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일원동 일원교회
일시: 2021년 10월 17일
본문: 마 5:43-45, 22:37-40

김명혁 목사
▲김명혁 목사. ⓒ크투 DB
성자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의 가르침을 두 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성자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에 그치지 않고 “원수 사랑” 까지 하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 우심이니라”(마 5:43-45).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을 너무너무 사랑하시면서 성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죄인 사랑과 죄인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세상에 오셔서 온갖 고난과 핍박과 저주를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저주의 죽음을 죽으시면서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였습니다.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30).

성부 하나님의 죄인 사랑과 죄인 구원의 뜻을 다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죄인 사랑과 죄인 구원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저주의 죽음을 대신 죽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종류의 불우한 이웃들을 찾아 다니시면서 사랑과 도움과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펴셨는데 너무 많은 종류의 불우한 이웃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으시고 성자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반대하고 핍박하고 때려 죽이는 원수들인 로마 군인들에게까지 그리고 평생 온갖 죄만 짖다가 잡혀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된 강도에게까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사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불우한 여러 종류의 이웃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셨고, 애굽과 앗수르와 같은 원수의 나라들에게까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의 손길을 펴셨고, 악독이 하늘에까지 상달한 니느웨까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의 손길을 펴셨다고 이사야와 요나가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찌어다 하실 것임이니라”(사 19:23-25).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 3:10).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2, 9-11).

결국 신·구약 성경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우리 삶에 있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야말로 예수님 사랑에 미쳐서 살던 사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소개하는 대신 “그의(예수의) 사랑하신 제자” 라고 소개하곤 했습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었느니지라”(요 13:22).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에게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요 19:26).

결국 사도 요한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성자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지적하고 또 지적하고 또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9.10).

사도 요한은 요한 1서 4장 7절부터 21절까지 열 다섯 절에서 “사랑”이란 말을 30번 반복하면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요한일서 4:7-8, 19-21).

그런데 말세가 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이 식어진다고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탄식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 대신 자기 사랑과 돈 사랑과 쾌락 사랑이 사람들을 사로잡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자기 사랑과 돈 사랑과 쾌락 사랑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했는데 요사이 한국의 교회상과 사회상을 반영하는 듯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일원동 일원교회에 와서 제일 귀중한 삶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에 전력하는 삶이라는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는 물론 세계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성경의 가장 귀중한 가르침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을 무시하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사랑”의 가장 중요한 방식인 주일 성수의 예배를 무시하게 되었고, “이웃 사랑”의 가장 중요한 방식인 이웃 나라의 타민족들과의 친밀한 교제와 도움의 손길을 펴는 일을 무사하게 되었고, “원수 사랑”의 가장 귀중한 방식인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나 아프가니스탄의 모슬렘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제와 도움의 손길을 펴는 일을 부정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배타적인 극보수주의자였습니다. 일본도 북한도 중국도 공산주의도 무슬림주의도 진보주의도 오순절주의도 모두 싫어하고 비판하던 배타적인 극보수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차츰 인종과 문화와 종교와 신학이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목회자들을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북한을 동족으로 인정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중국을 이웃 나라로 생각하며 존중하게 되었고, 신학이 다른 강원용 목사님과 조용기 목사님을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과 노숙자들을 애정을 품고 사랑하며 도움의 손길을 펴게 되었고 아프가니스탄의 어린이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서 학교 하나를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중국 연변 지역의 불우한 조선족 고아 학생들 150여명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일을 지난 20여 년 동안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불교의 스님들과도 천도교의 선도사들과도 가톨릭의 신부들과도 원불교의 교무들과도 친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지난 2010년 8월 27일에는 5개 종단 종교 지도자들 9명이 함께 북한 개성에 가서 밀가루 300톤을 전달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우리 주변 모든 이웃들과 타민족들과 타종교인들과 반 기독교적인 나라들의 사람들과도 친밀하게 지낼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보람되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웃 사랑”과 “타민족 사랑”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먼저 간단하게 줄여서 살펴보겠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그리고 이사야를 부르시면서 이스라엘 족속들에 대한 관심만을 나타내 보이시지 않았고 멀리 있는 다른 민족들에 대한 관심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다시 말씀 드리지만 성부 하나님께서는 “악의 축” 이라고 할 수 있는 니느웨 사람들과 동물들에 대한 애정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0-11).

신약에 오면 “하나님 사랑”은 물론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이 보다 구체적으로 보다 극단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성자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도 이웃 사랑에 한하지 말고 원수 사랑에까지 미쳐야 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3-48).

이것이 팔복을 말씀하신 마태복음 5장 말씀의 결론이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 성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중심이고 결론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면서 자기를 못박아 죽이는 로마군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사죄의 기도와 저주받아 마땅한 강도를 향해서 선포하신 축복의 말씀은 너무너무 지나친 극단적인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신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지나치게 극단적인 사랑의 말씀들을 읽으면서 가슴에 충격을 받고 가슴으로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사랑하실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사랑하실 수 있다는 말인가! 깊은 충격을 받고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성자 예수님께서 나타내 보이신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의 모습을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지나친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대상들은 모두 가치가 없는 쓰레기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모두 멸시와 천대를 받던 각색 죄인들과 각색 병자들이었습니다.

첫째로, 성자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제일 먼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의 손길을 펴신 사람은 그 당시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간주하고 멸시하던 문둥병 자였습니다.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 8:2-3).

사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수 많은 병자들과 죄인들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면서 친밀한 따뜻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우리들은 나환자들이나 신종 바이러스를 지닌 병자들을 만나면 병균이 전염될까 봐 가까이 가서 손을 대기는커녕 멀리 피하며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

물론 성 프란치스코와 한경직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은 예외였습니다. 나병 환자들의 몸을 만지고 상처 난 곳을 입으로 빨아주기까지 하면서 순수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둘째로, 성자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두 번째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의 손길을 펴신 사람은 이방인 백부장이었습니다.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마 8:5-7).

