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지팅엔젤스 김한수 대표의 시니어 라이프
▲비지팅엔젤스 김한수 대표의 시니어 라이프
‘악수표 밀가루’를 기억하시나요? 60대 이상의 시니어 분들은 기억하실겁니다. 성조기를 상징하는 별과 두손이 굳게 악수하는 그림. 이것은 1950년대 미국이 보낸 밀을 가공해 담은 밀가루 포대를 두고 사람들이 붙인 별칭입니다. 미국의 대외차관기구 ‘USAID’의 로고였던 거죠. 당시 우리나라는 6.25전쟁으로 기반시설은 모두 폐허가 되고 논밭은 피폐해졌고, 산은 민둥산이 되어 아무것도 먹을것이 없는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후 폐허가 되어 있던 이 땅에 막대한 구호 물품들이 들어왔습니다. 의료품, 생필품, 농산물 등 다양한 원조 물자를 제공되었고, 당시 미국이 준 원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미국의 밀, 설탕, 면화였습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들어온 미국의 농산물은 당시 기아 선상에 시달리던 한국인의 식량난 해결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이 구호 물품들로 우리나라는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수 있었습니다.

이후 해외 경제원조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밑걸음이 되었습니다. 1945년부터 50년간 우리나라가 지원받은 해외원조 규모는 600억 달러로 추산되고 특히 산업화가 시작되던 1969년에는 당시 우리나라 예산의 1/4에 해당하는 800억원이라는 큰 금액의 원조를 한번에 받으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든든한 밑걸음이 되어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가 넘는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군사력 역시 세계 6위권으로 이제 누구도 쉽게 흔들 수 없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도움을 주는 나라로 완전한 탈바꿈했습니다. 1995년 광복 50주년이 된 그 해에 우리나라는 세계은행이 지정하는 원조대상국에서 제외되었고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2009년에는 파리에 있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의 심사를 거쳐 개발원조위원회(DAC)의 24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게 된것입니다.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된것으로 역사상 세계 최초로 기록 되었습니다.

이후 우리나라는 양적 질적 성장을 통해 중견 공여국으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2020년 우리나라의 원조 규모는 22.5억 달러로 전체 DAC 회원국중 16위 수준이며, 성장률은 연평균 9.7% 증가하며 최상위 수준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원 내역도 우리가 받았던 식량 원조 같은 현물 제공뿐만 아니라 사회 인프라 및 서비스(58.6%), 경제 인프라 및 서비스(12.7%)등 사회 시스템이 원할하게 작동할수 있는 인프라 중심으로 지원해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개도국의 코로나19위기 대응 및 회복력 강화를 위해 방역물품 지원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조용근 이사장
▲해외 무료 급식소 봉사중인 조용근 이사장
공적개발원조(ODA) 뿐만 아니라 NGO나 일반 개인등 민간 차원에서도 도움은 푹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국내 한 장학회가 동남아시아의 대표적 저개발 국가인 미얀마에 13년전부터 활발하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조용근 전 대전국세청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석성장학회 입니다. 석성 장학회는 지난 1984년 조용근 이사장의 부모님이 남긴 유산 5천만원으로 장학사업의 기틀을 마련해 개인적으로 운영해오다가 2001년도에 정식으로 재단법인을 설립해 불우한 학생들과 교육 소외계층에게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장학금을 지원해오고 있는 장학회입니다.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의 학생들을 위해서도 도움을 주고 있는 석성 장학회의 조용근 이사장이 2008년 미얀마를 방문한 것을 인연으로 지금까지 미얀마를 돕고 있습니다.

2008년 미얀마에는 태풍 나르기스가 덮쳐 8만여명이 목숨을 앗아갔고 수십만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조 이사장은 폐허가 된 학교를 목격하고 당시 1,500여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움을 시작했습니다. “양곤 시내에 있던 학교가 다 무너져서 학생들이 운동장에 엎드려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팠죠. 6.25 전쟁때 폭격으로 학교가 사라져 뙤약볕에서 공부하던 기억이 나 무조건 도와야 겠다는 생각으로 해외 장학 사업을 전개해갔습니다.”

조용근 이사장은 2008년부터 무너진 학교 부지에 건물 8동을 짓고 교실을 증축을 했으며 급수시설과 학교 담장등을 새롭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양곤 지역 최초로 고등학교에 컴퓨터 교실을 만들어 미얀마 교육지원사업을 활발하 추진해왔습니다. 최근에는 200평 규모의 농구,배구, 배드민턴 등 구기종목을 비롯해 태권도 교육등 다양한 체육활동이 가능한 실내 체육관을 건립하기도 하였는데요, 이에 학교 측은 도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학교 이름을 ‘딴린 제3고등학교’에서 ‘대한민국 석성고등학교’로 변경하고 한글 간판도 설치하며 기념하고 있습니다.

조용근 이사장
▲미얀마 현지 석성 고등학교 현판식. 왼쪽에서 4번째가 조용근 이사장
“현지 학교 설립을 통해 하드웨어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이어서 지난해부터는 미얀마 학생 3명을 전면 장학생으로 선발해 국내 한양대학에서 공부하도록 지원해 인재를 직접 키워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도움받았던 것처럼 해외 어려운 이웃들도 우리가 도와 ‘나눔과 섬김’의 헌신이 미얀마 현지에서도 널리 전파될 것을 확신합니다.”

한국에서도 이미 25년간 어렵고 소외된 청소년 가장을 비롯해 다문화.탈북자 가정의 자녀등 3,400여명의 초.중.고.대학생들에게 26억원 상당의 장학금을 지급해온 조용근 이사장의 해외 장학 사업은 어려웠던 시절 도움을 받았던 우리에게 또다른 감동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단순히 한번 돕는게 아니라 13년간 꾸준하게, 그리고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낚시하는 법을 알려주는 조 이사장의 도움 방식은 큰 의미로 다가갈 것입니다.

한국 전쟁이 마무리되고 연합군 총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우리나라를 두고 이런 말을 남기며 떠났습니다. “이 나라가 재건되는 데는 최소 백년은 걸릴 것이다.” 맞습니다. 우리의 힘만으로 일어나려 했었다면 백년이 지나도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전 세계가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몰려든 종 구호 물품과 경제적 도움으로 인해 우리는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세계 인구의 4/5는 개발도상국에 살고 있으며, 이중 1/3은 1인당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고 있어 빈곤으로 인해 생명까지 위협받고 있습니다. 최빈국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나라로 성장한 대한민국은 그들에게 ‘할 수 있다’ 라는 롤모델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혼자 일어나는 일은 몹시 힘듭니다. 우리가 내민 손이 그들에게는 분명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도울 차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