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도파, 전통 교회 조직 밖에도 교회 존재 가능 보여줘
복음 진리 단순하게 설교, 선행과 헌신, 윤리 삶 추구
당시 가톨릭, 왈도파에 신경 곤두세우고 강력 대응해
왈도파 신앙 운동, 기존 체제 붕괴로 이어질까 두려워

박해 리옹 순교 왈도파
▲톱으로 고문당하는 신앙인들. 《위대한 이단자들》 표지 그림이다.
1. 순회 설교자 무리

리옹의 빈자들(Poors of Lyon)이 펼친 왈도파 신앙 운동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외형적 교회 조직 밖에도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신앙과 행위의 최종적인 권위를 다만 제도화된 외형의 교회가 아닌 오직 성경에서 찾았다. 이는 다가오고 있는 교회개혁 운동의 여명이었다.

당대의 성직자들은 전도 활동을 하는 순회 설교자들을 푸대접했다. 그리스도의 생명력 있는 복음이 단순성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왈도파 신앙 운동이 부패한 자신들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음을 간파하지 못했다.

리옹의 빈자들―왈도파 신앙인들은 복음 진리를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설교했다. 원시 기독인들의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을 재현하고 싶어했다.

단순한 것은 언제나 강렬하다. 왈도파 신앙인들의 설교는 강한 호소력을 지녔다. 단순한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참회, 선행, 자발적인 윤리적 삶, 헌신을 추구했다. 또한 성직자들의 방종, 타락, 교회의 부패 그리고 이단 카타리파 사상을 질타했다.

리옹의 빈자들은 신성하지 않거나 모독적이거나 경박스런 말을 피했다. 독일어권의 왈도파 사람들은 ‘진실로’, ‘참으로’, ‘진정으로’, ‘솔직히 말해서’ 따위의 표현을 삼갔다. 자신들이 하는 말 모두가 진실하고 정확함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 무렵 로마 교회 신자들은 의도적으로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험악한 언어를 자주 사용했다. 왈도파 무리의 일원으로 낙인찍히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일부 리옹의 빈자들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윤리, 사회 활동, 언어를 거부하고, 로마 교회의 신자와 같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결혼 대상자를 왈도파 신앙 공동체 안에서만 찾았다.

구성원들 가운데는 자아 의식이 높고 우월감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자파의 신앙 운동에 대한 자긍심, 우월감, 배타적 의식을 갖기도 했다. 왈도파 교회가 사도 바울의 스페인 여행길에 세워졌다고 하고, 기독교가 로마화 되기 전에 왈도파가 존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기존 교회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낸 알프스 지역 왈도파 사람들은 우월감을 가지고 주변 지역 사람들을 얕잡아 보았다고 전해진다.

로마 교회는 교황과 감독이 사도직의 직통 계승자라고 하는 배타적 교리를 근거로, 평신도 무리의 설교 곧 복음 전도 사역을 금했다. 설교를 유효한 사도권을 전수받은 성직자의 고유한 과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왈도파 신앙인들은 달리 생각했다. 예수의 사도들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설교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설교하라고 했고, 왈도파 사람들은 그러한 사도적 명령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리옹의 빈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복음 증거와 말씀 사역을 하라고 부름 받았다는 강한 소명의식을 가졌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이야말로 진정 사도직을 계승한 자들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발상은 교계(敎階)를 절대시하고, 교황과 감독만이 사도직을 계승했다고 하는 로마 교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리옹
▲리옹 시내. ⓒvaldesina.it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왈도파 무리를 검열하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은 웨일즈 출신 영국인이며, 한때 영국 왕의 대리자였던 월터 맵이었다.

왈도와 그의 동료들은 수도사이며 신학자인 맵의 성가신 질문을 받았다. 당시 로마 교회 구성원 다수는 왈도파 사람들이 무식하다고 조롱했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며 사도직을 우습게 여기는 하찮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맵은 왈도파 사람들이 신학 훈련을 받지 않은 무식한 자들이라고 단정하고서, 쉬운 질문부터 시작했다. “성부, 성자, 성령을 믿는가?” “과연 삼위일체의 위격들을 믿는가?”라고 물었다. 왈도파 사람들은 “믿습니다”라고 답했다.