백부장은 그 당시 유대인들을 정복하고 착취하던 반 민족주의자의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백부장은 조선을 지배하고 착취하던 일본 군 사령관에 비교할 수도 있고, 6.25때 남침한 인민군 사령관에 비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원수였던 로마 백부장에게 사랑과 축복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마 8: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성자 예수님께서는 민족의 원수와 같은 로마 백부장에게 지나친 사랑과 칭찬과 축복과 손길을 펴셨습니다. 그를 극진하게 칭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성자 예수님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나친 “원수 사랑”이 가득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성자 예수님께서 한참 후에 또 한 사람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의 손길을 편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창녀였습니다.

분노와 증오에 찬 군중들에게 둘러쌓여 돌에 맞아 죽게 된, 두려움에 쌓여 벌벌 떨고 있던 창녀를 향해서 성자 예수님께서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사실 간음 현장에서 잡힌 사람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자 예수님께서는 돌에 맞아서 죽게 된 창녀를 바라보시면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난 군중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8:9).

결국 성자 예수님께서는 떨고 있는 그 여자에게 가까이 오셔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요 8:10).

그 여자는 너무 놀라고 너무 고마워하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주여 없나이다”(요 8:11).

그 간단한 대답에는 그녀의 신앙고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아마 통곡을 하면서 그렇게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때 성자 예수님께서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축복과 권면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1).

그 여자의 운명은 바뀌어졌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용서와 사랑을 베풀 수 없는 쓰레기 같은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축복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극단적인 사랑으로 충만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성자 예수님께서 한참 후에 또 한 사람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의 손길을 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야말로 인간 쓰레기였습니다.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눅 8:2)에 대한 세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일곱 귀신 들려서 미쳤던 사람이었다는 해석과, 길 거리의 부도덕한 창녀였다는 해석과, 일곱 가지 죄악에 사로 잡혔던 전형적인 죄인이었다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인간 쓰레기였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그와 같은 행동은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판단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지나친 사랑의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안락사시켜야 마땅한 인간 폐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귀신의 쇠사슬에서 건져 내셨고, 윤락의 늪에서 건져 내셨고, 죄악의 덫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일 먼저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였고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를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부탁하신 사람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랑은 이 세상의 도덕적·종교적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 없는 너무나 엄청나고 지나친 사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나친 극단적인 죄인들 사랑이 가득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성자 예수님께서 그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또 한 번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의 손길을 펴신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예수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던 로마 군인들과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던 행악자 강도였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중의 죄인인 로마 군인들과 강도를 향해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용서와 사죄의 기도를 드리셨고 다음과 같은 천국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너무너무 놀라우신 성자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로마 군인들의 대장인 백부장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눅 23:47-49).

성자 예수님께서 나타내 보이신 각색 죄인들 사랑의 모습은 상식을 벗어난 모순되는 듯한 지나친 사랑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 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세가 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이 없어진다고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탄식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은 물론 세계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이웃에 대한 불신과 갈등과 증오와 적대라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사랑”과 함께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쓰레기 같은 저주받아 마땅한 온갖 죄인들을 사랑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원수 사랑에까지 미쳐야 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유창한 말보다, 다양한 행사보다, 멋진 프로그램보다 성자 예수님께서 친히 몸으로 삶으로 죽음으로 나타내 보여주셨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의 조그마한 아주 조그마한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들이 성자 예수님 닮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성자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볼 때 그리고 성자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신 성 프란치스코와 한경직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 등 순수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선배님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볼 때 부족한 우리들도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지니게 되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실천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에 미쳐서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우리들의 원수들도 모두 사랑의 대상입니다. 북한 사람들도 일본 사람들도 중국 사람들도 타 종교인들도 무슬림 사람들도 모두 우리 사랑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들의 삶이 바꾸어지고 우리 교회와 사회가 바꾸어지고 우리들의 세상이 바꾸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보시고 웃으시면서 우리들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부족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사랑”과 함께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지니고 실천하면서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끝으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의 나환자 사랑의 기도문을 인용합니다.

“주여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 같은 사랑을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참으로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 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 하오나 인위적 사랑, 인간적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를 위하여 이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보다는 더 사랑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내가 또한 세상의 무슨 명예심으로 사랑하거나 말세의 무슨 상급을 위하여 사랑하는 욕망적 사랑도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에서 되는 사랑으로서 이 불쌍한 영육들만을 위한 단순한 사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의 남은 생이 몇 해 일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몸과 맘 주께 맡긴 그대로 이 애양원을 위하여 충심으로 사랑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그리고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제가 쓴 “사랑하고 싶어라” 라는 글을 인용합니다.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한 평생 나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과 사랑이 어찌 그리 크고 어찌 그리 많은지!실로 모래알보다 더 많은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나의 가슴에 눈물을 자아낸다. 사랑하고 싶어라.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어린이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귀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가진다. 저들의 얼굴과 마음과 영혼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고귀한 인성과 신성의 흔적을 보기 때문이다.

저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어라. 모슬렘도 공산주의자도 상관이 없다. 저들은 모슬렘이나 공산주의 라는 불행한 유산에 쌓여있는 가련한 영혼들일 따름이다. 사랑하고 싶어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2007년 1월 3일 아침 교회로 운전하며 오는 차 속에서 쓴 글)

이것으로 오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의 귀중한 삶” 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오늘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귀중한 사랑에 대한 말씀을 들으신 일원동 일원교회 교역자들과 성도들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셔서 우리들이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의 귀중한 삶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살게 하시기를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고 이웃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펴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