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접종시 구원 못 받는다는 미신에 관하여
불안감을 먹고 자라는 미신
미신을 퍼뜨리는 자들의 공통점
666의 기원, 666은 숫자가 아닌 제도
현대적 미신은 어떻게 양생되는가
코로나 19 팬데믹 환경이 2년째 지속되고 있다. 백신 접종률도 급속히 증가했다. 세계적으로 접종 횟수는 약 66억 회에 이르고 접종 완료율(2차 접종 이상)은 28억 명 정도로 추산하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의 총 접종 횟수는 약 6,920만 회, 접종 완료 인구 수는 약 3천만 명이라 한다.
문제는 백신 접종으로 인한 부작용과 사망자 통계는 제대로 계수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이 분명히 체험한 부작용과의 인과관계를 행정기관이 인정하지 않고 있기에, 불안감은 날로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코로나 백신은 666이며, 접종 후에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미신이다.
이런 그릇된 신념이 지금 이 시각에도 교회에 침투하고 있어, 목회자들은 코로나와 싸우랴 거짓 가르침과 싸우랴 고군분투한다는 전언이다. 교회 밖에서 이런 지식을 접한 성도들이 백신 접종한 목회자를 영적으로 무지 또는 타락한 목회자로 보거나, 또 그런 미신을 교회에 적극 유포하는 일에 가담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이 글은 의학적 지식을 논한 글이 아니다. 충분한 개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채 급조된 백신이 가져온 불안한 환경, 그리고 그런 불안을 틈타 진리를 훼손하는 그릇된 신앙에 주의를 당부하는 글이다.
어떤 사람은 모종의 독극물이 든 백신을 세계에 유포하기 위해 일부러 팬데믹 환경을 가져왔다고 믿는 경우도 있다. 이 글은 설령 그런 고의적 독극물 환경일지라도 파괴되지 않는 믿음에 관해 논하는 글이다.
의료에 대한 불신은 신구약의 오랜 전통이다. 고대 사회에서 일반인이 접할 수 있었던 의료란 대부분 무속/무당들의 요법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혈루증 걸린 여인이 의사들에게 괴로움을 받고 효험이 없었다는 말은 무당들에게 괴로움만 받고 효험이 없었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의료가 과학으로 거듭난 후에, 일부 기독교도가 과학을 배격하고 도리어 무속으로 선회한 것은 일종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신앙의 선조들이 배격했던 바로 그것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백신을 666이라고 지목하는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시한부 종말론이나 변형된 종말론 지식에 함몰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퍼스널 컴퓨터가 등장한 1980년대에 바코드가 666이라고 지목하는 선전물이 봇물을 이뤘는데, 이런 지식은 1990년대 다미선교회 시한부 종말론으로 자연스럽게 결집해 갈아탔다. 그 당시 임신한 여성 중에는 낙태를 한 여성도 있었다는 보고를 잊지 않을 것이다. 휴거를 위해 몸을 가볍게 해야 한다고 믿은 것 같다.
그리고 또다시 불과 몇 년 전에는 전쟁설을 퍼뜨린 자들이 있었고, 역시 같은 사람들이 여전히 코로나 사태와 맞물려 비슷한 약을 팔고 있다. 이 사람들이 파는 약을 구입하는 사람은 자기가 믿는 믿음에 확신이 없는 까닭이다.
백신에 부작용의 우려가 크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맞아야 하는 사람은, 좋아서 맞는 게 아니다. 팬데믹 전선의 최전선을 지키는 의료인이기 때문에, 혹은 생계가 걸려 있기 때문에 그 우려와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666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이때 666이 상징하는 바는 약의 성분이라기보다는, 제도이다. 다양한 종말론에 항상 매몰되는 사람들의 주장 대로 백신을 666으로 가정한다면, 사실 “백신은 666이다”라고 자판을 두들기는 컴퓨터나 스마트폰 자체가 666이다.
신용카드도 666이다, 아니 은행 자체도, 건강보험 코드도…, 그 모든 게 666이다. 독극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고대 초대교회가 666 제도와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666의 기원 ─ 666은 숫자가 아닌 제도
666의 기원이 된 요한계시록 13장 18절은 당대 유대 저술가들에게 유행하던 게마트리아 유희(수비놀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본에는 666(χξς́)이 아니라 616(χις́)이라 적힌 경우도 있다. 꼭 6.6.6.만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황제 네로를 지칭한 것으로 보이는 이 심벌은 네로를 그리스어로 표기했을 때와 라틴어로 표기했을 때의 차이일 뿐이다.
히브리어와 달리, 헬라어에는 6에 대응하는 알파벳이 없다. 5를 뜻하는 엡실론(ε) 다음이 곧바로 7인 제타(ζ)이다. 그러면 6이라는 숫자는 뭘로 쓰느냐. 그리스어 단어에서 꼬리로만 쓰이는 바로 이 ς(스티그마)가 6이다.
‘꼬리’가 중요한 심볼이지, 666(χξς́)이냐 616(χις́)이냐는 중요한 게 아니란 소리이다. 꼬리가 달린 건 짐승뿐이므로, 그래서 ‘짐승의 표’가 된 것이다.
이 짐승의 표는 잘 석의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들어오고서 명실상부 국가신앙으로 자리잡게 된 결정적 계기는 의료 분야 선교인데, 의료 분야를 원천적으로 666이라고 했다가는 여전히 끓이지도 않은 물, 배설물 섞인 물을 마시며 전염병에 노출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바리새인들은 금요일 직전에는 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약효가 안식일 날 운동하기에, 안식일을 범한다는 미신에서 비롯된 신앙이다. 마치 백신의 약물 성분이 우리 구원에 작용을 일으킨다고 여기는 미신처럼.
