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예언에 깃든 미래 위한 지혜는 무엇인가
인류, 미래의 재난과 고통 완벽한 극복 불가능
세계관과 삶의 태도에 근본적 변화 일어나야
종말과 심판 예고하는 성경의 지혜 힘입어야

미드 호수 가뭄
▲역대 최저 수위를 기록하고 있는 미국 네바다-애리조나 주 경계점의 미드 호수(Lake Mead) 후버 댐 저수지 수위 비교. 뉴노멀을 특징짓는 전인류 차원의 재난 중 기근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NPS
◈종말과 자연환경: 환경위기에 대한 반성과 성경의 종말론

서구의 대중문화 콘텐츠 가운데는 인류 전체의 종말을 소재로 삼는 작품이 흔히 발견된다. 이는 기독교 종말론이 서구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준 까닭에 벌어진 일이다. 이처럼 인류 전체의 종말을 다룬 작품 가운데 대다수는 극소수의 생존자를 남겨둔다.

물론 <디즈 파이널 아워스>(These Final Hours, 2013)와 같이 아예 전체 인류를 한 사람도 남겨두지 않고 멸절시키는 작품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종말을 다룬 작품들은 재난에서 살아남는 극소수의 생존자를 남겨두어, 인류의 존속에 대한 희망을 엿보게 한다.

<나는 전설이다>(2007)는 전 인류가 바이러스로 인해 좀비와 같은 괴물로 변해버린 가운데 극소수의 정상인만을 남겨두고, <설국열차>(2013)는 요나(고아성 분)와 티미(마칸소니 레이스 분) 두 사람만 살아남는다.

<인터스텔라>(2014) 역시 멸망 직전까지 이른 인류에게 중력의 비밀을 알림으로써, 인류가 우주에서 다시 삶을 이어나가는 결말을 보여준다. TV 시리즈 <레이즈드 바이 울브스>(2020)도 인류의 모든 지구자정 노력이 실패한 상황에서 극소수의 인원만 탈출선을 타고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에 자리잡게 된다.

이런 서사는 명백히 창세기의 노아의 방주 서사,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환란에서 구원받은 이들에 관한 예언을 예술적으로 변용한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이 환경의 파괴와 그에 의한 인류의 궤멸적 타격을 염려하고 경계하는 의식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해 왔다는 점이다.

인터스텔라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멸망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하기 위한 지구 탈출 프로젝트에 관한 영화로, 성경의 노아의 방주 서사를 변용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세간에 널리 퍼진 오해 가운데 하나로, 기독교 신앙이 오늘날 서구 세계가 주도한 환경오염과 파괴를 정당화하는 사상적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속설이 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이 자연환경을 무차별적으로 개발하고 착취하는 일에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는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의 진의가 세계의 파괴와 황폐화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 본래적인 모습와 조화를 깨뜨리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상충된다.

인류가 세상을 파괴하고 황폐하게 만든 주 원인은 인간의 죄성과 탐욕이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결탁해 오늘날 지구 환경이 이상 상태에 빠지도록 파괴와 착취 행위를 부추겨 왔다.

반면 기독교 신앙은 종말에 대한 예언을 통해, 인류의 미래 운명에 대해 경종을 울린다. 물론 성경에 예언된 세계의 종말은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로서, 그 이면에 영적인 경륜과 권능이 자리잡고 있다.

다시 말해 인류가 주도하는 파괴 행위와는 차원이 다른 전우주적 심판이 단행되리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런 경고는 인류가 현재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자연환경과 생태의 파괴에 대해 진지하게 돌이켜볼 수 있는 반성의 계기를 마련한다.

현재 가중되고 있는 재해와 기근, 역병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이 혹 인간의 죄성과 교만에 의한 것은 아닌지,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삶의 방식과 태도 전환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신앙과 자연환경: 성경적 자연관에 담긴 환경 변화에 대한 지혜

환경 문제에 관한 반성과 방안 모색을 위해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이들 대부분이 유럽과 미국에서 나오는 이유도 바로 이런 기독교적 문화배경 때문이다.

반면 동양의 자연환경 파괴와 기후변화에 대한 반성 및 대응 수준은 서구에 비해 크게 뒤쳐져 있다. 무엇보다 중국의 경제적, 군사적 활동에 의한 환경오염과 파괴가 심각하다. 여기에는 분명 특별한 사상적, 문화적 배경이 존재한다.

