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는 가깝고도 먼 대륙이다
뉴스로 듣는 소식은 내전과 질병과 혼란이다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안에 부족의 문화와 풍습을 지키려는 남자가 있었다

한 세기 전 제국주의의 침입에 맞서 싸운 한 남자의 삶을
작가는 이야기를 통해 보여준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치누아 아체베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치누아 아체베 | 조규형 역 | 민음사 | 221쪽 | 11,000원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고 있어도, 불안과 두려움 같은 감정이 일어난다. 이것이 오콩코(Okonkwo)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오콩코는 무능했던 아버지가 싫었다. 자신은 부자로 살고 존경도 받고 싶었다. 그걸 손에 쥐려던 순간 삶이 휘청거린다. 이 소설은 1958년 발표되었지만, 그 배경은 1890년대이다.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를 집어삼킬 때 오콩코도 그것을 둘러싼 격랑에 휘말려 들어갔다.

◈아프리카

아프리카는 생각보다 크다. 전 세계 땅의 20퍼센트나 되고 인구는 14퍼센트이다. 이 대륙에 54개국이 있고, 적어도 50만 명 이상이 말하는 언어가 200개가 넘는다.

국경선은 있지만, 부족의 발언권이 세다. 그리고 부족마다 이상한 전통이 있다. 쌍둥이를 낳으면 대지의 신이 노한다고 숲에 버리고, 사산하면 죽은 아이가 다시 엄마 뱃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난자하고, 남자답지 못하면 말도 섞지 못하고 무시를 당한다.

오콩코가 실수로 사람을 죽여서 마을을 떠난 7년 사이, 백인과 기독교가 들어왔다. 소외되고 배척받던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마을은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결국 외세의 힘에 무너지게 된다.

서구 제국주의가 책임이 있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쌍둥이라는 죄로 신생아를 버리고, 신탁이라는 이름으로 아들 같은 소년을 도끼로 죽이는 것은 과연 올바른 행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필자가 읽은 첫 아프리카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응구기 와 티옹오, 누르딘 파라, 벤 오크리, 베시 헤드, 아마두 함파테바, 알랭 마방쿠 같은 이름이 보였다.

‘아프리카 아이들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 이들 소설은 평소에 접할 수 없는 세계를 열어주었고 감동적인 이야기는 아픔에서 나온다는 걸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오콩코

때로는 살아 있는 것조차 용기가 될 때가 있다. 나는 오콩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그는 이보 부족(나이지리아 전체 인구의 30퍼센트)의 마을인 우무오피아에서 손에 꼽는 훌륭한 남자였다. 부지런하고 용맹하다.

열여덟 살 때 씨름꾼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땐 남자가 남자다웠던 시절이었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 길은 끊어졌고, 자존감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의 꿈은 부족의 촌장이다. 그것이 삶의 전부였다. 그는 평생 촌장이 되는 꿈을 꾸며 살았다. 그런데 그것을 손에 쥐려던 순간 꿈이 부서져 버렸다.

장례식에 참석 중 실수로 오콩코의 총이 발사되어 애꿎게도 망자의 아들을 죽인 것이다. 아들은 겨우 열여섯이었다. 실수여도 사람을 죽였기에 그는 집이 불태워졌고, 7년간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떠나 있는 동안 마을에 교회가 들어섰고, 재판소가 세워졌다.

“벌건 대낮에 두꺼비가 뛰면, 그 뒤에서 뭔가 녀석의 목숨을 노린다는 것이다. (238쪽)”

이 문장이 주는 슬픈 예감을 독자도 느낄 것이다. 예전에 레비 스트로스가 열대 지역을 탐사하고 쓴 『슬픈 열대』를 읽을 때 절절한 슬픔을 느꼈는데, 그런 느낌을 나는 아체베의 소설을 읽으며 느낀다.

곳간엔 얌으로 가득했고 부인은 셋이고 마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칭호를 받을 예정인 오콩코의 삶이 휘청거린다. 자신은 사고로 추방당하고, 아들 은워예가 예수를 믿는다며 떠난 것이다.

