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크리스천투데이 DB
지난 4월 경기도 평택항에서 조립식 컨테이너 벽에 깔려 숨진 故 이선호 군 유가족이 컨테이너 유지관리업체를 최근 검찰에 고발했다.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대표 김영한 박사, 이하 샬롬나비)는 23일 논평을 통해 정부는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한 산업 현장에 대한 철저한 감독을 시행하고, 기업은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해 근로기준법을 엄격하게 준수하라고 촉구했다.

샬롬나비는 논평에서 “정부와 많은 사회단체들이 노동자 안전보호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산업발전 및 경제발전이라는 명목 하에서 대한민국의 노동자는 여전히 안전을 보장받기 힘든 상황”이라며 노동자 안전보호를 위한 정부와 기업의 노력을 당부했다.

특히 샬롬나비는 △노동자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업문화 △정부는 산업재해방지를 위한 철저한 감독 체계와 산업재해노동자의 트라우마와 생활을 보장하는 국가정책을 강화할 것 △산업재해노동자의 트라우마 치료와 생활을 보장하는 정책을 강화할 것 △한국교회는 고통당하는 노동자 및 산업재해 피해자에 대한 관심을 높일 것 등을 주문했다. 다음은 논평 전문.

정부는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한 산업 현장에 대한 철저한 감독을 시행해야 한다.
기업은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해 근로기준법을 엄격하게 준수해야 한다.

꽃다운 23세 대학생 (故)이선호 군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4달이 지난다. 그는 4월 22일 오후 용역회사 지시에 따라 평택항 내 컨테이너 이물질 청소작업 중, 약 300㎏의 개방형 컨테이너(FRC)에 깔리는 사고를 당해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였다. 5월 7일 한겨례신문에 따르면, 이미 2020년까지 원청업체 동방에서 일어난 안전사고재해가 14건이었고, 이전 10년 동안 5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으며, 이번 사고의 컨테이너 역시 부실한 관리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안전검사에서 ‘정상’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많은 단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의 원청업체 동방 측은 안전 조치 계획 및 유사사고 방지를 위한 대책도 없이 작업을 재개하려 시도했다고 한다. 정부와 많은 사회단체들이 노동자 안전보호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산업발전 및 경제발전이라는 명목 하에서 대한민국의 노동자는 여전히 안전을 보장받기 힘든 상황이다. 이에 샬롬나비는 다음과 같은 ‘노동자 안전보호’를 위한 다음 기본적 사항들을 촉구한다.

1. 모든 노동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소중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고용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측과 노측은 결코 절대적 상하관계가 아니다. 고용자는 피고용자를 통해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으며, 피고용자는 고용자가 제공한 노동의 기회를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재정을 얻는다. 피고용자가 없이는 고용자는 자신의 사업을 유지할 수 없으며, 고용자가 없이는 피고용자의 삶은 힘들어진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회 일부에서는 돈 있는 사란들, 힘 있는 사람들이, 천박한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를 가지고, 마치 높은 계급으로 태어나 마음껏 다른 이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또 다른 일부에서는 지나친 시장경제에 대한 반감을 가진 일부 극단적 진보세력이 자본을 가지고 경제를 운영하는 사람들에 대한 원한과 복수를 획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각각 소중한 존재이며, 동시에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나약한 존재이다. 이것은 고용인이 되었든 피고용인이 되었든 마찬가지이며, 모든 노동자 고용의 상황은 바로 이 원칙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2. 근로기준법을 준수하여 노동자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업문화가 필요하다.

노동자의 안전은 특별한 논의가 아니며, 이미 근로기준법은 산업재해 및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다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제76조는 노동자의 안전과 보건에 관련된 사항이다. 안전과 보건과 관련하여 이 조항은 안전과 보건교육을 제안한다. 노동자는 처음 산업현장에 들어갔을 때, 어떤 것이 위험한 지 제대로 알지 못하며, 그런 한에서 기업은 근로자의 교육을 분명히 시행해야 한다고 근로기준법 제76조는 정하고 있다. 또한, 산업현장을 운영하는 고용자는 자신에게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하여 미리 산업현장의 위험을 방지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 산업재해를 예방하는 근로기준법 제76조를 지킴으로써 단순히 안전과 보건을 넘어 기업의 이미지를 재고할 수 있게 된다.

이 외에도 제7조 강제근로를 금지하는 조항, 제8조 노동자 폭행을 금지하는 조항, 제23조 부당해고에 대한 금지조항, 제43조 임금지급 체불금지 조항, 제50조 근로시간 및 휴식시간, 제54조 휴게, 제55조 휴일 등을 통해 산업재해를 방지하는 조항, 제69조 미성년자의 노동시간 제한 조항 등은 인간적으로 당연한 지켜야 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노동자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가장 기초적 요소이기도 하다.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지켜질 때, 고용자와 피고용자 모두가 떳떳하고 안전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기업문화는 고용자와 노동자 모두의 의무이면서 동시에 권리이다.

