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동생의 비극 슬퍼하는 대신 즐거워해
거짓된 평화 감염된 개신교 목회자, 답할 차례
태국, 미얀마 군부 쿠데타 유엔 규탄결의 기권
동성결혼 이미 허용, 서구 능가하는 젠더 제국

랑종
▲영화 <랑종> 포스터.

5년 전 ‘기독교에 살(煞)을 날린 영화, 곡성’이라는 제목의 영화 <곡성> 리뷰로 엄청난 화제를 모았던 이영진 교수님(호서대 평생교육원 신학 주임)께서 <곡성>의 나홍진 감독이 프로듀싱한 태국 영화 <랑종>을 보고 영화평을 남겨 주셨습니다. -편집자 주

영화 <곡성>으로 흥행에 성공했던 나홍진 감독이 새 영화를 들고 돌아왔다(감독을 따로 세웠지만 분명 그의 영화다).

2016년 ‘곡성’ 이후 5년 만의 신작이다. <곡성>도 종교적 테마였고, 이번 작품 역시 주된 테마는 종교다.

5년 전 필자가 <곡성>에 관한 기호와 해석을 가하였을 때, 아마 이런 말로 시작하였을 것이다.

“종교를 포함하는 사회인류학의 위대한 역작 The Golden Bough(황금가지)를 남긴 제임스 프레이저(James G. Frazer)에 따르면, 주술의 원리는 세 가지이다. 유사법칙(Law of Similarity), 접촉법칙(Law of Contact), 감염법칙(Law of Contagion). 이들 세 가지 중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원리는 ‘that like produces like’, 즉 ‘유사는 유사를 산출한다’는 법칙이다.”

당시 <곡성>에 대한 기호와 해석이 유사법칙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랑종>이라는 이 영화에서는 ‘감염법칙’에 초점을 맞춰보려 한다.

프레이저가 말했듯이 이러한 주술의 원리, 특히 감염법칙은 원시 미개인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전 세계 모든 민족이 구가하는 현대적인 지식에서조차 낯익은 원리이기 때문이다.

영화 <곡성> 이후에도 이 사회가 주술로부터 멀어지거나 별로 개선된 바 없다는 뜻이다. 프레이저는 이 감염의 원리를 이렇게 정의했다.

“… 관념의 오인에서 떠오르는 연상, 그것의 물리적 기호는 동종요법 주술에서 구현되는 물리적 기초처럼 일종의 물질적 매개이며, 현대 물리학의 매질(媒質)인 에테르처럼 먼 곳에 위치한 사물과 이어주고 하나의 사물에서 다른 한 사물로 어떤 인상을 전달해주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전염성 주술의 가장 근사한 예시는 한 사람과 그 인격의 모종의 단절된 부분—이를테면 머리카락이라든지 손톱이라든지—사이에서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주술적 ‘공감’이다.” (Frazer, J. G., The Golden Bough, 38)

이런 주술적 원리는 현대 우리 사회에서도 빈 공간에서 사물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이고 영향을 끼치는지, 과학의 이름으로 지속되어 왔다. 가령 사람이 가득한 지하철역이나 대형마트에서는 악한 기운이 없지만, 텅 빈 교회 예배당에는 세균이 넘쳐난다는 망상도 이런 감염 주술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네 가지 감염법칙 안에서 다음 네 가지 기호를 구성한다.

랑종
▲영화 <랑종>의 무당 님(싸와니 우툼마). 악귀를 쫓기 위해 주술적 의식을 행하는 장면.

1. 제1의 전염법칙, 유전: 소쿠리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

랑종은 ‘영매’란 뜻의 태국 말이다. 영화에서는 여주인공 또는 그 가계에 흐르는 소명을 일컫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이 소명은 가족 중 누군가 이어받게 되어 있다.

이 소명을 수위(守衛)하지 않으면 불행이 일어난다는 암시가 그 가계를 지배한다. 그뿐 아니라 그 수위권을 회피하면 반드시 가족 중 다른 누군가에게 옮겨간다. 전염되는 것이다.

기독교계에 한 때 ‘가계의 흐르는 저주’라는 주제가 성행한 일이 있다. 메릴린 히키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1997)로 집약된 이상한 가르침이 국내에도 상륙해 한 목회자에 의해 조직화가 시도되었다.