맵은 여러 가지 기독교 기본 교리들을 질문했다. 그들은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믿는가?(Do you believe in the Mother of Christ?)”라는 질문에 “예” 하고 답했다. 위원들은 그들의 무지에 웃음을 터뜨렸다. 마리아를 믿는다가 아니라 마리아에 관해서 믿는다(believe on)라고 말해야 옳기 때문이었다.

왈도파 사람들은 자신들을 옭아매려는 올무나 그물망을 인식하지 못하는 참새처럼, 고의적으로 넘어뜨리려고 묻는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고 있었다.

위원회는 “우리가 그들을 받아들이면 우리들이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왈도파 무리를 억제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지위와 교회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리옹의 빈자들의 전도 활동을 금했다. 교황청은 왈도파 사람들의 자발적 빈곤서약은 용인했지만, 사제의 초청 없이 설교활동을 하지 못하게 했다. 설교는 성직자의 고유권한이라는 신념을 드러냈다.

위 결정은 새로운 복음 전도 운동에 대한 사제들의 불만의 반영이었다. 로마 교회는 새 신앙 운동이 배타적 사도직과 기득권과 교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리옹의 빈자들은 복음 전도와 설교 활동이 교회 생활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설교는 신적 소명이다. 이단 카타리파에 속한 자들을 가르쳐 귀정(歸正)시키는 일이 시급하다.

복음 전도와 설교 활동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명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를 금함은 옳지 않다. 교황, 교계(敎階), 교권보다 하나님 말씀 전파 사명 수행이 더 우선적이다.

복음 전도와 설교 활동을 중단하라는 교회의 요구는 하나님의 소명에 역행한다. 왈도파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거나 위배되는 무엇을 감독이 명령하면 불복해야 한다. 만약 그 성직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경에 부합하는 어떤 것을 명령하면, ‘비록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지시, 명령에 복종한다”고 했다.

교회는 왈도파 신앙인들의 활동을 강력하게 제재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추종자 수는 증가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도 수는 점차 많아졌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앞장에서 지적했듯이, 왈도파 신앙인들이 성경 애독, 설교, 복음 전도만이 아니라 스스로 빈곤을 선언하고 같은 시대에 같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왈도파 기독인들은 수도사처럼 청빈하게 살았다. 성직자나 수도사가 아닌 자들이 마치 성직자나 수도사처럼 사도적 빈곤을 실천하면서 복음전도에 전념했다.

이는 당시의 교회 제도와 수도원 제도와 일치하지 않았다. 왈도파 사람들의 사도적 청빈과 순결 이미지는 대중만이 아니라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리옹 빈자들의 청빈한 삶은 당시 성직자들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었다. 사려 깊은 사람들은 세상적인 부를 소유하고 있는 성직자들을 참 목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부패한 성직자는 주의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여우들에게 맡길 까닭이 없다.

순결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순결을 지도할 수 없다. 천국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자가 어찌 타인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그들에게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리옹
▲리옹 위치. ⓒvaldesina.it
교회가 왈도파 무리를 박해하자, 이 새 신앙 운동의 지도자들은 로마에 있는 교황에게 항소했다. 로마는 항소를 기각했다. 교회의 사도직 개념과 성직주의 제도에 익숙하거나 충실한 신학자들이 거부했다.

그들은 왈도파 신앙인들이 신학을 공부한 바 없고 무식하며, 따라서 항소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교회는 왈도파 무리의 주장에 반론도 제기하지 않았다.

리옹의 빈자들은 베로나 공의회(1184)의 이단 정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설교 활동을 계속했다. 왈도가 리옹에서 추방당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가르치고 복음 전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르본의 감독은 왈도파 신앙운동을 이단으로 규정했다(1190). 왈도파 사람들이 교회 당국자들의 지시와 가르침에 거역하고, 평신도들이면서도 감히 설교한다는 까닭을 앞세웠다.

토울의 감독은 리옹의 빈자들을 체포하라고 명했다. 교황 루시우스 3세는 카타리파와 왈도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십자가 표시를 두른 ‘신앙의 용사들’을 동원하여 추종자들을 검거했다.

교회가 왈도파 신앙 운동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강력히 대응한 까닭은 이 무리의 ‘단순한 복음적 신앙’이 기존의 교회 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덕성 지음, <위대한이단자들: 종교개혁500주년에 만나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제5장 1부 중 일부

칭의론 새 관점
▲최덕성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리포르만다(http://www.reformanda.co.kr)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