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목회와 신학 별개로 생각하는 것이 현실
기독교 신학은 신이나 진리 찾는 학문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 통해 신학 시작되는 것

목회와 신학 다르지 않아, 하나이면서 구분될 뿐

성경 말씀 전달하고 함께 사는 것 신학이요 목회
신학,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 선포 및 교육

한국침례신학대학교(침신대)
▲침신대 수업 모습. (본 사진은 해당 기고와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크투 DB

두란노에서 발간하는 <목회와 신학>지에 한동안 ‘목회와 신학의 가교’라는 난을 두고 있었다. 목회와 신학의 가교(架橋)라는 말은 목회와 신학 사이에 ‘다리를 놓아 연결하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어, 목회와 신학이 별개라는 것을 전제하는 말로 들린다. ‘목회를 위한 신학’, ‘신학이 있는 목회’를 지향하자는 당연한 취지의 말도 역시 같은 전제를 의식해서 하는 말로 들린다.

여하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목회와 신학을 별개로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이를 검토하여 바람직한 이해를 이끌어내자는 뜻에서 제의한 것인 줄 안다.

신학이 무엇인지 옳게 이해한다면, 목회와 신학이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은 하나이면서 구분될 따름이다.

신학이 우주와 인생의 본질에 관하여 말한다는 점에서 철학과 유사한 것 같으나 실은 판이하다. 철학에서는 질의응답과 논리 전개에, 그리고 신을 찾는데 끝없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신학은 그렇지 않다. 신학은 먼저 독서를 많이 하고 명상하고 사색한 결과 진리를 터득하고서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신학은 끝없이 신을 찾거나, 진리를 찾는 학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찾아 주시고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므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 신학이 시작되고 신학이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고 알리시되, 먼저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계시하시므로 사람들은 그들의 증언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청종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성경, 즉 구약과 신약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증언이다. 신학을 있게 하고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계시의 말씀, 곧 성경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말하는 신학이 처음으로 있게 된 계기와 장면을, 우리는 모세가 소명을 받는 데서 본다.

출애굽기 3:13-15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도록 명하시는 말씀과 모세의 질의와 응답은 신학이 무엇이며 목회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둘이 어떻게 관련된 것인지를 잘 드러내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보이심은 그냥 하나님 자신을 알리시거나 그와 대화하시기 위해서 또는 그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 가운데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의 조상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모세에게 오신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 받아야 하는 백성을 의식하는 데서 신학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 3:13)?”

모세는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알리시는 말씀을 들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나타셔서는 복 주시고, 그의 자손은 물론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 12장). 그리고 이삭과 야곱에게도 같은 복을 내리신다고 약속하셨다.

그 때는 하나님께 당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셨다. 야곱이 얍복 강변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후 이름을 물었을 때, “네가 왜 내 이름을 묻느냐?”고만 대꾸하시고, 그냥 복을 내리셨다.

족장들에게 그냥 복 주시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명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다. 자녀가 아버지를 그냥 아버지로 알면 그만이듯, 사람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면 그만이다. 대문 앞에 선 이더러 “누구세요?” 묻는 말에 아버지가 “나야 나” 하면 그만인 것이나 같이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며 말씀하시고 함께 하시고자 하는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자신들의 정체성도 잃고 노예로서 매일 힘든 노동을 하느라 심신이 지치고 절망적인 상황을 겪으면서, 불신으로 억세어지고 거칠어진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마음을 두고 계신 백성이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해야 하는 전달자였으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물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있는 자(에웨 아쉐르 에웨)”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나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말씀을 3인칭으로 지칭하는 이름이 여호와(야웨)이다.

창세기 2장 7절부터 여호와로 지칭되고 있는 하나님이시다.-모세오경을 쓴 이가 모세라면, 여호와 하나님의 지칭은 모세로 말미암은 것이다-영원 자존자, 창조자이시며 만물을 초월해 계시는, 불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계를 초월해 계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내재하셔서 만물과 함께 사람을 다스리시고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복 주시기로 약속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창 12:1).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만으로 신학은 아직 시작되지 않는다. 신학, 즉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 하나님을 객관화하여 3인칭으로 지칭하면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을 염두에 둘 때, 비로소 신학이 시작되고 의미를 갖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는 것이 신학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주실 정도로 세상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고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신학이고, 이 사실을 믿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을 돌보는 것이 목회이다.

실천신학회가 개최한 성장동력교회 세미나
▲과거 교회에서 진행된 신학자들의 학술대회 모습. ⓒ크투 DB

그러므로 목회와 신학은 하나이다. 하나이면서 구분될 따름이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들을 전도하러 내보내신다. 먼저 충분히 가르치고 훈련을 시키신 후에 내보내신 것이 아니고, 아직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내보내셨다.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면서 그들로 바로 복음 전파하게 하시고 그렇게 실천함으로써 복음을 배우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이 제자교육, 즉 신학교육의 원리이다. 이 같이 예수님의 제자 교육은 공자나 석가모니나 소크라테스의 것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것이 복음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사람을 구원하는 기쁜 소식이므로, 시급히 전달해야 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일반 학문과 같지 않다.

선지자와 사도에게 신학과 목회는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신학자와 목회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성경 말씀, 즉 하나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그들로 하여금 말씀을 따라 살게 하며, 설교자와 목회자가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이 신학이요 목회이다.

