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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헌책방의 모습. ⓒ픽사베이
복음을 전하는 몇 가지 방법

복음 전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말이다.
둘째, 책이다.
셋째, 삶이다.

전에는 복음을 말로 전했다. 그것이 잘 먹혀들었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 환경이 바뀌니, 말로 전하는 것은 도리어 역효과가 나고 있다.

사람들은 우리가 말로 전하면 ‘소음’이라고 하거나, 특히 소리가 크다고 ‘예의가 없다’며 이런 말을 한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과거에는 지하철 안에서도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눈살을 찌뿌릴 뿐이었다.

이제는 앞서 역무원들로부터 제지를 받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하며 전도하지 말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교회의 극성스런 모습만 봐도 역겹다고 말한다.

말로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바꿔야 한다. 아니 차 한 잔, 물티슈 한 개씩 주면서 전도하는 방식은 지양할 시점이 지났다. 그러므로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 중 한 가지가 책이다.

삶이 최고의 방법이다

복음을 전하는 최고의 방법은 삶이다. 삶을 보고 감동되면, 알아서 묻는다.

“어느 교회를 다니세요?”

20세기에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당연했다면, 21세기는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당연하다. 삶이 감동적이면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교회를 다니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는 감동, 그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이 감동을 받게 하는 삶이 쉽지 않음이다. 그럴지라도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 진력해야 한다.

감동이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그리고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올인해야 한다.

삶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면, 사람들이 희망을 품는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에 희망을 주고 있는가?”

교회가 세상에 희망을 주려면, 예수님처럼 삶으로 하나님을 드러내야 한다. 현실은 교회가 세상에 희망은 고사하고, 혐오의 대상이 안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교회는 혐오스런 집단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백승종의 『신사와 선비』를 읽다가 기함하는 줄 알았다. 그가 조선의 성리학을 설명하면서 이런 이이기를 한다.

“사람들은 조선의 멸망을 성리학 탓으로 돌린다. 또는 성리학에 매몰되었던 지배층의 무능 때문이라고도 했다. 주희의 학성을 신성시했고 조금이라도 거기에서 벗어나면 처벌 대상으로 삼았다. 조선 성리학은 마치 신학과도 같았다. 교조주의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그래서 근본주의라는 다소 극단적인 표현을 쓰게 되었다.”

조선의 이념이 성리학이 조선 말에는 작금의 신학과 같이 교조주의에 빠졌었다? 결국 성리학으로 세워진 조선이 성리학으로 망했다는 것이다.

조선이 성리학으로 망한 이유의 예가 ‘신학’인 것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세상이 바라보는 신학은 망조를 띤 조선말의 성리학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더 신학을 삶으로 드러내도록 힘써야 한다.

예수님께서 삶으로 보여주었던 교회가, 삶이 아니라 교조주의, 교권주의에 빠져 있음이다. 그것은 우리도 목도하고 있지 않던가? 작금의 교회는 자신들이 정한 교리에서 벗어나면 이단, 삼단, 우상 등으로 정죄한다.

전 세계에 개신교 교단이 4만 개 정도라고 한다. 한국에 장로교만 해도 100개 넘는 교단이 있다고 한다. 그럼 내가 배운 교리와 다른 교파의 교리는 이단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한 형제가 아닌가? 4만 개 중 ‘점’ 하나밖에 안 되는 한 개의 교단에 속해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교회는 ‘사랑’을 외치는 공동체이다. 현실은 말로는 ‘사랑’을 외치지만 세상을 품는 포용력이 지하를 달리는 것 같다. 그 결과 나와 다른 것은 정죄하기에 바쁘다. 그것은 복음을 삶으로 전하는 데 이미 실패하고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최고의 전도 방법은 삶이다. 이젠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사셨던 사랑, 희생, 나를 죽이는 십자가가 드러나는 삶으로 시작된다.

삶이 힘들면, 좀 더 수월한 책으로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복음을 삶으로 전해야 하는데, 이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보다 시간이 덜 걸리는 것이 있는 것이 바로 책이다.

최근에는 책으로 전하는 방법이 탁월한 선택이다. 그리고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조금 수월하다.

하긴 책도 삶이 뒷받침되어야 하므로 동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쉬우니 이 방법을 활용하는 것이 지혜로움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귀찮게 구는 말로 전하는 것보다, 말없이 책으로 전하는 것은 선호한다. 책은 자신에게 선택권이 주어져 있는 것도 한몫 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책에 중독되는 것을 행복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 같다. 코로나19 이후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일을 마친 뒤 저녁에 마땅히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가 되니, 오후 6시 이후에는 2명 이상 만날 수 없다. 최근 확진자 수가 1,500명이 넘으니, 자신도 확진자가 될까봐 사람을 만나는 자체를 두려워한다. 그러니 이전보다 시간이 많이 남아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사람들이 퇴근 후 책을 읽으며 보낸다고 한다.

세상은 상황이 그러해 책을 더 많이 읽는데, 목회자나 그리스도인은 책을 더 많이 읽는가? 나의 좁은 소견과 자체 조사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책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책을 더 읽지 않으니 쉽지 않다. 그럴지라도 책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포기할 수 없다.

세상은 교회에 대해 생각보다 구닥다리라고 여기는 것 같다. 과거에는 교회가 세상보다 훨씬 앞섰다. 이제는 따라가는 것도 헉헉거린다.

