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훈
▲이름없는교회 백성훈 목사.
시편 84편

예배자는 함께 모여 예배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코로나 시대가 길어지고 있습니다. 대면 모임에 많은 제한이 생겼고, 모든 종교 집회도 제한되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집에서 온라인으로 개인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은 결코 성경적인 예배의 모습이 아닙니다. 단지 특별한 상황으로 인한 시대적 요청으로, 한정된 기간 동안 대안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가 제한된 시간에 우리는 온라인으로 예배하며, 어떤 마음과 태도로 보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비록 온라인 예배로 대안을 삼고 잠시 모이지 못하고 있지만, 온라인 예배에 안주하고 만족하여서는 안 됩니다. 함께 모여 예배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모임 가운데 임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그리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임’은 예배의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듣는 것도 있지만, 예배자들이 함께 모이는 ‘모임’에 대한 개념 또한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84편은 예배자들이 주의 성전에서 예배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상황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내용이 열왕기하 18장에 기록된 앗수르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였을 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고백일 것이라 말합니다.

도저히 물리적으로 성전에 갈 수 없었던 절박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시편 84편은 예배의 모임을 향한 간절함이 주제입니다. 시인은 시의 처음부터 여호와의 궁정에 대한 사모함을 고백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1-2절)”.

이 구절에서 시인의 간절함을 상징하는 몇 가지 표현들이 나옵니다.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부르짖나이다’ 등의 표현입니다.

시인은 사랑의 대상을 주의 장막이라고 말합니다. 예배를 향한 사모함이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마치 지금 우리에게, 함께 모여 예배하던 코로나 이전의 예배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가볍게 여기고 의무감으로 드리고 있었다면, 지금 비대면 예배의 상황에 오히려 만족할 것입니다. 어쩌면 비대면 예배마저 내려놓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고 은혜를 누리던 사람이었다면, 이 시인처럼 간절히 사랑을 담은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시인은 너무 간절해서 쇠약해지고 있으며, 부르짖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시편을 묵상하는 지금 우리의 마음에, 이 시인의 고백이 스며들어 동일한 부르짖음이 드려져야 합니다.

예배자는 예배로 힘을 얻고 복을 받습니다

시인은 왜 이토록 절실하게 주의 성전을 사모했을까요? 시인은 그 이유를 예배를 통해 얻는 ‘복’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5절에서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는다고 하면서, 그것이 바로 복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힘은 눈물 골짜기와 같은 고난을 지날 때 견디고 버틸 수 있는 은혜의 샘과 같습니다.

그 힘이 너무 커서 마치 이른 비처럼 내려 그 샘을 가득 채워줍니다. 우리는 그 힘으로 시온을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5-7절)”.

이제 시인은 예배를 향한 사모함을 더 깊이 고백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예배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성전’과 ‘기름 부은 자’입니다.

이제는 성전을 넘어 기름 부은 받은 자를 위해 기도합니다. 기름 부은 자는 당시의 예배를 주관하는 왕이나 예배를 인도하던 제사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기름 부은 자는 바로 교회의 모든 목회자와 성도들입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름 부은 자는 지금 시대에 적용할 때, 어떤 특정한 사람으로만 지칭할 수 없습니다. 예배로 모이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하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다시 모이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9절)”.

우리가 예배를 향한 사모함을 고백하는 것은 예배를 통해 얻는 복, 즉 영적인 은혜의 힘을 얻기 때문이라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예배자 모두를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기름 부은’ 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구약에서 ‘기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예배 중에 임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놀라운 은혜로 나타납니다. 성도는 그 은혜를 받아야 호흡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비대면 예배가 계속되지만, 예배에 은혜가 마르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 은혜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목회자도, 성도도 모두가 은혜가 마를 수 있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직분 자체가 그 은혜의 현재성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은혜는 날마다 구해야 하고, 날마다 충만해야 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기도는 나중의 은혜로 갚아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 시대에 비대면으로 예배하지만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여전히 예배 모임을 사모해야 하고, 여전히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기도의 중심은 바로 살아계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시인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여전히 주의 성전으로 나아갈 수 없는 특별한 상황임에도, 다시 그 성전에서 예배할 것을 확신하며 그 기쁨을 노래합니다.

주의 궁전에서 예배하던 그 하루가, 예배하지 못하며 사는 천 날보다 좋다고 고백합니다.

지금도 예배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비록 어쩔 수 없이 비대면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이런 시간이 계속될 것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이 우리 간절한 성도들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10-11절)”.

필자의 교회는 방역수칙을 적극적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너무 잘 협조해 주셔서, 큰 어려움 없이 비대면 예배와 제한적 대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평일에는 성도들이 교회로 오지 않게 했습니다. 단지 기도하실 분이 있다면 홀로 잠시 나오는 것은 허락했습니다.

지금까지는 평일에 교회로 달려와 기도하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최근 몇몇 분이 신청해 주셨습니다.

한 집사님은 지금까지 교회로 달려와 기도하지 않으셨는데, 비대면 예배 기간에 오히려 기도하겠다고 나오셨습니다.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 홀로 앉아 기도하십니다.

혼자 기도하는데 에어컨을 사용하면 전기세 나간다고 선풍기를 가져오셨습니다. 그래도 편하게 기도하시라고 만류하는 저의 마음이 얼마나 울컥 했는지 모릅니다.

또 어떤 분은 제한된 대면 예배로 모일 때, 계속 신청하고 나오셨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예배의 자리가 비워지지 않게 그 자리를 지키고 싶습니다.” 그 말에 또 울컥했습니다.

이 시편을 묵상하며 그 성도님들의 이런 갈급함이 생각납니다. 이런 기도의 날들이 결국에는 다시 모이게 될 때 큰 은혜의 통로가 되어 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사모하고 기도하는 날들을 보냅시다. 지금의 이 특별한 시간이 ‘나중의 은혜’로 갚아질 것입니다.

백성훈 목사(김포 이름없는교회)
<시편의 위로>, <시편의 소망>, <팀사역의 원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