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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드리는 밀레니얼 세대 기독교인들. ⓒChristian Concern/Wilberforce Academy

미국의 작가이자 센트럴 코스트 오브 캘리포니아의 연설가인 다니엘 햄린(Daniel Hamlin)이 최근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에 ‘예배에 대해 가지고 있던 3가지 오해’(3 misconceptions I had about worship)라는 제목을 칼럼을 게재했다. 다음은 그 주요 내용이다.

나는 어머니가 웃음을 참는 모습을 보았다. 한 번쯤은 우리 안의 모든 것이 웃음을 원할 때, 그것을 참아야 하는 극도의 어려움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보통은 가장 부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발생한다. 내 어머니가 그랬다.

주일 아침 우리는 교회에 앉아 있었고, 찬양팀은 무대에 서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으려고 내 옆에 서 있었다. 나는 내가 모르는 무엇이 어머니를 즐겁게 했는지 알고 싶어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이어 정신을 차리고 계속 노래를 불렀다. 예배가 끝난 후, 어머니께 예배 중에 무엇 때문에 웃었는지 물었다.

어머니는 “너”라고 말했고, 난 놀라서 대답했다. “제가요? 제가 뭘 어쨌는데요?”

그녀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다니엘, 노래의 모든 음을 놓친 사람을 전에는 본 적이 없어.”

다니엘 햄린
▲다니엘 햄린.

음악적 재능이 부족했던 내게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지지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서로 기분 상하지 않을 수 있는 좋은 관계성을 유지했다는 사실도 말해야겠다.

다행스럽게도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노래를 얼마나 잘 부르느냐로 우리 예배를 받아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예배는 노래 그 이상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들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고 말씀하셨다.

세월이 흐르고 진정으로 주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몇 가지 중대한 오해들을 없앨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됐다. 그것은 점진적인 과정이었다. 대부분 기도와 그분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예배라는 주제에 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 자신의 여정을 공유하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첫 번째 오해: 예배는 종교인만을 위한 것이다.

나는 가끔씩 종교적인 사람이나 신앙적인 사람만이 예배에 참여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예배를 오로지 종교적 또는 영적인 행위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제 깨달았든 못 깨달았든 모두가 예배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숭배하거나 누군가를 숭배한다. 우리는 그렇게 창조되었다(시 86:9-10).

인간은 삶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두는 것은 무엇이든 숭배한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의 왕좌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가 숭배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이것은 직업, 사랑하는 사람, 물리적 사물, 자아일 수 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숭배는 종교나 신앙과는 무관할지 몰라도 여전히 숭배로 남아 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그것들을 더 소중히 여길 때, 우리는 그들을 숭배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난 인생에서 많은 것을 숭배했다. 나 자신, 열정, 시간, 인간관계, 그 자체로 나쁘지 않은 것들을 숭배해 왔다. 한 사람의 신은 그의 삶을 지배하는 주된 열정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주된 열정이 무엇이든지 우리의 신이고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다.

나는 종종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예배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예배하는 나 자신에 집중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께서는 내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신다.

내 인생에서 그리스도의 정당한 자리를 다른 무엇으로 대체한 것을 뉘우치는 겸손함으로 그분께 내 마음의 왕좌를 내어드리고자 요청하면, 그분은 친절하게 나를 받아주시고 더 깊은 관계로 초대해주신다.

두 번째 오해: 오직 종교적인 활동만이 예배다.

예배는 단순히 교회, 기도, 추수감사절 때 부르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는 모두 예배의 형태이지만, 그것들만이 예배의 형태는 아니다. 예배에 대한 나의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어떤 종교활동을 할 때만 예배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 모두가 무엇이든, 또는 누군가든 내 마음의 왕좌에 앉히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의 행위이다(롬 12:1, 고전 10:31).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반영한다.

사울 왕은 종교 활동이 예배와 같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는 마음에서 시작되어 일상 생활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활동은 한 사람의 예배를 위한 바로미터가 아니”라고 지적하심으로써 응답하셨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나에게는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대한 더 큰 인식으로 이어졌다. 진정한 예배는 규칙들에 순종하는 척하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반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밥을 먹든, 일을 하든, 공부를 하든, 방학이든, 빨래를 하든, 무엇을 하고 있든, 우리가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경배를 드리고 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 속에서 가장 가치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거나, 아니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우리는 살아간다.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예배를 받는다.

세 번째 오해: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아마도 예배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그것이 어떻게든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마치 하나님이 어떻게든 우리의 예배를 필요로 하신 것처럼.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아닌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다윗은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 31:19-24)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시지만, 그분에게는 이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분은 스스로 계시고, 영원하시며 창조되지 않았다. 그분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지만, 모든 생명과 모든 기쁨의 근원이시다(시 16:11).

그분은 우리가 당신을 알고 생명과 기쁨을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다. 예배는 생명으로 들어가는 통로요, 기쁨은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경배할 때, 우리는 주님이 의도하시는 유일함, 생명의 궁극적인 만족이 기다리고 있는 유일함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평화를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우리가 예배할 때, 우리는 주님의 평화와 복의 문을 열어준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하나님은 고난의 날에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피난처가 되시겠다고 약속하신다(나훔 1:7).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소중히 여기신다. 그분은 인간인 우리가 볼 수 없는 대상을 경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히 4:15). 그래서 우리의 경배가 하나님을 깊이 감동시키는 것일 수 있다. 아직 예배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알지만, 주께서 내가 가진 이러한 오해들을 바로잡아 주셔서 감사하다. 그 덕분에 그분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아니 어쩌면 천국에서 진심 어린 예배로 찬양할 때, 나는 정확한 음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나의 가창력에 상관없이 내 예배를 사랑해주신다는 걸 알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