이런 감염의 법칙은 사실 그 어떤 긍정적인 회심을 자극한다 하더라도, 복음보다는 저주라는 잔상만을 남긴다. 전혀 복되지도 기쁘지도 않은 소식이다. 그래서인지 해당 목회자는 이런 비 복음적 콘텐츠를 철회하고 스스로 폐기한 바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감염의 법칙, 즉 유전적 요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신심이 돈독한 어머니가 어린 3형제는 굶겼을지언정 심방 목회자를 극진히 대접해 마침내는 아들 3형제가 모두 대형교회 목회자가 되었다는 성공 신화는 유전적 요인이 감싸고 도는 회고담이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 예배 예전을 욕설 패러디로 물들인 유명세로 국회의원 공천까지 받은 바 있는 김용민 씨의 사적(事績)도, 불교 가문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종의 유전법칙이다.

우리 사회의 이런 종교의 유전학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서 총아는 기독교의 불교화에 이바지한 도올 김용옥 교수일 것이다. 이슬람 국가나 태국의 불교 가문에서는 결코 이룩할 수 없는 유전적 성과이기 때문이다. 이 유전의 혼재 속에서 무엇은 미신이고, 무엇은 고등 종교이며, 그리고 무엇은 과학일까?

필자는 영화 <랑종>에 등장하는 랑종 ‘님’(Nim)을 보면서, 한 무녀가 떠올랐다. 옛날에는 기독교 가문이 아닌 이상은 대다수 장례식이 무속의 굿과 혼재되는 우상숭배 문화였다. 유교 같지만 불교 같고, 불교 같지만 굿으로 마치는 것이 그 시절 장례 문화였다.

필자의 유년 시절 돌아가신 모친상(喪)도 그러했다. 비록 기독교 문화는 알지 못했지만, 일곱 살 짜리가 보기에도 역하기만 한 절차와 의식들이었다.

굿이 끝난 후 일곱 살 소년은 우연히 그 무서운 무녀 노파와 한 방에서 단둘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 할머니는 소쿠리에 쌓인 그 날 번 돈을 세고 있었다.

무서운 마음에 달아날까 주저하고 있는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머니는 주저 없이 자기 소쿠리에 쌓인 지폐 한 움큼을 가지런히 펴서 건네주었다.

당시에는 두려운 마음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얼어붙고 말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소쿠리 속의 복채를 건네준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마도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아이를 동정한 선심이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 할머니는 잔상으로 남아 있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목회자가 된 후에도 그 할머니의 선심은 잊히지 않는다. 자신의 소쿠리에 쌓인 자기 것을 선뜻 나눠 주는 목회자를 만나기 쉽지 않은 시절일수록, 그 잔상은 더욱 선명하다.

대다수의 목회자는 하나님 소쿠리에서 빼내 자기 것처럼 선심 쓰는데 그치기 때문이다. 상기한 일련의 유전법칙은 이성의 종교와 과학에도 전염되는 제1의 감염법칙이다.

랑종
▲영화 <랑종>이 보여주는 귀신들림에 대한 이해는 결국 무속의 관점에서 기독교적 영적 이해를 비트는 접근 방식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된다.

2. 제2의 전염법칙, 운수: 달걀
운수에 지배받는 자체가 ‘귀신들림’

이 영화에서 전염의 법칙은 언니가 회피한 소명이 동생에게 옮아가 들러붙고, 그래서 그 동생은 언니를 대신해 랑종이 되고, 세월이 흘러 그 회피의 결과는 자신의 딸에게 불행으로 앙갚음이 되더라는 법칙이 주를 이룬다. 전형적인 유전의 법칙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하나 같이 그 감염이 “하필이면 왜 나에게?”라는 절망에 휩싸인다. 유전의 법칙으로도 해명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제2의 법칙을 낳았다. 행운과 불운, 곧 운수의 전염법칙이다. 좋은 일 혹은 나쁜 일은 어떤 준거로 누구에게 일어나는가?

인간에게 좋은 일은 두 종류로 임한다. 행복과 행운. 일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특별히 구별하지 않지만, 양자는 명확히 다르다.

행복은 어느 정도 규칙성이 있어 (웃으면 복이 와요 식의) 보장된 약정이지만, 행운은 불규칙하다. 이 행운의 반대인 불운을 ‘디스티키아시스’(διστίχιασις)라 부른다.

