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로서 당시 설교-복음전도 활동 나서
재산 팔아 가난한 자들에 나누고 기근 때 먹여
프랑스어로 성경 번역시켜 예수와 복음 전해
로마교회, 결국 왈도파 신앙운동 이단 정죄해

피터 왈도
▲독일 보름스 루터 기념공원 속 피터 왈도의 동상.
2. 피터 왈도

프랑스 남부 리용 출신 왈도는 ‘피터 왈도’라고도 불린다. 사후 150년 정도 지난 1368년경, 학자들이 혼동을 피하려고 왈도라는 이름 앞에 ‘피터’를 붙였다. 유럽인들은 ‘발도’ 또는 ‘발두스’라고 발음한다.

왈도는 도매업자로 알려진 부유한 상인이었다. 한때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고리대금업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중요한 교회행정 직책을 맡았으며, 상당히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지역사회 봉사와 교회활동을 했다. 아내와 두 딸을 두고 있었다. 출생과 젊은 시절의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173년 초 어느 일요일에, 왈도는 한 음유(吟遊) 시인에게서 가난하게 살았던 수도사 알렉시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알렉시스는 5세기 로마에 살았던 부유한 귀족의 아들이었다. 그는 신앙심이 강했다. 결혼식 날 밤에 신부와 동침하지 않고 성지순례의 길을 떠날 정도였다.

가난이 주는 고통을 몸으로 겪으며 경건하게 살았다. 얼마 뒤 자기가 살던 곳으로 돌아오자,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알렉시스는 무명인으로 살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그의 고귀한 삶의 진가가 알려지고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알렉시스의 이야기는 노래로 만들어져 애창되었다.

왈도는 알렉시스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다. 자신이 부자라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는 친구이며 신학자인 어느 사제에게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하나님께 이르는 가장 확실하고 완전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 신학자는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조언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하고 나서 나를 따르라(마 19:21)”는 말씀을 들려주었다.

왈도는 이 가르침이 자기를 향한 메시지로 받아들여 빈곤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 무렵, 왈도의 친구 한 명이 갑자기 죽었다. 충격을 받은 왈도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깊은 영적 고뇌에 빠졌다.

왈도는 사도적 빈곤을 실천하려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고리대금 피해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돌려주었고, 재산의 일부는 딸들이 어느 수도회에 정착하는데 사용했다. 재산의 나머지 일부는 아내에게 남겨주었다.

그 무렵, 기근이 닥쳤다. 왈도는 자기의 양식과 소유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결국 부자 왈도는 구걸하는 신세의 빈자가 되었다. 그런 왈도가 순회 설교자 사역을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뒤따랐다.

왈도에게는 라틴어 해독 능력이 없었다. 왈도의 초기 사역에서 특별한 것은 성경 일부를 번역하게 한 일이다.

복음서들과 바울서신들, 그리고 어거스틴, 제롬, 암브로시우스, 그레고리 1세의 신학 작품들 가운데서 중요한 부분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게 했다. 탁월한 지적 능력을 가진 스테파누스 안사와 버나드두스 이드로스에게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달라고 했다.

왈도의 시대는 라틴어판 성경이 아닌 다른 자국어 번역 성경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평신도’가 성경을 소유할 뿐 아니라 자국어 성경을 공공장소에서 읽고 강해하고 설교를 한 것은 급진적인 변화였다. 당시 교회의 방침에 역행하는 과감한 도전이었다.

왈도의 설교를 들은 많은 남녀 기독인들이 그를 존경하면서 추종했다. 1177년, 왈도의 삶을 모범삼아 따르는 무리들은 자기들이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자발적으로 복음전도자, 설교자, 봉사자로 나섰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생활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다.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성경을 사랑하고 애독했다. 성경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실천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맹세를 하지 않았다.

왈도파 신앙운동이 대중적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 설교자들, 복음전도자들이 소박하고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경건하게 살라고 가르쳤다.

왈도파 성도들이 핍박을 피해 비밀리에 예배 드렸던 알프스 계곡의 바위 굴
▲왈도파 성도들이 핍박을 피해 비밀리에 예배 드렸던, 알프스 계곡의 굴. ⓒ크투 DB
자국어 성경을 가진 왈도는 곧바로 공개적인 복음전도와 설교 사역을 시작했다. 그의 메시지 핵심 내용은 세 가지였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성직자들이 복음 설교를 하지 않을 때, 왈도의 복음 설교는 강한 호소력을 지녔다. 당시의 교회는 이단자를 무자비하게 학살하면서도,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거나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둘째, 사도적인 청빈의 삶이었다. 왈도의 설교는 성직주의와 교회의 위상을 망가뜨리는 고위 성직자들의 타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셋째, 교회의 그릇된 가르침에 대한 지적이었다. 로마교회가 주장하는 배타적 사도권, 성직주의, 성례주의, 성인 숭배가 옳지 않다고 했다.