남자답지 못했던 아버지를 둔 탓에 오콩코의 삶은 힘겨웠다. 그가 불같은 성격을 가진 것도 실은 얕잡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데 아들이 겉돈다. 여자 같은 성격이 죽은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아 초조하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 굽히지 않고 어디서든 당당하고 싶었다. 하지만 19세기 말, 그를 둘러싼 세계가 근대화를 경험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그게 뭔지 몰랐다. 오히려 그는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근대화로 주도권을 잡은 열강은 아프리카 땅을 보호령으로 삼았다. 곳곳에 재판소를 세웠고, 전통과 문화를 그들의 관점으로 판단했다.

아프리카 부족은 외부의 세력에 흔들려 무너졌지만, 내부로부터도 무너지고 있었다. 관습의 부조리함과 불합리함을 은워예와 오비에리카는 느꼈다. 하지만 오콩코는 변화가 두려웠고, 그 변화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친구 오비에리카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외친다.

“저 남자는 우무오피아의 가장 훌륭한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너희들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세웠다. 그리고 이젠 개처럼 땅에 묻힐 것이야…. (243쪽)”

오콩코의 마지막이 가슴 아프다. 한때 씨름꾼이고 전사였는데, 그도 두려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무에 목을 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키고 싶은 것이 많을수록 자기 자신부터 지켜야 한다. 살다 보면 소중한 걸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아프고 서러워서 울고 싶은 날도 있다. 그럴 때면 나만은 나를 인정해주고 위로해줘야 한다. 남이 나를 알아주는 건 그 다음 일이다. 이게 오콩코에겐 없다.

“훌륭한 남자들이 다 가고 없다. (234쪽)”

오콩코는 남자가 남자다웠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한숨 지었다. 죽기 전 오콩코는 교회를 부수었다. 치안판사가 만나자고 했을 땐 도끼로 무장을 하고 갔다. 남자다운 걸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한 순간에 무너졌다. 판사가 떠나자마자, 법원의 전령들은 그를 조롱했다. 머리를 밀어버린 후 박치기를 시켰다. 배고픈데 두들겨 맞고 모욕까지 당하자 오콩코는 증오심에 숨이 막혀왔다.

그가 전령을 죽였을 때, 군중은 혼란에 빠졌다. “왜 이런 짓을 한 거야?”란 소리도 들렸다. 그는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감지했다. 이젠 우무오피아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그가 알던 남자, 긴 깃털이 달린 투구와 방패를 들고 도끼로 무장한 전사는 이젠 없다. 힘 있고 지체 높은 사람은 백인이고, 잘못을 하면 벌금을 내야 한다. 이게 우무오피아이고 이게 아프리카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치누아 아체베
▲ⓒlearner.org

◈나약함

얌(yam)이 있다. 모양은 고구마인데 식물 분류상 고구마와 관련이 없단다. 이 얌이 아프리카에선 부의 상징이다.

오콩코는 곳간 둘을 얌으로 가득 채웠다. 먹을 양식이 넉넉하니 아내와 자식을 굶기는 일이 없다. 그게 남자다움이다. 그 덕분에 큰소리를 치고 산다.

그는 딸 복도 많았다. 그의 걱정은 하나, 아들이다. 아들도 자신처럼 훌륭한 농사꾼이자 싸움꾼이 되길 바랐지만, 아들은 유약했다.

이케메푸나가 있다. 천성이 활달한 소년인데, 살인사건에 대한 속죄물로 이웃 마을에서 왔다. 오콩코가 3년째 돌보고 있다.

그 아이를 좋아하지만, 친절을 베풀거나 다정하게 말을 건네지는 않는다. 부드럽게 말을 하는 건 나약하다고 여겨지기에, 이케메푸나를 고압적으로 다룬다. 욱하면 아내도 손찌검한다. 그는 호칭과 권위에 예민하다. 이건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무의식적 발로이다.

아버지는 무능했다. 세상을 떴을 때 빚만 남겼다. 게으르니 가난했고, 그래서 처와 아이들은 근근이 먹고 살았다. 오콩코는 그런 아버지가 너무 싫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가는 게 두렵다. 오콩코는 다른 부족의 소년 이케메푸나를 아들처럼 키웠으나, 신탁을 따라 죽인다. 그걸 아들도 알게 되자 멀어져 간다. 선교사들이 우무오피아에 와서 들려준 찬송이 은워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선교사들은 교회를 세울 터를 요구했고, 주민들은 악령의 숲을 주었다. 그곳에선 며칠 못가 죽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죽지 않았고 교회가 세워졌다. 혹시 몰라 28일을 기다렸지만, 그들은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개종자도 몇 얻었다.