치명적 백신보다 치명적인 미신
“백신을 맞으면 구원 못 받는다”라고 단언했을 때 발생하는 그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렇게 주장하고 가르쳤다가는 무속/무당이 될 뿐 아니라, 이단이 되고 마는 사안이다.
그런 주장을 펴려면 다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런 사안에 경도된 분이라면 잘 유의해서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 바란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예수를 믿으면 도래하는 인간의 질적인 변화를 말한다. 흔히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말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릇된 표현이다. 의(義)가 없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 의를 이루시는 유일하고도 본원적인 길이요 문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이른바 ‘칭의’라 부르게 되었다.
칭의. 명사로는 디카이오시스(δικαίωσις), 동사로는 디카이오오(δικαιόω), 이들 어휘는 이 본질 행위를 일컫는 신약의 중요한 술어로서 ‘의롭다고 하다’란 뜻이다(‘의롭다’가 아니라 ‘의롭다고 하다’임을 유의).
초대교회 설립자들(특히 바울)이 하나님께서 예수님 믿는 사람들에게 이루신 결과를 표현하기 위해 들여온 말이다.
기독교인의 구원, 즉 그 질적 변화의 알파요 오메가가 바로 이 어휘로 집약된 셈이다. 여기서 이 칭의의 원형인 동사 ‘디카이오오’가 어느 정도로 중요하냐면, 이 질적 변화를 ‘법의학적’으로 표징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법의학적’이란 무엇인가. 가령 범죄자에게서 휴대폰이나 USB를 압수했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사법 행위가 있는데, 바로 포렌식이다.
증거 사물의 질적 상태를 법이 지켜보는 앞에서 포착하고 인증하는 절차다. 기독교인의 구원이란 이에(포렌식에) 상응하는 질적 변화인 셈이다.
이 질적 변화는 어디에서 왔는가?
예수. 더 정확히는 ‘예수의 믿음’.
우리 믿음에 선행된 예수의 믿음에 기초한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조건으로서 믿음이라기보다,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를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원리로 이해함이 타당하다(롬 1:17). 이것이 하나님이 정한 의(義)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
구체적으로는 이 계약 관계를 가리켜 세례라 부른다. 세례가 갖는 힘이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한다”는 말은 독살의 위험을 회피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의 질적 변화가 어떤 극독에도 훼손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완전한 질적 변화를 두고 감히 변했다고 주장하니, 바로 이단이 되는 것이다. 특히 그 질적 변화를 약물이라는 매개가 주도한다고 상상력을 자극하니, 무당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무당들 중에는 심지어 백신을 맞으면 네피림으로 변한다는 희한한 비유로 선량한 신자들의 불안감을 증폭해, 자기 존재를 부각하는 연료로 소모하는 자들도 있다.
이 완전한 변화 ‘디카이오시스(의롭다 하다)’를 오히려 변형시키고 모욕하니, 그들에게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이 ‘디카이오시스’는 다음과 같은 심판 본문에 근거와 원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신 25:1)
하나님이 의롭다고 정한 ‘예수의 믿음’을 파괴하려 들기에, 이들이 바로 배도자인 셈이다. 이들을 여러분 주변에서 속히 쫓아내고 그들로부터 떠나기를 권면한다.
교회에 드리는 권면
어떤 공동체이든지 혼돈의 시기에는 간략하나마 원칙을 정해두면 좋을 것이다. 교회는 상기 구원의 핵심 정의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실천 개요를 응용하시면 좋을 것 같아 몇 가지 정리해본다.
1. 백신 접종이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교회에서는.
2. 이는 어디까지나 급조된 백신의 효력에 관한 우려 때문이지, 666이라서가 아니다.
3. 목회자들은 대개 자신이 교인들을 맡았다는 책임 때문에 무엇이든 답을 내주려는 관성이 있는데, 백신 접종은 부작용의 우려가 있고 미접종은 사회 부담이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4. 목회자는 백신을 접종하든 안 하든, 자신이 추구하는 솔선수범에 관해 명확히 해주는 것이 좋다. 자기 모범을 통해 그것을 장려할 뿐이지, 자신은 의료인이나 방역당국이 아니다.
5. 그러나 복음을 어지럽히고 사회 질서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무지한 거짓 지식에 관해서는 단호할 필요가 있다. 복음을 미신으로 훼손하는 까닭이다.
6. 교회가 지금의 시국에 대치하고 있는 것은,
1) 백신이 아니라 코로나이다.
2) 불공정 방역 정책, 곧 예배 탄압이다.
3) 그리고 이런 혼란을 틈타 거짓 콘텐츠로 자기를 부각하는 이단들이다.
7. 코로나 및 백신 관련하여 기독교인으로서 건강한 입장은, 목회자가 자기 주관으로 대응하기보다는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의료인, 법조인 등 각계 전문가들이 정리한 자료들(이미 많이 유포된 상태임)을 활용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 전공 주임교수 | 크리스천투데이 칼럼니스트, 월간 《월드뷰》 편집위원 및 편집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며, 연구 저서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요한복음 파라독스》를 발표했고, 역서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성서와교회연구원)를 내놓았다. 그리고 원어성경 학습 프로그램 파워바이블 앱 개발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