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
▲ⓒUnsplash/Jurica Koletić
필자가 목도한 기독교 사회 안에서의 가장 큰 병폐를 말하라면, 주저없이 ‘맹목적 집단주의’와 ‘세력주의’를 들 것이다.

굳이 ‘라인홀드 니버’의 통찰을 빌리지 않더라도, 개인적인 양심은 집단으로 옮겨갈수록 둔화되고 이기적으로 변해가게 되는 것 같다. 양심적인 개인도 조직에 물들면 자연스럽게 양심이 둔화되어 가는데, 하물며 비양심적인 개인이랴….

그런데 기독교 신앙에 있어 불변의 핵심적인 가치는 ‘개인’이다. 개인이 구원받고 개인이 예수님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는 말씀은 개인이 영향을 주어 가정과 사회를 변화시켜 구원받게 할 수있는 구원의 능력의 연쇄적 가능성을 선포한 것이지, 구원의 문제에 있어 개인이 타자나 집단을 대표해 타자나 집단을 대변하거나, 개인의 이름으로 타자나 집단을 자동 구원시킬 수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회 안에서 개인과 집단의 관계는 잘 구분되고 정돈될 필요가 있다.

한편 기업처럼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 집단이 아니라, 교육계나 의료계, 법조계, 정계, 종교계처럼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 집단일수록 개인이 집단의 이미지에 끼치는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매우 크게 보인다.

왜냐하면 개인에 대한 이미지가 그 집단이 추구하고 있는 가치에 대한 이미지에 직접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퇴색되지 않고 여일한 고유한 가치를 고수하고 있고, 또 그래야 하는 부문은 당연 종교 집단이므로, 종교인이 종교집단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상대적으로 지대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위험한 함정이 놓여 있다.

왜냐하면, 기독신앙의 핵심적 가치 반영자인 ‘개인’에 대해 부정적인 가치 평가가 발생할 경우, 그 개인이 집단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해 개인적 가치평가의 자료가 은폐되거나 조작될 우려가 상대적으로 농후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핵심적인 가치를 지닌 개인성이 유실되고 집단세력이 개인성을 대체하게 되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가치도 함께 실종되고 마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런 비리가 축적되어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집단의 가치는 자연 알맹이 없는 껍데기인 가식적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곳곳에 “도둑의 소굴( 렘7:11)”,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 바르고 제함(말 2:3)”,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계 3:1)”, “곤고, 가련, 가난, 눈 멀고 벗은 것(계 3:17)”등으로 표현하며 신랄하게 경고하고 있다.

부정적인 가치 평가를 산출한 어떤 신앙 리더가 자발적으로 허물을 벗듯이 자신의 개인적 가치성을 자진 파산하고는. 계획적으로 인맥관련 집단 속에 뛰어들어가 집단의 세력을 업고 한 빽 없는 피해자를 향하여 집중 다발 사격을 가하는 예가 실제로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예는 매우 극단적인 경우겠지만, 마치 암세포가 오랜 잠재기간을 거쳐 어느 날 갑자기 활성화되어 세포증식을 하는 것처럼, 교회 사회 안에 오랜 세월 잠재되어 왔던 가치전도의 기류가 어떤 한 개인을 통해 상승작용을 일으켜 일시에 표출되었던 병리현상이라 진단된다.

‘에리히 프롬’은 정치계와 같은 이익집단에서는 강한 자가 열세한 자에게 선제 공격을 가하는 것이 승리를 쟁취하는 방법이라 했는데, 필자는 교회 사회라는 가치 집단에서 이런 일이 자행되는 것을 경험하고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 후 신앙인, 그리고 신앙 사회의 가치와 허구성에 대해 진지하게 사색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 사회는 세상 이익 사회의 속성을 답습해선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느껴지는 기류가 형성이 되고 있다면, 뭔가 신앙상 중요한 본질이 타격을 입고 있다는 징후이다. 개인적인 이기심에 대해서는 한껏 경종을 울리지만, 집단적인 이기심에 대해서는 교회 바깥 세상에 예민한 교회 사회적 특성에 의해 무감각해온 이유에서일까?

어느덧 니버가 지적한 문제가 한국의 교회 사회에서 여실히 실례로 입증되고 있는 셈이다. 가치 집단의 이익 집단화, 한마디로 가치의 전도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인 우리는 어느 때보다 신앙의 가치 회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를 위해 교회 사회는 집단적 가치성에 우위를 두기 전에, 교계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적 가치성을 면밀히 재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개인적인 가치성에의 점검은 신앙의 핵심적 본질 운운 이전에, 우선 무엇보다 먼저 말씀에 입각한 양심 회복과 상식에 기반한 분별력부터 시급히 회복해야 한다.

