 한국교회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큰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교회뿐 아니라 한국 사회가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분”이라고 밝혔다.

피터스 목사는 1871년 제정 러시아(오늘날 우크라이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 ‘이삭 프룸킨(Isaac Frumkin)’도 박준서 교수가 연구 끝에 발굴해낸 것이다.

피터스 목사
▲구약성경 최초의 한국어 번역자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1871~1958)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
어린 프룸킨은 유대교 회당에서 히브리어를 배웠고, 시편과 기도문을 히브리어로 암송하며 자라났다. 어학에 특출한 재주가 있었던 그는 히브리어에 통달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에서는 유대인 차별과 박해가 심해, 많은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고 있었다. 23세 때 그도 러시아를 떠났다.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향했을 때, 그는 발길을 동쪽으로 돌렸다. 일거리를 찾아 이집트, 인도, 싱가포르를 전전하다, 일본에까지 이른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그는 교회를 찾아갔다. 정통파 유대인이 교회를 찾아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박 교수는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고 믿는다”고 했다. 당시 그는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지만, 독일어는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했다. 그가 찾아간 교회에서 사역하던 미국인 선교사는 마침 독일어에 능통했다.

독일어로 기독교에 대해 2주 동안 배운 이삭 프룸킨은 여기서 크리스천이 되겠다고 결심한다.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된 그는 새 사람이 된 징표로 그 목사의 이름을 따라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라고 개명했다.

이 소식을 미국성서공회 일본 책임자가 되는 헨리 루미스 목사가 듣고, 세례식에 참석해 피터스에게 한국에 나가 권서(卷書)로 일할 것을 제안했다. 피터스 청년은 한국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제안을 받아들여, 1895년 한국을 찾는다.

박 교수는 “피터스 청년이 한국까지 오게 된 일련의 사건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히브리어 능통한 피터스 청년을 택하시고, 섭리의 손길로 그를 한국까지 이끄신 것”이라고 확신했다.

박준서
▲박준서 교수가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에 온 피터스는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신약성경 쪽복음을 팔기 시작했다. 언어에 천부적 재능을 가졌던 그는 한국 입국 2년 만에 한글에 완전히 능통해졌다.

그는 그때까지 구약 성경이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권서 일을 하면서 틈틈이 히브리어로 애송하던 시편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시편 중 62편을 발췌 번역했을 때, 한시라도 빨리 한국 사람에게 구약성경을 읽히겠다는 일념으로 ‘시편촬요’를 출판했다. ‘촬요’는 ‘선집’이라는 뜻이다. 이 때가 1898년으로, 피터스 목사 일대기와 함께 출간된 <시편촬요> 찬송시 영인본이 그것이다.

<시편촬요>는 역사상 한글로 번역된 최초의 구약 성경이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처음으로 구약 말씀을 우리말로 읽게 된 것이다. <시편촬요>는 출간하자마자 매진 행렬을 이뤘다. 2천 부를 추가 인쇄했지만, 그것도 곧 매진됐다. 박 교수는 “당시 한국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에 얼마나 갈급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고 소개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시편촬요>는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이라는 것 외에도 몇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이는 △영어나 중국어 중역이 아니라, 피터스가 능숙한 히브리어로 원문에서 직접 번역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순 한글로 번역 △띄어쓰기가 보편화 되기 전, 띄어쓰기 시행 △피터스의 한국 입국 2년 만에 혼자 힘으로 구약 중 번역이 가장 난해한 시편을 유려한 한국어로 번역 등이다.

이번에 출간된 <시편촬요>에는 <찬셩시>도 수록돼 있다. 박 교수는 “피터스는 시편을 번역하면서, 찬송가 가사도 작사했다. 유대인 전통에서 시편은 읽는 책이 아니라 노래로 부르는 것”이라며 “그가 번역한 시편을 주제로 17편의 찬송가 가사를 작사했고, ‘시편촬요’와 같은 해 출간된 초기 찬송가 ‘찬셩시’에 수록했다(1898년)”고 설명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75장(주여 우리 무리를), 383장(눈을 들어 산을 보니) 등은 피터스 목사가 작사한 것이다.

박준서 알렉산더 피터스
▲지난 2019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박준서 교수가 발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피터스 목사는 이후에도 성경의 한글 번역 작업을 계속한다. 그는 미국으로 잠시 건너가 맥코믹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 선교사 자격을 취득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황해 재령, 평북 선천에서 선교 사역을 했다.

이후 그는 1926년 구약개역위원회 평생위원으로 위촉받아, 통달한 히브리어를 활용해 11년간 구약 개역 작업에 헌신했다. 병 치료를 위해 1년간 미국에서 지난 기간을 제외하면, 10년간 구약개역 작업에 몰두한 것.