3. 정부는 산업재해방지를 위한 철저한 감독 체계와 산업재해노동자의 트라우마와 생활을 보장하는 국가정책을 강화하여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은 OECD 34개 국가 중 국내총생산(GDP) 10위권인 일명 산업대국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과 다르게 산업 현장에서 발생한 산재사망률은 2008년 통계상 근로자 10만 명당 18명으로 미국 3.7명, 일본 2.7명, 아일랜드 2.5명, 독일 2.1명보다 월등히 높아 OECD 국가 중 최악의 ‘산업재해왕국’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현재 발생하는 이러한 산업재해는 인위재해, 즉 일종의 시설관리 부주의로 발생하는 것으로 예전의 노동자 부주의로 발생하는 산업재해와는 다르다. 현재 발생하는 산업재해의 부주의의 책임은 자동화시스템에 의존하게 되는 현대에 이르러 4개의 기본원인(4-M)을 소유한다. 사람(Man), 설비(Machine), 작업(Media), 관리(Management)라는 4가지 구분(유재환 외, 『안전관리』 (서울: 동화기술, 2011, 152)을 통해 볼 때, 이제 더 이상 산업재해는 노동자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거의 대부분의 산업재해는 설비, 작업, 관리라는 자동화시스템을 통해 충분히 방지할 수 있는 사항이며, 이는 ‘노동자 안전보호’가 더 이상 개인의 차원에 머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산업재해는 사회전체의 책임이며, 노동자 안전보호에 대한 정책 마련 및 점검은 전적으로 국가의 의무에 해당한다. 더 이상 개인의 능력으로 바꿀 수 없는 사항이 된 산업재해의 원인은 이념과 상관없이 정부가 보다 강한 통제력을 발휘하여 기본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기업은 당연히 이윤을 내기 위해 노동자 안전보호 사항을 최소한으로 줄이려한다. 그러나 이것은 장기간에 걸쳐 볼 때 결코 기업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개별 기업 및 전체 국가의 대외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보다 적극적으로 산업재해에 대한 정책 및 점검이 시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는 기업이 안전시설을 확충하기 위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재정지원제도를 별도로 마련해야 한다.

4. 정부는 산업재해노동자의 트라우마 치료와 생활을 보장하는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

나아가 국가는 보다 강화된 산업재해노동자들을 위한 구호책을 마련하여야 한다. 산업재해를 경험한 노동자들은 몸과 마음의 상실을 통해 남은 인생에 걸쳐 큰 위기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몸의 일부가 절단되거나 마음에 트라우마를 입게 된 노동자는 더 이상 산업현장에 나가지 못한다. 그는 고스란히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떠안고 주변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때론 주변인들에게 고통을 전가하며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정의 보상금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산업재해를 통한 트라우마는 많은 상담 및 치료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으며, 이러한 트라우마 치료와 더불어 안정적 재정지원이 있을 때 산업재해노동자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생산적 노동에 다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국가는 산업재해 자체가 사회 전체의 책임이며, 국가전체의 책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다 상처받고 쓰러진 이들을 국가가 보호해주고 치료해주지 않는다면, 국가는 존재할 이유를 상실한다. 국가는 보다 강한 책임감으로 산업재해의 사건들을 조사하고 점검함과 동시에 산업재해피해자들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5. 한국교회는 고통당하는 노동자 및 산업재해 피해자에 대한 관심을 높여야 한다.

마태복음 25장 34-46절은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 즉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시게 하며, 나그네 된 자를 영접하고, 벗은 자에게 옷을 입혀주고, 병든 자를 돌보아주며, 옥에 갇힌 자를 가서 보는 것을 곧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이러한 말씀에 의지하여 노동의 현장에서, 그리고 산업재해의 사건 안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교회는 노동, 노동자, 노동운동이라는 단어에 대한 불편함을 떨쳐버리고 그들이 울부짖는 현장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지금까지 보수적인 교회는 공산주의와의 이념적 대립 때문에 노동이라는 단어를 불편하게 생각해왔고, 노동운동의 현장으로부터 나타날 수 있는 폭력에 주눅들어왔다. 이와 정반대로 진보적 교회는 지나치게 노동의 현장에만 매몰되어 정치적 활동에 치우쳐왔던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이제 교회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 하신 성경말씀을 따라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직접 다가가 그들과 함께 동행해야 한다. 노동의 현장에서 고통당한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당한 억울함이 있다면 그것을 듣고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외면과 폭력이라는 극단적 태도를 내려놓고, 그저 그들의 고통을 들어주고 그들 곁에 머물기를 시작할 때, 노동자와 산업재해피해자의 고통은 극복되기 시작할 것이다.

또한, 교회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산업재해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동행해야 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며, 그분은 본체부터 공동체적인 분이시다. 그분의 모든 활동이 공동체적이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건설을 말씀하셨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뜻을 연결하는 사랑의 띠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동시에 이 공동체 안에 산업재해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특별히 인간이 고통의 상황 속에서 필요한 것은 공동체의 위로와 동행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위로와 동행 안에서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할 수 있으며, 자신들의 고통의 짐을 덜어낼 수 있다.

6.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주님의 삶의 본받아 산업재해를 만난 분들과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분이 사셨던 삶을 따라 살며, 또한 그분이 죽으셨던 십자가를 따라서 져야 한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해,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고 죽으시지 않으셨고, 전적으로 고통당하고 아픔을 당하는 이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는 삶과 죽음을 행하셨다.

한국교회는 다양한 이념논쟁 안에서 여전히 ‘노동’이라는 단어에 불편해 하며, 그럼으로써 여전히 고통당하는 노동자와 산업재해 피해자들에게 다가가기를 꺼려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교회에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노동자의 아픔을 배척하라는 것도, 또한 그렇다고 구시대의 노동운동에 무조건 동참하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자기를 비우고 오셔서 자신을 내어주는 삶과 죽음을 행하셨듯이, 구원받은 우리로 하여금 고통당하고 아픔을 당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삶과 죽음을 행하라 명령하실 뿐이다.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절대적 현실로 이루어질 다음의 말씀을 두려워해야한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5장 45-46절)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모든 고통과 폭력을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대신 짊어지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이처럼 모든 이들의 고통과 폭력을 종결시키기 위해 그들과 함께 동행 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고통과 폭력을 나누어짊어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도, 또한 그리스도교회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웃을 사랑하는 자이며 특히 지극히 작은 소자에 공감하고 이들과 소통하며 이웃이 되는 자이다.

2021년 8월 22일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