이익을 방편으로 생각지 않는 순수한 동기의 믿음이 거짓없는 믿음인데, 이 믿음은 착한 양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딤전 1:19). 그러기에 교회 사회의 가치 회복을 위해서는 양심의 영역에 있어 개인적 양심만이 아니라, 교회 사회라는 집단적 양심도 포함되어야 한다.

개인 가치가 집단 가치에 편승하여 개인 양심의 실종이 생기는 이유는, 양심을 개인적 영역에만 국한시켜온 탓이다. 이에 개인 양심을 교회 사회적인 집단 양심으로 연결지어 확대해 나가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교회 사회의 상대적으로 낙후된 윤리성은 개인 양심과 집단 양심의 분리나 개인 양심이 집단 양심으로 가리워지는 때문에 그 폐해가 가속화 되어온 탓이다.

이에 따라 세력주의나 당파주의를 만들어 음성적이고 거짓된 가십거리의 온상이 생겨나고, 참견할 것과 해서는 안될 것을 분간 못하고 나대는 이런 문화는 자연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과 약자에 대한 인격모독, 그리고 과거부터 성차별의 흐름으로도 이어져, 전체적으로 교회 사회를 더 없이 매우 저급한 수준으로 퇴보 시켜온 셈이다.

가장 가치기준이 높아야 할 교회 사회 안에서의 이런 현상은 자연 집단가치의 존폐 위기를 맞을만큼 심각한 문제가 되고도 남는 것이다.

교회 사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할 대안적 가치는 생각컨대, 개인 가치의 독립적 책임성 묻기와 연대의식 회복일 것이다. 이로써 개인 가치가 집단적 가치에 의해 소실되지 않으며, 그런 은폐와 불의의 방편으로 오용되지 않고, 양자가 떳떳히 자존감을 지키며 건강하게 공존하여 나가는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개인 가치의 독립적 책임성 묻기는 한 마디로 가해자의 자발적 사과에 있다. 또 연대 의식은 형제를 사랑하고 연민하므로 형제의 죄를 대신하여 아파하며 회개하는 중보기도의 영성을 말함이지, 섣불리 세력을 등에 없고 공공연하게 피해자에게 용서를 훈계하거나 심지어 피해자를 가해자로, 가해자를 피해자로 모는걸 재미로 아는 몰상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참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부득이 여러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말하건대, 혹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교회 사회 안에서는 성범죄 목사가 피해 여성 교인을 보디발 부인으로 모는 경우가 실제로 많다고 한다.

한 마디로 여성 음녀화 프레임 씌우기인데, 문제는 이것이 교회 사회 안에서는 제법 통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라서 그런 걸까? 그렇다면 한국의 교회 사회는 이런 정도로 평균 이하의 독해 수준 밖에 안 되는 목사들이 태반이란 말인가?

가해자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렇게 말한 자체로 그는 이미 요셉이 아닌 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자명하지 않은가? 또 현대가 요셉 시대처럼 사법 제도가 취약해서 범죄하지도 않은 사람을 마구 해임시키고 가두는가?

실제 그런 반성경적인 루머를 열심히 나르는 자들이 있으므로, 수요 공급의 원칙에 맞춰 생산이 일어나는 것이다. 교회 사회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이 모든 악한 현상의 원인은 한 마디로 교회법의 취약성이 낳은 폐단이고 재난인 것이다.

필자는 이런 이슈와 관련된 제반 사안에 관해 오는 세대들을 돕고자 하는 목적으로, 출판용 원고를 완성했다. 교회 사회의 성범죄를 원천적으로 근절시킬 수 있는 충분한 내용이 담겨 있으므로, 이에 관심있는 출판사의 협조를 기다리는 중이다.

본론으로 돌아가, 참된 연대적 영성의 회복이 바로 오늘날 교회 사회가 이루어야 할 패러다임의 전환인 것이다. 이미 통시대적 절대 진리에 입각하여 지상에서 가장 완벽한 패러다임 전환을 주도하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주님께선 한 개인의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심으로 개인 가치의 절대성을 천명하셨는가 하면, 불의를 행하는 제사장 집단과 궤사를 행하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징책하심으로(말 1-2) 집단가치의 붕괴를 경고하시기도 하셨다. 즉 양자 간의 가치에 선후나 우열이나 경중을 개입시키지 않으신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온 인류를 사랑하시고 연민하심으로 인해 온 인류의 죄에 대해 지구적이고 우주적인 연대 의식을 가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시며 최후 순간까지 온 인류를 위해 기도를 올리셨던 것이다.

박현숙
▲박현숙 목사.
박현숙 목사
인터넷 선교 사역자
리빙지저스, 박현숙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9awEs_qm4YouqDs9a_zCUg
서울대 수료 후 뉴욕 나약신학교와 미주 장신대원을 졸업했다. 미주에서 크리스천 한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시집으로 <너의 밤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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