1937년 마침내 개역 작업이 완료됐고, 한국성서위원회는 피터스 목사가 완성한 개역 구약 성경을 한국교회의 공인된 ‘개역 구약 성경’으로 공인했다. 그 후 새 맞춤법에 맞추고 고어체 문장(가라사대 등)을 수정해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다.

박준서 교수는 “개역 구약 성경이 완성되기까지,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호칭(하나님/하느님)에 관해 많은 논쟁이 있었는데, 개역 구약 성경에서 피터스 목사는 ‘하나님’으로 번역한 후 개신교에서는 호칭이 ‘하나님’으로 확정됐다”며 “피터스 목사를 도운 연동교회 이원모 장로의 공헌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어학 능력을 활용해 한영 사전 개정 작업도 맡았다. 어학에 능한 학자적 선교사 제임스 게일 목사(James Gayle, 1863-1937, 한국명 기일(奇一))이 1897년 출간한 ‘한영자전’에 대해, 7천 개 단어를 추가해 8만 2천 개 단어가 수록된 1,760쪽의 방대한 한영사전을 편찬했다.

피터스 목사는 문서 선교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애양원 전신인 ‘비더울프 한센병자 주거 단지’를 위한 봉사활동이다.

박 교수는 “피터스 목사는 나병 환자 거주 지역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시간 나는 대로 그곳을 방문해서 설교하며 사회에서 버림받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로했다”며 “박봉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한센병 환자와 가족을 위한 주택 40채를 건설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그가 기부한 돈으로 한센병 환자들이 직접 자신이 살 집을 건축했다”고 말했다.

목회도 계속 했다. 박 교수는 “피터스 목사는 1927년부터 1941년 은퇴할 때까지 13년에 걸쳐 설교했던 219편의 설교 육필 원고를 남겼다”며 “그는 남대문교회와 묘동교회에서 가장 많이 설교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쓴 설교 원고는 한국 교회사에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고, 앞으로 출판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피터스 목사
▲피터스 목사의 묘소가 있는 마운틴 뷰 묘지 정문 앞에 선 박준서 교수.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
박준서 교수는 LA 근교 패서디나(Pasadena) 풀러(Fuller) 신학교 연구교수 시절 피터스 목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그는 “패서디나는 피터스 목사가 70세에 은퇴한 후 미국으로 가서 말년을 보내신 곳”이라며 “평생 구약을 공부하고 가르친 사람으로서 묘소에 가서 참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지역 목사님들께 피터스 목사님의 묘소가 어디 있는지 물었는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내게 피터스 목사가 누구냐고 질문하더라”고 회고했다.

박 교수는 몇 달 간 현지에서 수소문하고 인터넷으로 뒤진 결과, 어렵사리 피터스 목사의 묘소를 찾아냈다. 찾아낸 묘소는 작은 묘비도 없이 잡초로 뒤덮혀 방치돼 있어, 당시 그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
▲미국 LA 근교 패서디나(Pasadena) 소재 마운틴 뷰 묘지에 있는 피터스 목사의 묘소. 잡초와 잔디로 뒤덮힌 묘소에는 작은 묘비 조차 없었다. ⓒ크투 DB
이후 한인 목회자 모임에서 피터스 목사 묘소에 관해 이야기했다더니, 한 목사가 “그렇게 중요한 인물에 관해 왜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이에 한국 교계와 사회에 피터스 목사의 공적을 알리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고, 2018년부터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를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

박준서 교수는 향후 기념사업회와 함께 서울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피터스 목사 기념비 건립, 피터스 목사 설교 육필 원고를 모아 설교집 출간, 기념강좌 개최, 영상물 제작, 자료 전시실 및 기념관 건립 등을 실시할 계획이다.

박 교수는 “성경은 원래 히브리어(구약)와 헬라어(신약)로 기록돼 있었다. 이는 배우기 어려운 언어들”이라며 “한국 사람들이 성경을 한글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크나큰 은총이자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를 당연하게 생각할 뿐, 감사하지 않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
▲서울 양화진에 있는 피터스 목사의 두번째 부인 에바 필드의 묘소와 약력.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왔던 에바 필드는 피터스 목사와 결혼하고 두 자녀를 낳은 후 암으로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크투 DB
최초의 한글 구약 성경 <시편촬요> 영인본에는 김중은 박사(전 장신대 총장)가 ‘<시편촬요>에서 한글 개역(개정) 성경까지: 구약 국역사(國譯史)의 관점에서’, 박준서 교수가 ‘<찬셩시>에 수록된 피터스가 작사한 17편의 찬송가’를 각각 해설했다.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 목사> 책에는 피터스 목사의 일대기 외에도 그가 직접 설명하는 한국어 성경 번역과 미국장로교회의 추모 글, 연대표와 사진 등이 들어 있다. 두 권의 책 모두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