서구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달리, 동양의 자연관은 재난으로 인한 인류 멸망을 상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동양 사상에서 자연은 그 자체로서 완벽하고 조화롭다. 인간은 단지 그에 순응하며 살아가면 될 뿐이다.

인간이 자연 섭리를 내치기 때문에 곤궁함에 처하는 것이지, 자연이 먼저 인간을 내치지 않는다. 동양의 세계관은 이와 같은 확신을 고수한다.

따라서 재해와 역병이 인간을 괴롭힐 때, 동양에서는 자연의 뜻을 내버리고 인위(人爲)와 부자연스러운 욕망에 몸을 내맡겨 살아온 인간들을 우선 탓한다. 자연 자체가 신격을 소유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다분히 범신론적인 세계관이다. 이런 범신론적 세계관으로는 초월적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어렵다. 고통, 허무, 죽음을 절감하지만, 이를 통해 자연 너머까지 내다보지는 못한다.

리틀 포레스트
▲영화 <리틀 포레스트>. 자연의 섭리에 순응해야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 자연 만물 그 자체 안에 초월적이고 신적인 온전함이 깃들어 있다는 동양적 자연관이 반영되어 있다.
이처럼 동양적인 세계관 안에는 자연 만물을 일순간에 무화시킬 권세와 권능을 가진 초월적 신의 존재를 상정할 만한 요소들이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동양 각국의 시가(詩歌)를 살펴보면 이 사실이 분명하게 확인된다. 동양 시가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주제가 산천(山川)의 유구함과 인생의 허망함을 대비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 만물 속에 지고의 존재적 온전함과 영속성이 스며들어 있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자연의 신적 속성에 대한 한없는 신뢰에 더해, 20세기 아시아 각국에는 소비에트 연방에 의한 공산주의 사상의 확산으로 유물론적 세계관까지 유입되었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유물론 사상이 들어오면 자연에 대한 전통적인 동양적 사고를 몰아내고 자연환경을 엄정한 물리적 현실로서 인식하여 인류가 자연환경을 크게 훼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공산주의 사상과 함께 유입된 유물론이 기괴한 방식으로 동양적 자연관과 융합되었다.

자연 만물에 깃든 신격은 부정한다. 하지만 자연 만물 자체가 지닌 온전함에 대한 오래된 확신은 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자연을 그저 인류의 사회주의적 진보를 위한 질료와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사고가 결합되었다.

결국 자연 만물은 인간이 아무리 개발하고 착취해도 완전한 파괴에 이르지 않는다는 무책임한 신념 하에, 무자비한 자연환경 파괴가 이루어졌다. 이는 현재 중국과 북한에서 명백하게 확인되는 상황이다.

중국 대기오염 환경오염 파괴
▲중국의 대도시와 공업지역은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환경오염과 파괴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자연의 종말에 대한 의식이 없는 데다가 자연에 대한 무감정한 유물론적 사고까지 겹치면서 일어난 참상이라 볼 수 있다. ⓒKBS 캡처
물론 이러한 중국의 정치경제 현실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서구 각국 정권 및 기업들과의 긴밀한 연관 역시 고려해야겠지만, 중국이 오늘날 극심한 지구 환경 파괴의 주범이 되는데 중국인들의 자발적 선택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최근 우리가 ‘뉴노멀’이라고 부르는 상황은 결국 인류가 이전에 절감하지 못했던 재해와 고난을 감내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을 말한다.

인류의 삶에 환경파괴와 기후변화, 그리고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괴질로 인한 고통이 더해진 주 원인은 물론 인간이 섭리를 거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섭리는 자연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만물 너머에 존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안에 포함되어 있다.

현재 상황으로 봐서, 인류가 향후 겪어야 할 각종 재난과 고통을 완벽하게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그 어려움을 경감시키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면 세계관과 삶의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진정성 있는 환경보호, 생태보호 실천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뉴노멀’을 향한 반성과 변화 노력이 입증하듯, 이런 유익한 변화는 인류 스스로의 힘에만 의존해서는 일어날 수 없고, 종말과 심판을 예고하는 성경의 지혜를 힘입어야만 가능할 것으로 사료된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