왈도와 추종자들이 전개한 복음적 개혁신앙 운동은 교회의 무기력함과 그릇된 유혹과 사제주의에 대한 강한 항의였다. 타락한 사제들은 자신들이 베푸는 성례와 종교적 봉사가 자신들의 삶의 행태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신행(信行) 불일치를 정당화하는 그럴듯한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개발했다. “성례는 그것을 주관하는 성직자들의 공과(功過)와 상관없이 성직자들을 깨끗하게 한다.” “장미는 황제의 손에서 빛나는 것과 같이 타락한 여인의 손에서도 그러하다.”

“진주는 왕의 손에 있을 때나 농부의 손에 있을 때나 모두 아름답다.” “나의 시종이 마구간을 청소할 때 녹슨 쇠스랑을 이용하는 것은 금과 보석이 박혀 있는 갈퀴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발상은 어거스틴이 한 말의 일방적 오용이었다. 어거스틴은 도나투스주의의 공격에 대항하여 성직과 세례의 효용성이 개인의 순수성에 달려 있지 않고 감독 직임과 안수 예식, 곧 교회의 권위에 달려 있다고 했다.

어거스틴의 성례 효용성에 대한 가르침은 정당한가? 목사이면서도 조직폭력배와 마약밀거래의 두목으로 활약하는 자가 거행하는 목사 안수례가 효용성을 지니는가?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선언한 여성 목사가 집례하는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를 거리낌 없이 받아먹고 마셔도 무방한가?

왈도 연구가들은 그의 삶이 사도들의 청빈한 삶과 비슷하다는 데 동의한다. 사치스런 성직자들의 삶은 빈자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성직자들에 대한 대중적 저항감은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이 전개한 복음전도 운동의 확산에 이바지했다.

어느 교회사가는 왈도의 설교 초점이 사도적 청빈에 맞추어져 있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고 지적한다.

연대기 편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왈도와 왈도파 신앙운동의 기원을 긍정적으로 기록한다. 그들의 특징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재물 소유 포기, 성경읽기와 연구, 설교와 복음전도, 설교와 철저한 봉사의 삶이라고 한다.

왈도는 자신이 가진 프랑스어 성경을 읽고 혼신을 다해 마음으로 배웠고, 그것들을 설교했다. 대중에게 쏟아냈다.

왈도의 설교가 오늘날의 진보계 목회자들이 매진하는 ‘하나님의 선교’ 곧 인간화, 연대투쟁, 환경오염, 종교 간의 대화 같은 것들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가 이해한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좋은 소식(막 1:1)이 복음이라고 말한다. 주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다(요 3:16).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마 16:16).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집에서나 성전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전했다(행 5:42).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화해자이다(요 16:4; 딤전 2:4-6). 왈도가 이신칭의라는 진리를 깨달은 것 같지는 않다.

왈도는 식솔을 거느리고서도 자발적 금욕생활을 하면서 설교-복음전도에 매진했다. 사도적 청빈에 대한 외침과 자발적인 실천은 대중의 환영을 끌어냈다. 그의 복음전도는 명료했고, 설득력이 있었다.

교회가 성직주의와 의식과 사제의 권위에 집착하고 있었을 때, 왈도의 복음전도 설교는 인기를 끌었다. 왈도의 설교는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일의 중요성, 예수께서 산상보훈에서 제시한 기독인의 삶, 그리고 점차 공적, 사적으로 자신의 죄와 타인의 죄와 성직자들의 죄에 대한 비판을 함께 담아냈다.

왈도의 이례적인 열망과 활동이 교회에 당장 위협을 주지는 않았다. 갈등을 초래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교회는 ‘평신도’의 설교 활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설교활동을 중단하라고 했다. 교회의 설교금지 압력이 강해지자, 왈도는 교회 당국의 승인을 받아 복음전도 활동을 계속하려고 시도했다.

왈도는 로마에서 열린 제3차 라테란공의회(1179)에 두 명의 대표자를 보냈다. 교황 알렉산더 3세에게 자신들의 전도활동과 생활방식 요청을 승인해 달라고 했다. 앞으로도 계속 전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교황에게 자신들이 번역한 프랑스어 성경을 선사했다.

이 공의회는 제권(帝權)에 대한 교권(敎權)의 우위성, 곧 교황 그레고리 7세의 승리를 축하하고 있었다. 이단에게 교회 권력의 강력함을 보여주고, 성행하는 카타리파 이단을 진멸하려고 하던 때였다.

공의회는 왈도의 요청을 거절했다. 평신도의 설교가 성직주의, 교회 계급제도를 와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왈도는 하나님의 소명, 곧 설교와 복음전도 사역이 교회의 규례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왈도는 교회의 권력과 통제와 맞섰다. 왈도 자신은 그것이 엄청나게 중요한 사안인지, 다이너마이트의 뇌관을 건드린 것과 같은 것임을 알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교회사 자료에 따르면, 왈도는 1170년 또는 1180년까지 수련기 또는 보호관찰 중에 있었다. 그가 교회가 규정한 일정한 수련을 받으면 사제가 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로마교회의 신자 왈도는 교황교회 조직의 우리 안에 있었다. 1368년, 일부 이탈리아인들은 왈도가 성직자라고 생각했다. 사도들 사역의 직통 계승자라고 믿었다.