디스티키아시스는 속눈썹이 비정삭적으로 증가하거나 윗눈썹(혹은 아랫눈썹)이 비정상적으로 말려 들어가 안구를 자극하여 각막 손상을 일으키는 질병의 이름이기도 하다. 선천적인 결함이다.

다시 말해 규칙성 있는 행복과 달리 행운은 불규칙적(선천적)이라는 점에서, 디스티키아시스라는 학명으로 공유된 것이다. 웃으면서 착하게 살아도 불운에 빠질 수 있는 법이다. 랑종의 여주인공들 처지가 그러하다.

불운에 대응하는 이 여주인공들의 대처는 혼란 그 자체이다. ‘바얀 신’이라는 무속의 조상신을 자연신으로 섬기는 ‘님’이나, 그런 무속이 싫어 가톨릭의 하나님을 믿는 언니 ‘노이’(Noi)나, 자신에게 들이닥친 불운으로 인해 대혼돈 속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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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2016)의 나홍진 감독이 프로듀싱을, <셔터>(2004)의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이 감독과 연출을 맡은 오컬트 페이크 다큐 <랑종>.

도대체 알 수 없다. 무녀 ‘님’도, 가톨릭 신자 ‘노이’도. 귀신들이 노이의 딸 ‘밍’(Mink)의 몸 안으로 집결하려 드는 까닭을 알 수 없다. 귀신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며, 누구에게 어느 때에 파고드는 것인가?

성경에서 ‘귀신’을 표현하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원어 중심으로 살피면 하나는 ‘프뉴마 아가타르토스’(πνεῦμα ἀκάθαρτος), 다른 하나는 ‘다이모니조마이’(δαιμονίζομαι). ‘더러운 영’을 뜻하는 전자는 명사적 표현이다.

이에 비해 후자는 한층 서술적이다. 그래서 ‘귀신들린’이란 표현에 더 부합한다. 명사가 아닌 분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표현은 신약성서 문헌 중 후기 표현으로 갈수록 보편적 ‘귀신들린’에 활용되는 편이다. 같은 상황을 다루더라도 초기에는 ‘더러운 영’이라 표현했던 것을, 나중에는 ‘다이모니조마이’란 표현으로 정리하는 양상을 띤다.

‘악한 영’을 뜻하는 다이몬(δαίμων)의 중심어이기도 한 다이모니조마이는 머리 풀어 헤친 처녀 귀신, 영화 <랑종>에 나오는 한맺힌 총각 귀신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신약시대 이전부터 꽤 의미 있는 신들의 힘을 뜻하는 말이었다.

‘귀신들린’이란 그 힘의 지배 아래 놓인 상태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 힘의 조건과 결과가 다름 아닌 ‘운세’이다. 운수를 조장하는 그 기운의 지배 아래 놓인 것이 바로 ‘귀신들린’의 실체였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귀신들린’은 운수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다이몬(δαίμων)은 흔히 의인화된 ‘악령’으로 통용되지만, 사실은 ‘분배하다’(나눠주다)를 뜻하는 다이오마이(δαίομαι)에서 온 말이란 점을 유의해야 한다(매우 중요).

무엇을 나눠주는가? 운명을 나눠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귀신의 정체는 처녀 귀신이냐, 총각 귀신이냐, 또는 한국 도깨비냐, 서구식 타락 천사냐 하는 의인화에 있는 게 아니라, 운세를 각 사람에게 나눠주고 분배해주었다고 믿는 미신의 힘, 그것이 바로 ‘귀신들린’의 정체이다.

운수가 나빠서 귀신들리는 것이 아니라, 운수에 지배받는 자체가 ‘귀신들린’이란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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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랑종 옆에는 달걀이 잔뜩 쌓여 있다.

<랑종>에서 ‘님’은 이 운수의 불운을 따돌리기 위한 방편으로 달걀을 깬다. 계속 깬다. 그녀는 왜 기도하다 달걀을 깨고, 또 다시 기도하다 달걀을 깨뜨리며 살핀 것일까?

달걀을 깨서 그 도상을 살피는 행위는 오래된 신점의 방식이다. 달걀을 깼을 때 흰자와 노른자가 만들어내는 우연의 도상을 통해 운수를 파악하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은 규칙에 따른 질서이지만 행운과 불운은 불규칙적이라는 기저가 만들어낸 신점의 방식 중 하나이다.