교회는 버림받은 자 부랑자를 받아들이면서 계속 살아남았고, 점차 강해졌다. 여기에 학교와 병원이 세워지면서 당황한 건 오히려 마을이었다.

은워예는 이름을 이삭으로 바꾸었고, 교사 훈련을 받으러 떠났다. 고향이 고향 같지 않다. 이제 많은 돈이 우무오피아 마을로 흘러 들어왔고, 사람들은 교역서, 정부, 교회, 학교, 병원에 마음을 빼앗겼다. 불과 7년 동안에 천지가 개벽한 것이다.

오콩코는 슬펐다. 그리고 그건 개인의 슬픔이 아니었다. 왜 부족의 삶이 눈앞에서 부서지고 있는데도, 그들은 태연한 것일까. 그는 버려진 것 같았다.

◈책 속 한 문장

삶이란 누구에게나 고단하지만, 그저 참고 살아간다는 걸 오콩코는 새삼 깨닫는다. 그가 고향을 떠나 일곱 해를 어머니의 마을에서 머문다. 아프리카는 남자들의 나라이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도 그걸 보여주지만, 『북으로 가는 이주의 계절』이란 소설도 이걸 보여준다. 후자는 수단 출신 타예브 살리흐(Tayeb Salih)가 쓴 소설인데 그 안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쿠란에는 이렇게 쓰여 있어. ‘현세에서 여인과 아이들은 생의 장식품이다.’”

소설에서 화자가 꾸란에는 ‘여인과 아이들’이 아니라 ‘재물과 아이들’이라고 정정해 주지만, 정작 이 말을 한 등장인물은 개의치 않는다. 그가 보기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소설에 보면 칠십 대 호색한이 서른 살 미망인에 눈독을 들인다. 그는 느긋하다. 그 여자가 거절한다 해도 여자 아버지와 오빠들이 모두 승낙을 했기 때문이다. 화자가 걱정되어 동창인 농부를 찾아가지만, 그도 비슷한 말을 한다.

“자네도 이곳 생활 풍습을 잘 알지 않나. 여자는 남자에게 속해 있고 노쇠해서 아무리 기력이 없어도 남자는 남잔 거야.”

소설에선 강제결혼을 당한 여자가 호색한을 죽이고 자살한다(소설 『인내의 돌』에 보면 아버지가 판돈을 건 내기에 져 12살 딸을 40살 남자에게 보낸다).

수단이란 국가명은 아랍어로 ‘흑인들의 땅’이란 뜻이다. 흑인들의 땅이지만, 여자들의 땅은 아니다. 아프리카에선 아이를 낳아도 아이는 아버지에게 속한다.

그런데 막상 추방이란 걸 겪고 보니 자기를 받아주는 것은 어머니의 마을뿐이다. 외삼촌은 그를 받아주며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일이 무사하고 삶이 달콤할 때 사람은 아버지의 땅에 속한다. 하지만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는 어머니의 땅에서 위안을 찾는다. (159쪽)”

제3세계에서 개인의 삶은 시대와 떼어놓을 수 없다. 개인의 삶은 역사와 맞물려 돌아간다.

『열두 살 소령』(원서 제목은 『알라가 그럴 의무는 없지』)은 코트디부아르에서 『내 이름은 임마꿀레』로 나왔고, 르완다에서 내전에 휩쓸린 개인의 삶을 보여준다.

이들의 삶은 오콩코의 삶과도 맞닿아 있다. 이들을 읽다 보면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는 표현이 마음에 느껴진다. 그게 오콩코의 마음일 것이다.

이정일
▲이정일 목사는 “하나님은 사소한 것은 즉답하시는데 반해, 정작 중요한 일에는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며 “하지만 이러한 불면의 밤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성숙해지고 깊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크투 DB

이정일 교수
미국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석사를 받았다. 신학을 하기 전엔 영문학을 공부해 문학박사를 받았다. 박사 후 뉴욕주립대 영문과에서 미국 현대시를, 세계문학연구소에서 제3세계 작가들을 연구했다. 대학에서 세계문학과 영어를 가르치며 전방 포병대대 교회에서 군(軍) 선교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