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로버트슨 목사.
▲데이비드 로버트슨 목사. ⓒ트위터

호주 시드니에서 교회 사역 중인 복음주의자 데이비드 로버트슨은 최근 영국 크리스천투데이에 ‘우오크 자본주의는 교회와 세상에 위협이 된다’(Woke capitalism is a threat to the world and the Church)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다음은 그 주요 내용이다.

세상은 뒤바뀌었다. 특히 정치세계는 그러하다. 최근까지 스스로를 ‘좌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거대 자본주의 기업들을 상대로 격분하며 패배시킬 적으로 여겼다. 적어도 우리는 기업들의 권력이 줄어들길 원했다.

이제 스스로 ‘진보적’(왼쪽)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대기업을 위대한 동맹으로 여기고 있으며, 자본주의 기업들만큼 ‘깨어난’(woke) 이들도 없다.

여기에는 수많은 예들이 있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는 다양하고 평등한 회사를 만들기 위해 포드사의 전 수석변호사 브래들리 게이튼을 고용했다. 게이튼이 ‘비판적 인종 이론’(CRT)에 기초한 정책 시행을 위해 연간 1,200만 달러를 받으면서 회사법은 매우 수익성이 좋은 사업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회사의 우오크(woke) 법은 더욱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비판적 인종 이론은 1970년대 중반 미국의 법학자들의 글에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됐으며, 1980년대에 하나의 운동으로 등장했다. 이후 비판적 법 연구의 재생산된 이론이 인종 문제에 집중하며 발전됐다. 이 이론은 백인 우월주의가 존재하며, 법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역사를 백인과 다른 인종 간의 투쟁으로 재해석했다.

즉, 모든 백인은 권력과 특권을 가진 인종차별주의 억압자이고, 모든 비백인은 억압받는 피해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이 인종차별을 없앤다는 그 주장과 달리, 실제로 이를 배우고 따르는 이들은 다른 집단이나 인종에 대해 더 많은 반감과 차별을 드러낸다는 비판도 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코카콜라와 거래하려는 모든 로펌은 청구된 시간의 최소 30%를 ‘다양성 변호사’와 함께 보내고, 그 시간의 최소 절반은 흑인 변호사와 함께 한다고 약속해야 한다. 1964년 민권법 제7조가 명시했듯이 인종에 근거한 이러한 고용이 실제로는 불법이라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호주의 대기업 중 하나인 코튼온(Cotton On)은 ‘인종주의, 증오, 부당함’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할 의무가 있다고 선언한다. 또 일반적으로 기업들은 특정 정치적 이슈에 대해 선거 운동을 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콴타스의 앨런 조이스 사장은 AGL 에너지, 영연방은행, 텔스트라 등 다른 기업들을 설득해 동성결혼 캠페인을 벌였다. 영국과 미국의 이야기도 비슷하다.

켄트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인 프랭크 퓨례디는 호주 신문에 “누가 깨어난 자본가들을 신으로 만들었나?”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고,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예를 나열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기업 중 하나인 유니레버의 앨런 조프 회장의 예를 들었다. 그는 “브랜드들이 전 세계에서 행동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광고주들은 “유니레버와 새로운 방식으로 협력하고, 우리 시대의 큰 과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행동 및 문화적 변화를 이끄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를” 원한다.

일부 기업 지도자들은 스스로 ‘우주의 거장들’ 즉, 지구와 우리 모두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해줄 자본주의 신으로 여긴다.

이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사업에서 성공한 이들이 바로 우리를 니르바나(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해탈의 경지)로 이끄는 데 필요한 이들이 아닌가? 정치인들보다 더 잘할 수 있지 않은가? 문제는 한 나라보다 수입이 많은 기업들을 거느리고 있는 기업 자본가들 중 다수가 기독교 원칙에 입각한 서구 민주주의와 지유주의적 가치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선출된 것도 아니고, 책임질 수도 없는 거대한 기업 자본가 임원들이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어선 안 된다.