고대의 이집트나 헬라 시대 무녀들은 동물성 제사를 위해 잡은 짐승의 배를 갈라 그 내장의 도상이 그려내는 우연성으로 신점을 쳤다. 도축의 번거로움과 경제적인 이유가 달걀을 도입했을 것이다.

기독교에 성행하는 수많은 예물의 형식이 이 달걀과 같은 형식으로 거래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혹시 나에게 날아들지 모를 액운을 따돌리기 위한 방편으로 행해지는 모든 형식의 헌금이나 예물이 이 같은 종교성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수많은 예물의 형식이 신약의 분병(分餠, 떡을 나눔)으로 교체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구약의 이름으로 이 미신이 성행한다.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눠야 하는데도, 운수를 나누고 분배받겠다는 기저에 기인한다. 이것이 제2의 감염법칙이다.

3. 제3의 전염법칙, 민족: 개떼
스토리텔링과 다큐멘터리 중첩 이유

영화 <랑종>은 제3의 감염법칙을 통해서야 감염법칙에 은폐된 궁극적 매개의 기호를 폭로한다. 그 기호는 바로 ‘개떼’다.

자기에게 임하는 신내림을 회피하고자 동생의 신발 속에 부적 넣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가톨릭 신자 ‘노이’는 착한 무녀 동생 ‘님’에 비하면 양심이 불량하다.

유통이 금지된 식용 개고기를 판매하는 자신의 생업이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집에서 개를 도살하고 삶으면서도 방에서 애완견을 기르는 이중적 행위는 마비된 양심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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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랑종>의 한 장면. 귀신을 내쫓기 위해 무당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개는 노이의 딸, 그리고 그들과 관계된 모든 사람을 살육으로 몰아넣는 사령의 실체이다. 이 악의 화신은 가족처럼 기르면서 잡아먹는 이중성의 사회 문화를 고발하는 듯 싶지만, 더 깊이 은폐된 기호는 민족이라는 집단성을 표지한다.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태국은 미얀마와 자매처럼 가깝다. 그러나 미얀마를 대하는 태국의 태도는 ‘노이’처럼 언제나 매정하다.

두 나라는 인도의 영향권 아래 설립되었지만, 인도와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는 동안에도 태국은 한 번도 외세의 식민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는 역사를 통해 그 영민함 또는 영악함이 잘 드러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태국은 일본과 함께 미얀마를 침공해 일부 영토를 강탈한 전력도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영화가 개봉된 시점에도 태국은 미얀마에서 자행되는 학살에 침묵한다.

그것은 동생 ‘님’을 대하는 언니 ‘노이’의 이기적인 행태이다. 이 이기적 행태에 도사린 감염법칙은 태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태국은 유엔이 이번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를 규탄하는 유엔 총회 결의안 표결 당시, 기권한 바 있다. 그것은 마치 유엔에서 궐기하는 북한인권 결의안에 어김없이 불참하는 대한민국을 닮았다.

북한에 대한 인권결의안은 2003년부터 19년 동안 빠짐없이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채택되는 결의안이지만,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의 이름이 동참하는 것에 반해, 최고 민주주의 국가로 자처하는 대한민국은 항상 빠져 있다. 촛불로 이룩한 민주주의 대한민국이 되어서도 빠져 있다.

유엔은 이번에 특별히 지난해 9월 서해상에서 대한민국 공무원을 사살하고 소각한 것을 겨냥해 “북한 정권이 국경 및 다른 지역에서 사망을 초래할 수 있거나 다른 종류의 과잉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기를 촉구한다”는 문장을 이 인권결의안에 추가했음에도 당사국인 대한민국은 불참이다. 마치 동생 ‘님’의 고통을 외면한 언니 ‘노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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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세가 심각해질수록 ‘밍’은 개의 습성을 닮아간다.

결국 이 개떼의 화신이 ‘노이’의 딸 ‘밍(Mink)’의 몸과 영혼을 잠식하고 말았다. ‘밍’이 완전히 개떼의 기운에 함몰되자, 이 개떼의 화신은 주변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모든 사람을 개로 전염시키거나 물어뜯도록 만든다. 심지어 이 영화를 지금까지 찍어온 카메라맨까지 물어뜯는다.

