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이영훈 목사(우)가 생전의 조용기 원로목사와 함께한 모습. ⓒ여의도순복음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설립하고 세계 최대 교회로 일군 조용기 목사가 소천받으면서, 현 담임 이영훈 목사가 조 목사를 이어 사역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이영훈 목사는 “조용기 목사님은 ‘20세기를 빛낸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한국교회 부흥과 세계 교회 성장을 주도하며 개신교 선교 역사에 한 획을 그으신 분”이라며 “1958년 5월 18일 故 최자실 목사님과 함께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서 천막 교회를 시작한 조용기 목사님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4차원의 영성을 바탕으로 ‘희망의 신학’을 펼쳤고,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폭발적인 교회 성장을 이루며 1992년 교인 수 70만 명을 넘어 세계 최대의 교회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고 소개했다.

특히 “1970년대부터 외국의 주요 언론들이 앞다투어 ‘여의도순복음교회 성장 비결’을 소개하면서 ‘조용기’라는 이름은 기적과 희망을 불러오는 ‘복음 전도자’의 대명사가 됐고, 20세기 후반 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한국인 중 한 사람으로 부각되기도 했다”며 “조용기 목사님은 영혼 구원과 사회 구원을 동시에 강조하며 국제구호 NGO ‘굿피플’을 설립했고, 국민일보를 창간했으며, 인권 환경 보건 통일 및 아동복지 등의 증진에도 앞장서신 분”이라고 전했다.

교회 측은 “대형교회들의 담임목사직 세습이 이어지던 중, 2006년 11월 당회의 비밀투표를 거쳐 선출된 이영훈 목사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주고 은퇴함으로써 리더십의 모범적인 세대교체를 실천하신 분”이라며 “조용기 목사의 이러한 목회철학은 이영훈 목사에게로 이어져, 이 목사는 교회 예산의 30%를 구제와 선교에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이영훈 목사는 매년 수 차례 교인 가운데 가장 어려운 가정을 방문해 기도하며 아픔을 함께 나누고 희망을 불어넣고 있고, 동남아시아 어려운 나라들에 설립한 굿피플을 통해 구호사업을 펼치고 있다”며 “이러한 연유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서민 교회이면서도 이웃을 섬기는 교회로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했다. 다음은 교회 측이 소개하는 조용기 목사님의 생애.

조용기
▲이영훈에게 담임목사직을 이어주고 있는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은 1936년 2월 14일 경남 울산 울주군에서 부친 조두천 장로와 모친 김복선 권사의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한학과 전통적인 종교문화에 익숙한 가정에서 자랐다.

어수선한 해방정국이 이어지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부친이 낙선한 뒤로는 가난한 사춘기를 보냈고 곧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부산공고에 입학했으며, 학교에 주둔해 있던 미군부대에서 학교장과 미군 부대장 사이의 통역을 맡으면서 영어 실력을 키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폐결핵으로 사망선고를 받고 병상에서 누나의 친구로부터 처음 복음을 접한 뒤 부산에서 미국 오순절교단인 ‘하나님의성회(Assemblies of God)’ 소속 켄 타이스(Kenneth Tice) 선교사를 만나 집회 통역을 하면서 회심을 하고 폐결핵이 치유되는 신유의 경험을 하면서, 신학교 입학을 결심했다.

1956년 9월, 20세 때 하나님의성회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하여 후에 장모이자 목회 동역자가 되는 최자실 목사와 만났다. 두 사람은 1958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5월 18일 천막 교회를 개척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시작이었다.

그 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면서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위상은 국내를 넘어 세계에 알려졌고, 1973년 9월 제10차 세계 오순절 대회를 한국에서 주최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아시아 국가가 주최한 첫 오순절 세계 대회였다.

여의도로 교회를 옮긴 뒤 성장세는 더욱 가팔라져, 1979년 10만 명, 1981년에 20만 명을 넘어섰다. 특히 1976년에는 세계 교회성장기구 곧 CGI(Church Growth International)를 설립해 세계 교회 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다. 당시 세계에서 성장하는 교회들의 대부분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용기 목사는 1992년부터 2008년까지 세계하나님의성회 총재를 역임하면서 제3세계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이때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에서 대규모 성회를 인도하고 강력한 성령 운동이 전개됐다. 구소련 붕괴 후인 1992년 6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성회를 가졌고, 1997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가진 성회에서는 150만 명이 운집, 두 나라에서 모두 개신교 사상 최대의 집회라는 기록을 세웠다.

조용기
▲은퇴 후 사회봉사를 위해 만든 사랑과행복나눔재단 개소식 모습. ⓒ여의도순복음교회
이렇게 조 목사는 1975년부터 2019년까지 지구를 120바퀴 돌며 71개국에서 영어 일어 프랑스어 등으로 최소 370차례 이상 부흥회를 인도했다. 조 목사는 국내에서 민족복음화 운동에도 헌신하며 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을 다니며 성회를 인도했다.

특히 사회 구원을 위해 1988년에는 일간지 국민일보를 설립해 기독교의 목소리를 우리 사회에 전하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비정부기구(NGO)인 사단법인 선한사람들(현재 굿피플)을 세워 국내 및 해외에서 인권 환경 보건 및 아동복지 등의 증진에 앞장섰다.

이런 공로로 1982년 ‘대통령 표창’(홀트학교 건립기금 및 장애아동 복지사업)을 수상하고, 1994년 대한적십자사부터 ‘적십자 헌혈유공자 금장’, 1996년에는 심장병 어린이 무료시술 지원 및 소년소녀가장 돕기 헌신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보건복지부)’을 받았다.

2005년에 미국 뉴욕기독교교회협의회로부터 ‘더 패밀리 오브 맨 메달리온’을 수상하고, 2007년 미연방의회에서 ‘자랑스런 한국인 인증서’도 받았다. 2009년에는 캄보디아 정부가 주는 훈장을 수상했다.

조용기 목사는 저술가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해 <4차원의 영성> <4차원의 영적 세계> <나의 교회성장 이야기>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성령론> <신유론>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희망목회 45년> 등 수백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특히 <4차원의 영성>은 영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1천 만 권 이상 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