왈도파 동굴
▲왈도파들이 비밀리에 예배 처소로 삼았던 천연 동굴 입구. ⓒ크투 DB
왈도가 몰고 온 복음전도와 설교활동으로 말미암아 사태가 복잡해지고 시끄러워지자, 교회는 신앙고백을 요구했다. 왈도가 서명하여 리용 공의회(1180-1181)에 제출한 ‘신앙고백문’에 나타난 왈도의 신앙고백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가 고백하는 전통적인 교리들을 믿는다. 둘째, 생활 방식에서 ‘세상을 버렸으며’ 소유한 재산들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부(富)를 멀리하며, 최소한의 양식과 의복 외에는 누구에게든 아무 것도 받지 않는다. 셋째, ‘복음서의 가르침’을 삶의 규율로 준수한다. 사도적 청빈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모든 조언들을 문자적으로 따른다. 넷째, 이단 카타리파 교리를 배척하고, 이단자들에게 복음을 가르쳐 개종시킨다.

왈도는 그 밖에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스도의 성육신,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세례요한의 신적 소명, 몸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했다. 육식(肉食)이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내세 심판을 믿는다.

올바르게 살고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타인에게 선행을 베푸는 자는 그 행위 덕분에 구원을 받는다. 구제, 희생, 자선, 선행이 천국 입성을 돕는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성모 마리아를 믿는다. “유일한 가톨릭교회, 거룩하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으며, 이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왈도는 자신이 카타리파와 무관하며 로마교회의 일원임을 밝혔다.

위 신앙고백문은 흥미롭게도 왈도의 설교―복음전도 활동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당시까지도 로마교회가 평신도의 설교나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의 설교 행위를 강력히 금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리용 공의회를 주도한 대감독 기차드와 추기경 앙리 드 마르시가 순진하게 왈도가 이 정도 내용의 신앙고백문에 서명하면 스스로 설교―복음전도 활동은 그만두리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리용의 대감독 기차드가 사망(1181/1182)하자, 로마교회와 왈도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새로 부임한 대감독 캔터버리의 존은 1183년경 왈도와 추종자들을 냉대하고 리용 지역에서 내쫓았다. 교회 개혁을 압박하는 새로운 신앙 운동을 걱정하는 기득권을 가진 성직자들의 불만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왈도와 추종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설교-복음전도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다. 교회라는 조직기구의 통제 밖에서 그 일을 수행했다. 그들의 활동은 성직주의를 와해시키고 성직자들의 기득권을 앗아갈 위험을 지니고 있었다.

왈도의 결단은 중세 사회를 유지하는 종교 체제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었다. 로마교회는 교계(敎階)를 절대시하고, ‘베드로의 천국 열쇠’를 앞세워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의 활동을 엄격히 통제했다.

교황 루시우스 3세가 주도한 베로나공의회(1184)는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이단정죄 근거는 왈도와 추종자들이 로마교회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로마교회가 배타적인 사도적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며, 신성모독 집단이라고 비판한다는 것이었다.

왈도와 왈도파 무리가 설교, 복음전도에 대한 하나님의 부름에 연연하여, 이를 금하는 교회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교회의 사도적 권위를 부정한다고 했다.

베로나 공의회의 칙서 ‘폐쇄(ad abolendam)’는 “자신들을 낮은 자(humiliati) 또는 리용의 빈자라고 일컫는 자들을 파문하며, 스스로 설교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 교황이나 주교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자, 규정을 위반하는 자, 허락 없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설교를 하는 자들을 모두 단죄한다”고 했다.

이단 정죄는 소수 그룹과 다수집단 사이의 힘겨루기인 경우가 있다. 새로운 신앙운동이 기존 세력, 기존 구도에 위기를 가져 오면서 점차 확산되자, 교회의 신학자들과 사제들은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의 외침을 억누르려고 했다. 자신들의 그릇됨을 정당화하는 방어기제를 정교하게 만들었다.

왈도와 왈도파 신앙운동에 대한 교회의 이단 정죄는 자신의 불의, 결함, 그릇됨을 합리화하려고 공교하게 구축한 비굴한 자기방어기제를 발동시킨 결과였다.

교회는 소수 집단의 가르침의 사소한 차이와 허물을 꼬집었다. 로마교회의 왈도와 추종자들에 대한 박해는 교회가 불순한 의도로 순수한 기독인들을 박해해 온 그릇된 행습의 대표적인 예다.

왈도와 왈도파 신앙운동에 대한 교회의 이단정죄와 파문 결정은 여러 가지 신학적 질문을 남겼다. 기독인은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야 하는가? 교회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가? 설교와 복음전도 활동은 교회라는 조직체의 통제 안에서만 수행해야 하는가?

기독인의 신앙과 행위의 최종 권위는 성경인가? 아니면 교회라는 조직체의 결정인가? ‘평신도’의 설교-복음전도 활동은 불법인가? 사도적 임무 수행은 로마교회의 사제만이 할 수 있는가?

중세 후기의 교회개혁 운동, 16세기 종교개혁 운동, 근세기의 복음전도 운동, 세계선교 운동은 위 질문들에 대한 일련의 역사적, 신학적 답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