이로써 이 영화가 구현해온 독특한 시점, 즉 스토리텔링과 다큐멘터리를 중첩시킨 기도(企圖)가 드러난다.

영화는 시작부터 인터뷰로 시작했다. ‘님’ 자신이 랑종이 되기까지의 경험담과 자신의 신 이해를 담는 앵글로 출발한 이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제3자적 시점이 가필되는 방식으로 스토리를 다큐멘터리가 감싸왔다.

마치 국내 유명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처럼 각 등장인물의 희로애락을 카메라와 그 카메라를 든 카메라맨이 시종일관 따라붙었다. 그러다 개떼의 습격에서 그만 이 중첩 구도가 붕괴되고 만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곡성>에서 제3자적 참여로 일관하던 경찰 종구(곽도원)가 결국 자신도 의혹의 희생자가 되고 마는 플롯의 복고이다.

우리는 누구나 제3자적 카메라를 통해 희로애락을 드라마화한다. 그것은 드라마 작시(作詩)보다 진지하지만, 그 진지함을 가장한 쾌(快)의 한 형식일 뿐이다.

‘작시 속의 비극은 쾌감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한 바 있다. 자기와 격리된 비극이 즐거운 것이다.

동생 ‘님’의 고통을, 미얀마의 고통을, ‘북한’의 고통을 다큐멘터리에 넣고 진지함으로 포장했지만, 마침내 개떼가 카메라맨을 물어뜯기 시작한 것이다.

개떼를 지휘하는 ‘밍’은 개떼에 물어 뜯겨 살점이 떨어져 나간 카메라맨에게서 카메라를 낚아채고 앵글을 들이대며 말한다.

“니가 찍히니까 기분이 어때?”

무속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기독교, 특히 거짓된 평화에 감염된 개신교 목회자가 이 질문에 답할 차례이다.

랑종
▲카메라를 찍는 모습.

4. 제4의 전염법칙, 여성: 하혈
제3의 성, 시대의 멸문 가까운 기호

이제 끝으로 우리 사회의 ‘빈 공간에서 사물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이고 영향을 끼치는지’를 밝히는 마지막 제4의 전염법칙이다.

이 영화에서 신내림을 회피하거나 거부한 여성에게 일어나는 공통적인 현상은 하혈이다. 자신도 한때 이를 거부해 피가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멈추지 않았다는 랑종 ‘님’의 전언이 있고 얼마 후, 동생에게 신내림을 떠넘긴 ‘노이’의 딸 ‘밍’에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나 ‘밍’에게 일어난 현상은 좀 다른 것 같다. ‘밍’의 방종한 성적 사생활과 그 하혈이 이어져 있다. 무분별하고 난잡한 성행위를 즐기는 그녀의 속성은 마치 개떼의 속성을 이어받은 듯 싶지만, 여성성에 있어 하혈의 기호는 생명의 의미인 동시에 생명의 단절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피가 단수되어도 생명의 단절이지만, 지속되는 하혈 역시 생산의 중단을 뜻하는 까닭이다.

태국은 대만과 더불어 아시아에서 최초로 동성결혼을 허용한 나라이다. ‘동성결혼’이라는 명시적 합법화는 대만이 먼저 했으나, 태국은 아시아 국가 중 성소수자에게 가장 개방적인 국가였다.

대만에 앞서 이미 2013년부터 동성 간의 결혼에 대한 합법화를 추진했으며, 법적으로만 ‘결혼’이란 용어를 쓰지 않았을 뿐, 대만보다 먼저 이들에게 세금 감면과 사회복지 혜택을 제공해 왔다.

남녀 간 결혼은 아니지만 ‘시민 동반자 관계’라는 명목에서였다. 이는 얼핏 보면 차별 해소가 잘된 선진 제도 같지만, 태국의 성문화는 미스 티파니 유니버스(Miss Tiffany Universe)와 같은 프로그램이 그 방종함을 대변한다.

해마다 태국의 휴양지 파타야에서 개최되어 온 이 미인 대회는 성전환자(트랜스젠더)들의 미인 대회이다. 무려 20여 년을 훌쩍 넘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서구를 능가하는 젠더 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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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은 잦은 하혈과 방종한 생활로 일상의 삶이 망가진다.