그런 뜻에서 목회는 신학과 목회의 과업을 가장 충실히 이행하는 복된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이다.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에 대한 관심 없이 그냥 신학이라는 학문에 마음이 끌려서, 혹은 신학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하는 신학은 진정한 의미에서 신학일 수 없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사명을 맡기시는 장면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흩어졌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요 21:15-17). 신학은 목회를 전제함으로써 성립하며 교회가 있어서 존재하고, 목회는 신학이 있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즉 설교가 곧 신학이다. 설교로 표현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신학은 신학일 수 없다. 신약의 서신들이 곧 신학이요 목회를 위한 설교이다.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선포하고 가르치는 데서 성립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고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곳에는 신학이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설교도 없고 목회도 없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의 권위를 높이지 않은 중세의 교황주의 교회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목회가 없었다.

말씀의 권위를 높였던 종교개혁자들에게는 그들의 신학이 곧 설교였으며, 설교가 곧 신학이었다. 종교개혁에 활력소가 되었던 루터의 신학적인 짧은 글들이 다 그가 한 설교였다. 루터와 칼빈의 강해 설교가 곧 그들이 남긴 성경주석이다.

설교는 독백이 아니고 교회의 회중을 앞에 두고 전달하는 말씀의 선포요 가르침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말씀의 권위를 높이며, 말씀에 굴복하고, 말씀에서 은혜를 받고, 말씀을 따라 설교함으로써 목회를 회복하였고, 그래서 교회가 생동하게 되었다. 그들은 목회자임과 동시에 신학자였다. 그들에게는 목회와 신학이 하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다음 세대, 즉 정통주의 시대에 오면 목회와 신학에 괴리가 생기기 시작한다. 신학자와 목회자가 성경의 권위를 높인다고 하면서도 지나치게 교리논쟁에 몰두한 나머지 그들의 설교가 사변적이며 추상적이 되었다.

설교가 어려워서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옳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고, 사람들의 현실 생활과 관심사와는 동떨어진 것이 되어갔다. 그리하여 교회는 생동성을 상실해 갔다.

교회 역사에서 초기의 신학 교육은 교회 안에서 제자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7세기 경 신학교가 교회의 학교로 독립된 기관이 되기 시작했으나, 신학교는 여전히 교회에 속한 학교로 존재해 왔다.

신학교가 신학 지망생들에게 노회의 추천서를 요구하는 것은 교회가 목사 후보생 교육을 신학교에다 위탁하는 오랜 전통에서다. 그런 뜻에서 노회의 추천은 일반적인 의미의 추천이 아니고 위탁이다.

교회의 신학교가 대학으로 발전하거나 새로운 대학이 생기면서, 신학은 여러 학문 중 하나가 되고 일반 학문처럼 되어 갔다. 17세기 계몽 사조 이후 합리주의를 따르고 성경을 한낱 문서로 취급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신학은 목회와는 무관한 학문으로, 다시 말하면 교회와는 별개의 독자적인 학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신학이 조직신학, 성경신학 또는 교회사 등으로 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그런 경향은 더 심화되었다. 18세기와 19세기에 합리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이 만연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권위에 대하여 회의하며 비판하는 사상을 받아들이고 전하기 시작하였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은 더 이상 참된 의미의 설교나 목회는 할 수 없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확신하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지 못하는 신학과 해석으로는 교회가 자라지 못할 뿐 아니라 생동하지 못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아론이 대변자로, 동역자로 동참하였다. 설교자들이 아론과 같은 대변자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것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출 4:14).

구원의 복음이 어떤 것인지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 잘 밝혀 주는 말씀이다.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모세가 든 구리 뱀을 쳐다보면 구원을 얻었다. 거기에는 합리적으로 타당한 설명이나 개연성의 설명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즉시 순종하는 자는 구원을 얻는 사실이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 5).”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이고 제자들의 선포요, 개혁자들의 신학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목회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고히 믿어야 하고 가감 없이 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 선지자가 될 뿐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은 살피기를 게을리하고 백성들의 기복신앙이나 부추기고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로만 설교하는 자나, 자기가 합리적으로 이해할 만한 말씀만 골라 설교하는 자는 예레미야를 괴롭히던 선지자들처럼 거짓 선지자임을 면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하시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한다. 요한복음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사랑하는 독생자를 희생 제물로 주실 정도로 세상을 사랑하신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이다(요 3:16).

설교자와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당신의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헤아려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모세가 자신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자격이 없다면서 거듭 사양하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적을 보여주기까지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구원의 뜻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도록 강권하신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흩어졌던 제자들이 디베랴 바닷가에 함께 모인 자리에 부활하여 나타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요 21:15-1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의 대답이었다. “내 양을 먹이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려고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물으신 것이 흔히 말하듯, 주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그의 사랑을 확인하시기 위해서였을까? 그보다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자리를 함께한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당신의 양을 돌보도록 세 번이나 거듭 부탁하고 당부하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구하러 가라고 강권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나,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 씩이나 부탁하신 말씀은 성삼위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당신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로 알게 해 주는 말씀이다.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께, 아니 당신의 교회를 돌보라고 하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뿐 아니라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신학이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당신의 몸인 교회를, 교회의 지체이며 주님께서 맡기신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을 돌보며 함께 사는 것이 목회이다.

개혁신학회에서 주제발표 중인 김영재 박사. ⓒ류재광 기자
▲김영재 박사. ⓒ크투 DB

김영재 박사
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