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는교회 백성훈
▲이름없는교회 이동환 집사의 그림.
시편 90편

빈손으로 어디로 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인생에 대한 노래들이 많습니다. 가수 최희준은 ‘하숙생’이라는 노래에서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라고 노래했고, 가수 김국환은 ‘타타타’에서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라고 노래합니다. 모두 인생을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도 비슷한 표현들이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하룻밤 유숙하는 나그네와 같게 하셨다(렘 14:8)”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가지 더 말합니다. 세상의 노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묻기만 하는데, 성경은 그 답을 말합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죽으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나그네 인생이자만, 그 처음과 나중까지 정확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늘 인생에 대해 질문하지만 답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그 모든 질문에 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답을 아는 사람의 인생은, 비록 나그네의 삶이라 할지라도 담대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답을 찾지 못해 방탕한 삶을 살거나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에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시편 90편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믿음의 반응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지도 말합니다.

가장 먼저 시인은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창조자이며(1-4절), 심판의 주관자입니다(5-9절), 그리고 우리 인간은 그 심판의 대상입니다(10-11절). 때문에 우리는 창조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 앞에 그분의 긍휼을 간절히 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12-17절).

여기서 긍휼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가 우리가 행해야 할 믿음의 반응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여호와여 돌아오소서(13절)”라고 기도합니다.

‘돌아오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슈우브’인데 잘못된 것을 버리고 원래 것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용하시면, 우리가 죄를 버리고 긍휼을 붙잡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와 반대로 하나님에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심판을 버리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의미가 됩니다.

이처럼 이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마음이 강조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원래 뜻이 ‘심판’이 아닌, ‘긍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말씀이든 하나님의 원래 마음이 긍휼임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안볼 것처럼 말씀 하셔도, 그 원래 마음은 그게 아닙니다.

인생의 질문에 답을 알고 살면 담대해지듯, 하나님의 원래 마음이 긍휼한 마음인 것을 알면 두려워하기보다 기도하며 긍휼을 구하게 됩니다.

나아가 시인은 자신을 위한 기도를 넘어 자신의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진 사람들, 떠나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내 가족과 내 친구, 지인들만 해도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기도하며 간구합니다.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13절)”라고 간구합니다.

여기서 “언제까지니이까”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을 알고 있는데 언제까지 화를 내실건가요? 잘못했으니 저 사람들을 다시 용서해 주세요”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긍휼의 기도는 나를 넘어 나라와 민족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긍휼은 어떻게 구해야 할까요?

긍휼히 여김을 받으려면, 우리가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죄악을 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옥을 묵상하고 심판의 두려움을 가지면 될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 나라와 풍성한 은혜를 묵상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지금 시인이 고백하는 우리 인생이 돌아가야 할 원래의 곳,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더 좋은 것을 보여주심으로 죄악을 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위대한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 지옥’을 외치면서 야단치고 정죄하는 것으로 복음을 전하면 안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소개하고 그 은혜가 우리의 삶에 어떻게 임하는지를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완전합니다. 성령의 은혜가 임하고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 드디어 나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믿음은 두려움으로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시인은 우리가 하나님 나랑와 그 은혜에 집중하기를 요청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인생이 끝나면 만나게 될 하나님 나라, 즉 본향을 2가지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첫째, 죽음은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통로입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에 나 혼자 가면 안 됩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첫째, 죽음은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통로입니다.

한 가지씩 살펴봅시다. 우리의 본향은 인생이라는 시간의 끝에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초반에 하나님을 시간의 창조자라고 소개했습니다. 그 시간이 다 지나면 우리는 죽음을 맞습니다.

시간은 절대로 과거로 향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미래의 죽음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으로 향하는 시간을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시인은 이 죽음이 본향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말했습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3절)”.

지금도 교회의 성도가 죽으면 ’소천‘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늘의 부름을 받고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이라는 시에서 이 소천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인생을 소풍에 비유했는데, 사실 성경은 나그네 길로 비유했으니 같은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 교회에 이런 의미를 담은 권면을 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에베소서 5:16-18)”.

여기서 ‘방탕하다’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헛되이 보낸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하는데 진노를 사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 사람이 방탕하게 살까요? 첫째는 시간의 끝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죽음 이후 심판대에 선다는 것을 부인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과거와 미래보다는 지금의 시간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일수록 지금의 시간에만 집중합니다. 어른들은 반대로 과거의 시간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시간을 다 펼쳐놓고 인생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과거를 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고, 현재를 미래를 보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도미노 게임은 그냥 몇 개 놓고 넘어뜨리면 재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엄청 길게 늘어놓으면 특별해집니다.

우리 인생의 도미노는 맨 처음 누가 넘어뜨릴까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 넘어지고 나면 어떻게 될까요? 심판대를 지나 하나님 나라로 갑니다. 그 시간이 결코 길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의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4절)”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죽음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대에 서게 되는 통로가 됩니다.

시인은 그 심판대를 준비하지 않는 인간의 무지함을 한탄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10-11절)”.

그런데 우리는 죽음만 준비하려고 합니다. 노년의 안정된 생활, 자녀의 유산 상속만 준비하려고 합니다. 물론 필요한 부분이지만,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에 모두 함께 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에 나 혼자 가면 안 됩니다. 내 주변 모든 사람들이 함께 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나의 죄가 용서받지 못해 심판대에 서지 않도록, 그리고 내 주변에 사람들까지 죄로 인해 심판대에 서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90편은 모세의 기도입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1절)”에서는 누구의 시인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과 영어 성경에는 정확하게 모세의 기도라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용서해 달라는 것일까요? 죄를 짓고 징벌을 받은 이스라엘입니다. 지금도 모세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기도를 넘어 나라와 민족의 기도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참 은혜가 되는 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탕자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탕자가 돌아올 때 맞으러 달려 나간 아버지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가 달려나갈 때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달려와 맞아 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긍휼을 구하며 본향으로 돌아갈 소망을 품는 것이 우리 믿는 자의 인생입니다.

지금 코로나로 참 어려운 시기입니다. ‘위드 코로나’를 준비하며 만반의 대책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한 가지 더 준비해야 합니다. 바로 나그네 된 인생길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 순간을 함께 준비합시다. 나와 가족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기도합시다.

이름없는교회 백성훈
▲백성훈 목사가 금요기도회를 온라인으로 인도하고 있는 모습.
백성훈 목사(김포 이름없는교회)
<시편의 위로>, <시편의 소망>, <팀사역의 원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