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이론
▲<오징어 게임> 중 경찰인 동생 준호가 실종된 형 인호의 고시원을 찾은 모습. 라캉의 <욕망 이론> 등의 책이 놓여 있다. (본 사진은 해당 칼럼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넷플릭스 캡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만에 살아나시리라 하시니라(마가복음 10:33-34)”.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세 번째 예고입니다. 여기에서는 특히 고난의 장소가 종착역인 예루살렘이 될 것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창조가 시작된 에덴동산 역에서 시작하여 에덴 동쪽 놋 땅 역을 지나 방주 역을 통과하며, 바벨 역을 지나 갈대아 역에서 하란 역을 지나 세겜을 통과한 후, 벧엘 역에서 애굽 역을 통과하여 가나안 역까지 왔습니다.

헤롯 왕 때에 베들레헴 역에서 구주가 나시고 갈릴리 역과 예루살렘 역을 지나, 사마리아 역까지 복음의 전군 기지로 삼으라는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요한 사랑의 메아리가 이 땅을 향해 지금도 들려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과 10장은 갈릴리를 시작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의 여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서사(敍事)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지만 동시에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싫어하는 당시의 지도자들은, 자신들 마음대로 그 시대를 누리며 장악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벌써 세 차례나 사람의 아들이 거기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치명(治命)을 스스로 밝히셨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동행했던 제자들은 주님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자리 다툼으로 얼룩져 스승인 주님의 행보를 피곤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데, 뒤에서는 서로 이기고 세우며 움켜쥐느라 질척대는 발걸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멈추셔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마가복음 10:36-37)”.

제자들의 말씀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가복음 10:38)”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마가복음 10:39-40)”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4-4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려는 자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욕구가 육신에 담긴 본능이라면, 욕망은 마음에 박힌 뇌관입니다. 욕구는 절대적이지만, 욕망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망의 대부분은 남들이 원하는 것을 자신에게 주입하고 조작하며 더 나아가 욕망을 채우면 행복해질 것이라 왜곡하지만, 욕망을 완전한 수준으로 충족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누군가는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단정짓기에 이른다고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어느 정치인을 두고 하는 말씀으로 들려지기도 합니다. 한 나라에 지도자를 뽑는 과정에서 드러난 죄상이 너무나도 명백하며, 세 살 먹은 아이가 들어도 알아차릴 수 있는 부끄러운 일이건만, 차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참혹한 죄상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철면피를 앞세워 끝까지 욕망을 채우려는 그의 뇌구조는 어떻게 된 것인지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오징어 게임
▲게임이 거듭될수록 456명이던 참가자들은 줄어들고, 상금은 쌓여간다. ⓒ넷플릭스
그리고 비열하고 참혹한 죄상이 만민 앞에 드러났음에도 그를 추종하고 고집하는 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그를 옹호하고 있는지, 참으로 이상하리만큼 그들의 목적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소위 상위 계층의 욕망을 흉내 내며 동류 의식을 느끼기 위해 욕망을 욕망하고 있습니다. 욕망을 소비하느라 생명은 지속적으로 종속당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이 세상은, 갈수록 영리하게 타인의 욕망을 내가 욕망하도록 부추김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내게 이런 것이 필요할까요? 진정으로 청해야 할 것은 타인의 욕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것처럼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자기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채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비움을 통하여, 높음의 성취가 아니라 낮음의 신선함을 통하여, 차라리 내가 부서지고 말겠다는 결연함의 밀도가 모든 이의 종이라는 선포 속에 농축되어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희생과 섬김을 내 인생 그릇에 담아야 합니다. 비록 한평생 욕망의 바다에서 시달린다 할지라도, 우리 신앙인은 오늘의 사과나무를 심고, 망망한 바다라 할지라도 한 척의 배를 띄워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불쾌히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연민으로 가까이 불러,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해 주시는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이어가실 것임을 굳게 믿고 선포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그 끝은 있는 법입니다. 지금 당장 힘들고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 난관을 헤집고 나올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우선 터득해야 할 것입니다.

에덴의 역에서 시작된 우리 인간들은 베들레헴 역 과 나사렛 역, 그리고 갈릴리 역을 지나 예루살렘과 종착지인 사마리아 역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 홍수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참혹한 멸망을 예고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세상 유혹과 환락에 젖어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멸망을 좌초하고 말한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도 그러한 멸망의 종착역이 점점 빠르게 다가오고 있음을 인지하고 속히 회개하고 돌아와야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아른거리는 각종 유혹과 욕망들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과 믿음, 그리고 주님께서 스스로 본을 보여주신 그 순종의 모범 답안대로 우리 신앙인들은 믿고 의지하며 날마다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