우리는 이미 이것이 어디로 이어질지 알고 있다. 아마존은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가치에 반하는 책을 금지하고 있다. 페이스북은 우리에게 진짜 의료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트위터는 우리가 어떤 정치적 견해를 들을 수 있는지 결정한다.

왜 이러한 일이 발생했을까? 이는 단지 일부 운동가들에 의한 것이 아니며, 선한 신호에 대한 냉소적 시도도 아니다. 이러한 기업 자본가들 중 다수는 진정한 신봉자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오우크 가치에 세뇌됐다. 고급 사립학교와 최신 대학들도 이를 도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들이 성장할 것으로 생각했다. 문제는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그들은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는 기득권층의 일원이 되고 싶다면 깨어나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가난한 자는 깨어날 수 없고, 부자는 깨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서구의 작은 지역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게 현실 생활과 다른 세상에서 무슨 상관인가? 교회랑 무슨 상관인가? 트랜스젠더 이념과 비판적 인종 이론 지지자들은 부유한 서구 중산층 자유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항상 돈이 우선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이념을 전 세계가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유일하고 진정한 이념으로 수출하려는 문화 제국주의자들이다.

그 결과 숨막힐 듯한 위선이 초래된다. 디즈니는 서구에서 진보적인 이슈를 해결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겠지만 중국에 대한 기업의 이익에 관해서는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최근 가디언은 디즈니가 뮬란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중국 공산당을 향한 감사의 뜻을 밝힌 이유에 대해 ‘특별공동위원회’(Commons Select Committee)에 증거를 제시하기를 거부했다고 전했다. 설사가상으로 뮬란의 일부는 위구르족의 대량 학살이 발생하고 있는 중국의 신장에서 촬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디즈니는 현지법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미국에서는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지만, 중국에서는 무슬림의 생명이 소중하지 않다. 이것은 분명 지역적인 문제이다.

리키 저베이스는 2020년 악명높은 마지막 골든 글로브 연설에서 거칠고 우스운 태도로 스타들과 기업들에 관해 말했다. 그것은 잔인한 진실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애플이 품위의 중요성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룬 TV쇼 ‘더 모닝 쇼’를 제작하는데, 이는 중국에서 노동력 착취를 한 한 회사(애플)가 만든 것이다. 여러분들은 ‘난 깨어 있다’고 말하겠지만, 여러분들에게 연기를 할 역할을 준 기업들은 신뢰하기 어려운 애플, 아마존, 디즈니이다.만약 ISIS가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한다면, 여러분들은 에이전트에 전화해 역할을 따내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 오늘 밤 수상한다면 제발 정치적 발언은 하지 말라. 여러분들은 대중들에게 어떤 것에 대해서도 강연할 입장이 못 된다. 여러분들은 현실 세계도 모르고, 대부분 그레타 툰베리보다 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적다!”라고 비판했다.

왜 교회에 문제가 되는 것인가? 우리가 정치적 이슈, 문화,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 외에도 깨어난 기업들은 교회에 큰 위협이 된다. 그들은 모든 이들에게 자신들의 가치를 강요한다. 난 자신들의 회사가 기독교 기업임을 눈치채지 못하게 비밀리에 활동하는 변호사들과 사업가들을 만났다.

회사는 우리의 사고 활동과 표현의 자유를 포함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거나 최소한 통제하고 싶어한다. 우리가 틀에 맞지 않을 경우, 다양성에 관한 교육을 시켜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들의 제품에 의존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들은 어떤 민주 정부보다 우리에게 훨씬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자유는 그들에게 가치 체계와 수익에 장애를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적 구성일 뿐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은 위대한 상인들, 돈, 사치, 권력의 도시이며 주의 백성인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려는 도시로 묘사된다. 그 갈등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문제는 교회가 바벨론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천상의 도시로서 주님께 충성한 상태로 남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직 심판이 오지 않았다면, 그 시간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이 예언의 목소리를 찾을 것인가? 아니면 ‘권력에 대한 진실’을 말하기 위해 리키 저베이스와 같은 무신론자들에게 의존해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