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행 16:31)”는 말씀은 ‘율법이나 심판’ 같은 개념이 하나도 없는, 순도 100%의 ‘복음’처럼 들리나, 사실 그 이면엔 엄중한 ‘율법’이 감춰져 있다. 이는 달리 그런 것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말 자체가 가진 함의성 때문이다.

풀어 설명하면,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행 16:31)”는 말은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니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자기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 얻겠다’는 마음도 ‘예수믿겠다’는 마음도 가질 수 없다.

‘복음’은 ‘율법을 거친(through law) 구원에의 부르심(calling to salvation, 召命)’이다. 율법을 거치지(through law) 않고 ‘구원에의 부르심’을 받을 수 없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간다는 말은 율법의 정죄를 받은 후 그에게로 간다는 말이다.‘율법의 몽학선생 역할(갈 3:24)’이 그것이다.

이와 반대로, ‘율법 안에도 복음’이 숨겨져 있다. 이 말을 하면 당황해 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나, 사실이다. 왜냐하면 율법도 “법과 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인하여 살리라(겔 33:19, 레 18:5, 롬 10:5)”며, ‘구원’ 곧 ‘복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대개 율법에 대한 사람들의 개념이 부정 일색(否定 一色)이지만, 율법 어디에도 표면적으로 ‘그것(율법)을 따라가면 망한다’, ‘그것(율법)의 목적이 정죄다’라고 하는 곳이 없다(물론 결과론적으론 율법을 좇으면 심판을 받지만). ‘복음’이든 ‘율법’이든, 표면적으로 그것들이 지향하는 바는 ‘구원’이다.

그러나 ‘율법을 행하면 살리라’는 말은 그것의 여자적(literal, 如字的) 의미대로, 정말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표면상(表面上)으론 그렇게 말하지만, 그 이면(裏面)엔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율법의 정죄’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는 아무도 ‘구원받을 만큼 완전하게 행할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그것을 통해 자신들에게서 ‘율법 준수의 가능성’을 보도록 하려는 것이 아닌, 이면(裏面)의 ‘그것의 불가능성’을 보고 절망하여 구원자 그리스도께로 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율법과 선지자’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눅 24:44), 그를 기록하고(요 1:45), 그를 가리켰다(눅 24:44)’고 한 말도 율법의 최종 목적이 그리스도임을 말해준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율법을 낭독한 후 율법책과 백성들에게 피를 뿌린 것(히 9:19)도 같은 맥락이며,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먼저 율법을 어긴 자는 피를 흘려 죽게 된다는 는 ‘사망의 언약(롬 6:23)’이고, 동시에 율법을 어겨 죽어야 할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를 뿌려 구원시킨다는 ‘생명의 언약(요 6:54)’이다.

◈율법과 복음에 대한 유추적 지식

지금까지 논의를 통해 “왜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율법과 복음’을 이해시킬 때, 직설법이 아닌 ‘표면적 의미’에서 ‘이면적 의미’를 찾는 ‘유추적 해석 방법(analogical inference method)’을 사용하게 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가능한 유식한(?)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여자적 해독자(literal decoder, 如字的 解讀者), 곧 유추적 해석이 불가능한 무식한(?)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이는 ‘복음이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에겐 감춰지고 어리석은 자들에게만 알려진다’는 기독교의 대 전제, 곧 ‘어리석은 기독교(the foolish Christianity, 칼빈이 즐겨 사용했음)’도 부정된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모르는데서 나온 추정이다.

역설적이게도 ‘율법과 복음’에 대한 유추(analogy, 類推)는 오히려 그것을 잘 할 법한 ‘세상의 지혜자들’에겐 허락되지 않고, 그것을 못할 법한 ‘세상의 미련한 자들’에게 허락됐다. 이는 그것이 ‘인간 지성의 산물’이 아닌, ‘성령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실례(實例)로 ‘유추’를 잘 할 법한 유식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여자적(如字的) 해석’에만 의존시켰고, 그 결과 구원을 받지 못했다. 예수님이 그들을 소경(마 23:26)이고, 무식하다(벧후 3:16)고 한 것도 ‘유추적 지식의 결핍’을 말한 것이다. 이는 그것이 오직 성령으로만 알려지고 그들의 종교적 지혜로 알 수 없었기(고전 1:20-21)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유추적 지식(the analogical knowledge, 類推的 知識)’을 택자와 불택자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삼았다. 아무리 유식한 자라도 그것을 허락받지 못한 불택자는 결코 그 지식을 알 수 없게 하셨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9-10)”.

예수님이 ‘천국의 진리’를 말씀하시면서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것이 ‘사람의 지혜’와 무관함을 말한 것이다.

그가 그것(천국의 진리)을 ‘비유(類推的 知識)가 아니면 말하지 아니한 것’도, 그것을 ‘택자와 불택자’를 구분 짓는 분기점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곧 택자만 비유(類推的 知識)로 그것을 깨달아 구원받게 한 것이다.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눅 8:9)” .

이처럼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택자 만 ‘율법과 복음’에 대한 유추력(類推力)으로 ‘율법에서 복음’ 혹은 ‘복음에서 율법’을 듣는다.

예컨대, 그들은 ‘행하면 살리라’는 율법을 읽을 때 ‘성령의 유추(類推)’로 자기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대신, 오히려 정죄를 받고 구원자(그리스도)에게로 눈을 돌린다. 아브라함, 다윗을 위시해서 구약의 성도들이 다 그렇게 율법을 유추했다.

신약 성도들이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복음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복음 안에 감춰진 ‘율법의 정죄’도 함께 듣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눈을 돌린다. 만일 복음에서 ‘율법의 정죄’를 듣지 못했다면, ‘그에 대한 믿음’도 가질 수 없다.

죄인이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복음을 들을 때, ‘성령의 유추’로 ‘너는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죄인인데, 그를 믿으면 심판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음성을 듣고 믿게 된다. 불택자가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것은 복음 안에서 ‘성령의 유추’를 허락받지 못한 때문이다.

그들에겐 ‘예수 믿고 구원 얻는다’는 복음이 ‘예수 믿는 종교를 하나 가져보라’는 일종의 ‘종교적 포교’로만 들릴 뿐이다.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 구원은 없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 교수가 말한 대로, ‘먼저 파괴’하고 ‘그 다음에 건설’이다.

이 점에서 복음은 ‘파괴’와 ‘건설’을 다 함의한다. ‘복음 안에 있는 율법’으로 먼저 정죄받고,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함을 받는다. 율법 역시 ‘파괴’와 ‘건설’ 둘 다를 함의한다. 택자는 ‘율법의 파괴’ 속에서 ‘복음의 건설’을 본다.

이처럼 모든 택자는 성령의 가르침 속에서 ‘율법 안에서 복음’을, ‘복음 안에서 율법’을 유추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