성경에는 멈추지 않는 하혈의 병에 걸린 여성 이야기가 나온다. 혈루병이라는 말로 번역된 ‘하이모로우사’(αἱμορροοῦσα)가 바로 그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병에 걸린 여성 이야기는 귀신 지핀 돼지떼가 몰살하는 장면과 함께 배열되어 있다(마가복음 5장).

이 여성은 한 회당장이 다 죽게 된 자기 어린 딸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단락 끄트머리에 샌드위치처럼 달라붙어 있는 단화이다.

예수께서 그 회당장의 어린 딸을 구하러 가는 길목에서, 간신히 예수의 옷에 손을 대고서야 이 고약한 질병에서 해방된다. 돼지떼—어린 소녀—여성 하혈. 이 샌드위치 구조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죽게 된 여아는 12살이요, 혈루병 걸린 여성이 하혈한 기간은 12년이다. 열 둘(12)이라는 수의 기호가 완전수의 수비학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려할 때, 생명 연장의 위협을 받던 당대의 사회 실태를 시사한다.

한창 젊고 아름다운 여성 ‘밍’의 몸에서 하혈이 멎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회에 임박한 생명의 단수를 시사한다.

‘차별금지’라는 취지도 좋고 ‘젠더’라는 다양성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한 사회가 지속 가능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그처럼 생명의 지속성을 도외시하는 이중성이 가져오는 결말이란, 마치 애완견을 방에서 기르면서도 밖에서는 개를 도륙해 삶아 잡아먹는 이중성에 행태라 할 수 있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 ‘밍’의 기이하고 잔인한 행태는 이 마지막 감염의 법칙이 가져온 재앙일 것이다. 정치의 어젠다가 고갈된 일부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이 애먼 여성들의 하혈을 오늘도 부추기고 있다.

고대 로마 사회는 인구의 소멸 이전에 성 부패로 먼저 무너졌던 사회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른바 제3의 성이란 유전이나 운수나 숙명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염법칙에 따른 유행이기 때문이다. 시대의 멸문에 가까운 기호라 할 수 있다.

랑종
▲주술 모습.
에필로그
알지 못하는 신? 랑종 아닌 바울의 신

영화는 대부분 기독교 세계관에 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왜 ‘<랑종>을 기독교인이 보는 법’이란 따위의 주제로 리뷰를 내는 것일까.

특히 이런 무속을 테마로 한 영화에 대한 리뷰를 내놓으면, 적지 않은 기독교인이 그 영화를 꼭 보라는 취지에서 소개하는 줄로 오해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런 문화 상품에 대해 어떤 모종의 관점을 갖고 논평을 내는 이유를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신성이 비의(秘義)적 세계 속에 어떠한 방식으로 편재되어 작동하는지, 기독교 세계관 속에서 재상연하려는 취지이다. 그것이 첫 번째 목적이다.

다른 하나는 편재된 그 신성의 상징들이 어떻게 왜곡되어 있는지, 그 응결된 문화적 재구성을 파괴하려는 목적에서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 신성이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는 순간 모든 세계가 ‘핑계치 못한다(롬 1:20)’” 하였다.

영화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끝마무리하는 역할인 줄로만 알았던 랑종 ‘님’이, 그만 중도에 사망한 채 퇴장하고 만다.

그가 살아생전에 남긴 인터뷰에는 이런 고백이 담겼다. “모르겠어요. ‘바얀 신’이 존재하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이 고백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지는지, 어떤 신이 진짜 신인지, 신이 정말 존재는 하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다”고 토로하는 언니 ‘노이’에게 확신에 차서 했던 말, 곧 “나는 신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 바람을 통해서… 산과 나무를 통해서…”라고 했던 ‘님’ 자신의 말과 전면 배치되는 고백이다.

자고로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알지 못하는 신’(ΑΓΝΩΣΤΩ ΘΕΩ)은 랑종의 신이 아니라, 바울의 신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신은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가 말하는 범신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알면 알수록 실제로는 그분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한 줄 평: 우리에게 감염된 것들을 드러내주는 영화
별점: ★★★★☆

이영진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크투 DB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 전공 주임교수
크리스천투데이 칼럼니스트, 월간 《월드뷰》 편집위원 및 편집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며, 연구 저서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요한복음 파라독스》를 발표했고, 역서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성서와교회연구원)를 내놓았다. 그리고 원어성경 학습 프로그램 파워바이블 앱 개발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