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2021년 9월 셋째 주
“故 조용기 목사님의 사진에 투영된 내 얼굴”.

저는 총회가 끝나고 하루이틀이라도 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총회가 끝난 바로 다음 날, 조용기 목사님의 소천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가난하고 외로운 신학생 시절 저의 희망의 아이콘이고 아이돌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례위원장으로서 이른 아침 6시 40분에 도착해서 이영훈 목사님과 함께 제일 먼저 헌화를 하였습니다.

사실 지난번에 너무 무리를 해서 탈진 직전까지 왔다가 겨우 회복이 되어가는 중에 총회까지 치렀고, 좀 쉬려고 했는데 조 목사님의 조문소를 지켜야 했습니다.

첫날부터 저는 12시간 이상씩 서 있었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 정·관계 인사들이 올 때는 2-3분씩 앉을 수 있었지만요. 그리고 둘째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온종일 서 있으니까 발목과 무릎이 아프고 허리가 뻐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또 교회로 돌아와서 수요저녁예배와 금요철야기도회를 인도했습니다. 물론 일각에서 부정적 댓글을 다는 분들도 있는 걸 봤습니다. 저라고 해서 조 목사님의 공과 과를 왜 모르겠습니까?

등소평 역시 모택동으로부터 모진 핍박을 받았지만, “모택동의 공은 7이고 과는 3이다”라고 말하면서 오늘의 중국을 만드는데 역사적, 정신적 자산으로 삼았지 않습니까? 조 목사님이 쌓아 오신 공은 이루 말할 수 없고,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불멸의 빛으로 남을 것입니다.

저는 장례위원장으로서 빈소를 지키면서, 눈물을 강물처럼 쏟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들을 보며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들이 “우리의 기도가 부족해서 조 목사님을 천국에 빨리 보냈다”고 하면서, 이영훈 목사님께 “조 목사님처럼 젊은 날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건강 지켜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시고, 제 앞을 지나가면서도 “소 목사님도 건강하셔야 합니다”라고 인사를 하시고 가시는 것입니다.

옆에 계신 조민제 국민일보 회장님도 “제가 보면 소 목사님도 꼭 우리 아버지 젊은 날처럼 무리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소 목사님도 오래 못 사십니다. 목사님도 골프도 하시면서 건강관리를 잘 하세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조문을 하며 애통해 하는 성도들의 눈물 속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역사가 읽혀지고 보여졌습니다. 조 목사님 영정 사진을 바라보던 중, 문득 국민일보 창간 31주년 기념예배 때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그때 조용기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신 후, 저는 축사를 하였습니다. 축사를 하는 순간 연거푸 아멘 소리가 빗발치고 끝나자마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영훈 목사님께서 통성기도를 인도하셨고 저도 강단에 서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데, 누가 제 손을 잡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보니까, 조용기 목사님이 제 손을 목사님의 머리에다 얹으며 안수기도를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소 목사님 같은 패기와 용기, 그리고 영력을 다시 회복하고 싶어요. 소 목사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 주세요.” 저는 순간적으로 조 목사님을 꽉 끌어안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조 목사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조 목사님 귀에 대고 큰 소리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조 목사님이 젊은 날 얼마나 체력을 소진하셨습니까?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세계 최대의 교회로 키우고 5대양 6대주를 다니며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온 몸의 진액을 짜내며 희생하셨습니까?

또한 위태로울 한국교회 수십 년 후를 바라보시며 공적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는 대변지 국민일보를 창간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 목사님은 몸을 축을 내고 축을 내셨습니다. 부디, 조 목사님의 수고를 보상해 주시고 건강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청년의 몸과 두뇌와 혀와 기백을 주시옵소서….”

조 목사님께서도 기도하는 내내 어린아이처럼 제 품에 안겨서 “아멘, 아멘”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동안 정말 제 몸과 마음이 불덩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영상에 찍혔고, 대부분의 성도들도 역시 그 모습을 다 보았습니다. 그 사진을 보니 조 목사님께서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고 계셨습니다.

조용기 소강석
▲소강석 목사와 이영훈 목사 등이 15일 오전 가장 먼저 조문하고 있다.
그런데 그때 제 기도가 부족했는지, 결국 조 목사님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조 목사님은 생전에 저를 그렇게 부러워하였습니다. 저를 보면 옛날 어르신의 젊은 날이 생각이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조 목사님의 영정사진을 보니까, 저의 80대 모습이 미리 투영되는 것입니다. “나는 몇살까지 살며 어떤 모습으로 내 인생을 마감할 것인가?”

저는 장례위원장으로서 입관까지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발인예배 때는 조시를 낭독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산리에서 있었던 하관예배까지 다 참석하였습니다.

저는 장례위원장보다는 신학생 시절 수돗물로 배를 채우며 허기진 배를 안고 조 목사님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던 한 사람의 목사로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앞으로 조용기 목사님과 같은 인물은 쉽사리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하관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눈물이 빗방울처럼 쏟아졌습니다.

그 눈물 속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담고 또 담았습니다.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