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교회
ⓒUnsplash/Vitolda Klein

30년 전 8월, 소련 붕괴의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이 시작됐다. 교회는 철의 장막 뒤에서 어떻게 살아남았고, 소련이 해체된 후에는 어떠한 어려움을 겪었는가?

영국 오픈도어선교회는 최근 ‘소련 안의 교회, 수족관의 물고기처럼 감시받아’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소련의 박해 속에 성장해 온 교회들의 역사를 소개했다. 다음은 그 주요 내용.

비밀경찰, 정보원, 간첩들이 도처에 있었다. 올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자란 그녀는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을 알게 됐고, 그 결과 소수만이 살아서 돌아오던 소련의 노동수용소 굴라크에서 지내게 됐다. 그녀의 지역교회에서 온 집사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마을로 보내졌다. 올가의 친아버지는 시베리아에 있는 양심수였다.

올가는 기독교 박해감시단체인 오픈도어선교회와 인터뷰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항상 박해와 긴장을 느꼈다”며 소련 해체 직후인 1991년 당시를 회상했다.

그녀는 “수족관의 물고기가 된 것 같았다. 행동하거나 말 등 모든 것이 감시되었고, 심지어 아파트에서도 도청당할 수 있었다. 아무 곳에서도 자유로움을 느낄 수 없었고, KGB(구소련의 정보기관)의 뜨거운 숨결을 계속 느꼈다. 어느 순간 우리의 아파트가 도청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고 전했다.

많은 문화와 언어를 가진 15개국 연방에서는 하나의 ‘통합’ 교리를 강요했다. 70년 동안 무신론 마르크스주의는 사람들의 지적·정신적 삶을 흐려놓는 공식적 이념이었다.

그녀는 “우리는 공산주의 이념의 적인 2류 민족이었기 때문에 사회와 국가의 원수가 되었다. 국가의 원수들이여! 2류 시민일 때 당신에게는 많은 일이 발생한다.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교회들은 조용한 생활을 계속하지만, 봉사 활동은 금지됐고 거의 불가능했다”고 했다.

또 “국가 통제하에 있던 관영교회 지도부의 입장은,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타협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국의 주요 목표였던 복음주의 교회들은 지하로 가는 것을 선호했다”고 말했다.

지하교회 기독교인들의 두려움은 때로 압도적이었다. 올가는 “우리는 누구를 믿을 수 있을지 전혀 몰랐다. KGB가 분열과 불신을 심어주었다. 비록 친형제와 자매라도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요즘도 박해가 있는 나라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똑같은 두려움과 불신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벌금, 괴롭힘, 차별, 투옥 등이 모두 박해의 구성 요소였다. 1960년대 초 니키타 흐루시초프 치하에서는 당국이 기독교 부모들에게서 아이들을 떼어내 고아원에 보낼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었다.

기독교 신앙은 한 사람의 경력에 심각하게 방해가 됐다. 대학 입학은 거의 불가능했고, 정치나 정부 기관에 관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올가는 “이러한 일들은 소련 시절 기독교인으로서 대응해야 했던 조치의 일부”라고 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당수가 된 지 2년 후, 그는 여전히 억류돼 있는 양심수들과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1987년 6월 18일 소련 정부는 사면령을 발표했다. 올가의 아버지 이름이 명단에 있었고, 그는 4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1991년 12얼 소련이 마지막으로 해체되면서 기독교 박해의 물결은 멈췄다. 표현의 자유와 신념의 도입은 구소련 이후 강한 무신론 사회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올가는 1990년대 초를 묘사하며 “일부 전통교회에서 예배의 방식이 바뀌었고, 많은 새로운 교회들이 형성됐다”고 했다. 개신교 교단의 수가 급증한 것이다.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자유롭게 설교하고 믿었지만, 교회는 곧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민족주의와 종교의 혼합이 그것 중 하나였다. 이것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 특히 사실이다. 소련 붕괴 이후 70년간 무신론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은 그곳에서 국가 정체성의 일부로 여겨졌다. 기독교로 개종하기 위해 그곳을 떠난 이들은 배신자로 여겨졌다.

소련 시절처럼, 포스트 소련 국가의 정교회는 정부를 지원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중앙아시아 오픈도어선교회 국제 관계 책임자인 윌리엄 홀랜더는 “정교회는 항상 정부의 편에 서 왔다. 교회가 정부에 반대하는 것으로 비치는 순간 위험 지대로 이동하게 된다”고 했다.

그는 “소련 시절과 같이 이 문제는 러시아와 벨라루스를 포함, 소련 이후 많은 나라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 문제는 주로 복음주의 교회들과 개신교 교회들에 존재한다. 이들은 점점 더 안전하지 않고, 러시아는 이들이 국제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도록 심각한 견제와 제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올가는 그러나 “공산주의가 역사에 편입되면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도전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더 이상 끊임없이 감시를 받지 않게 된 안도감에 나와 가족들은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음을 느꼈다”고 했다.

그녀는 “우리가 수족관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우리는 바다에서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믿을 수 없는 해방감을 갖고 있었다. 복음을 전할 자유가 있었고, 아무도 우리를 막을 수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