책 출간이 홍수와 같은 시대에도 교회에서는 책이 많이 출간되지 않는다. 특히,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 만한 책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그저 기독교 책으로만 도배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유명한 목회자 작가는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중 하나는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사람들에 비해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이 나오기 쉽지 않다. 아무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책을 써야 한다. 그럼 책 안에 기독교의 사상이 담긴다. 사람들은 목회자나 그리스도인이 쓴 책을 통해 복음을 접하게 된다. 이와 같이 책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탁월한 방법이다.

목회자인 나는 스님의 책일지라도 내용이 좋으면 읽는다. 이젠 목회자가 스님도 읽고 싶은 책, 사람들이 읽지 않으면 뒤처지는 느낌이 드는 책을 써야 한다. 그럼 복음은 담을 넘고, 바다를 건너 사람들 마음을 파고든다.

책은 영향력이 엄청나다

우리가 책을 써야 하는 이유는, 책의 영향력이 엄청남을 모두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책의 영향력은 끝이 어디인지도 모를 만큼 크다.

책은 생전에는 물론, 죽은 뒤에도 그 영향력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고전의 힘은 몇천 년을 지나더라도, 그 매력이 괴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전, 누구나 읽고 싶어 한다. 성경은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한다. 이런 고전과 같은 책을 목회자가 쓴다면, 복음을 전하는데 그만큼 파괴력(?) 있는 것도 없다. 이런 책을 읽는 사람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교회의 좋은 이미지는 책을 읽으면서 심겨진다. 우리는 예배당만 지으려 했다. 교인 숫자만 늘리려 했다. 이제부터라도 책 쓰는 작가를 많이 배출해야 한다. 그럼 책으로 인해 영향력은 한국을 넘어 세계로까지 확장될 것이다.

책은 특히 지식층에게 영향력이 엄청나다. 지식층은 자연스럽게 사회 지도층으로 이어진다. 이 마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말이다.

대부분 사회 지도층들은 책을 가까이 함을 물론, 평생 책과 함께 살아간다. 또한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도 책에서 손을 놓지 않는다.

‘사장 인문학’이란 말이 있다.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들이 사업에 인문학의 도움을 받는 것이 두드러져 나온 말이다. 사장만 되어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놓는 순간 사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책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이다. 종종 듣는 말 중에, 비행기의 1등석에 탑승하는 승객들의 대부분이 책을 읽는단다.

비행기 1등석은 탑승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KTX(혹은 SRT) 특실만 탑승해도 대충 짐작이 간다. 특실에 타는 사람은 일반실에 타는 사람보다 글을 더 읽을 수밖애 없는 환경이다.

특실에는 일반실에 없는 신문과 간식이 주어진다. 특실에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여건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다 못해 신문이라도 읽는다.

책은 지식인층이나 사회 지도층이 평생 함께 간다. 그렇다면 우리가 책을 써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시대에 맞는 방법 중에 하나이다.

필자가 지천명에 독서를 시작할 때는 기독교의 영향력이 괜찮았다. 서점에는 설교집이 꽤 많았다. 최근에는 설교집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이는 설교의 영향력이 줄었음을 대변한다.

설교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교회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물론, 사람들이 읽고 싶을 만한 설교집이 적다는 반증이다.

그러므로 더 많이, 더 좋은 책으로 복음을 증거하려면 목회자는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책 쓰기에 과감하게 도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책으로 그리스도안의 계절이 오게 하는 데 일조하자

우리는 책을 써야 한다. 책으로 세상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는 데 일조해야 한다. 그러려면 책을 쓰는 것을 하나님의 지상명령의 하나로 삼아야 한다. 또한 책을 쓰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확신해야 한다.

책을 쓰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기필코 극복해내야 하는 일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보다 힘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 저자들이 쓴 성경을 통해 생명의 사람이 되었다. 이젠 우리가 책을 써서 세상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한다. 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을 살린다, 그러므로 책 쓰기는 목숨 걸 만한 가치가 넘친다.

하나님께서는 책을 통해 일하시니, 우리도 책을 써야 한다. 책은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일하셨다. 성경을 쓰셔서, 성경으로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셨다.

이젠 우린 차례다. 우리도 책을 써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말이 아닌 책으로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삼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한다.

P.S. 책 쓰기 코칭을 받기 원하시면 메일(kabod@naver.com)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
설교자에게 설교 글쓰기를 가르치는 치열한 설교연구가로 아트설교연구원 대표이자 아트인문학연구회 회장이다.
교인들로부터 ‘설교가 들려지지 않는다.’는 볼멘소리를 듣고 지천명 때 독서를 시작해 10년 만에 5,000여권의 책을 읽었다.
매주 월, 목, 금요일 설교자들을 대상으로 ‘설교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김해, 순천 익산 등에서 설교 글쓰기를 강의했다.
베스트셀러 작가로 책 쓰기 코칭와 책쓰기 여행을 통해 그리스도인에게 책 쓰기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설교는 글쓰기다/CLC』, 『설교자와 묵상/CLC』,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독서꽝에서 독서광으로/목양』, 『언택트와 교회/글과길』, 『감사인생(이재영 목사와 공저)/목양』, 『나만의 설교를 만드는 글쓰기 특강/꿈미』, 『설교자,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글과길』,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이 있다.
일반인 대상으로 출간한 『이기는 독서(절판)』,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가 있다.
매주 「크리스천투데이」에 매주 ‘아트설교연구원 인문학 서평’과 ‘아트설교연구원 설교’를 연재하고 있으며, 「목회와 신학」, 「월간 목회」, 「기독교신문」, 「교회성장연구소」 등에 글을 썼다. 「아트설교연구원」 회원들과 함께 ‘아트설교 시리즈’ 13권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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