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예방접종
▲문재인 대통령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2차 접종을 하고 있다. ⓒ청와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필자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에는 이웃 사람들과 흐뭇한 정겨움으로 날마다 미소를 지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습니다.

즐거운 소식과 안타까운 소식들을 접하면서 고통과 슬픔의 무게에 따라 위로하며 함께 정을 나누던 시절이 엊그제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동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사람들은 어찌 그리 차이가 나는지, 참으로 안타까움 뿐입니다.

어린 시절 아침 일찍 일어나 대문 여는 소리 삐걱 삐걱 울리면, 앞집 뒷집 옆집 너 나 할 것 없이 저마다 빗자루나 삽을 들고 나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저마다 대문을 열고 나오면서, “어르신 잘 주무셨습니까?” 인사합니다. 나이 어린 아이들에게는 “잘 잤느냐?” “착하네,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그 시절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을 울립니다.

눈이 오는 날엔 모든 식구들이 잠에서 깨어 눈을 씁니다. 혹시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나 아이들이 등굣길에 넘어질까봐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열심히 제설 작업을 하는 모습들이 지금도 추억으로 떠오릅니다. 밤새 고요하던 동네가 서로의 안부를 전하는 소리로 시끌시끌합니다.

동네 청소가 끝나면 갑자기 고요해집니다. 저마다 집으로 돌아가 등교나 출근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들이 눈에 선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어떻습니까? 자기 집 앞에 쓰레기가 널부러져 있어도 관심이 없고, 오히려 담배꽁초나 자신의 집 쓰레기를 몰래 갖다 버립니다.

이웃집 어르신을 만나도 인사는커녕, 오히려 어르신을 비아냥거립니다. 입에 담배를 물고 어르신 쪽으로 연기를 뿜으며 침을 뱉기도 합니다. 숨어서 담배를 피우던 여성들도 이제는 대놓고 피웁니다. 청명한 아침의 하늘에 매연을 뿜어대는데, 구역질 날 정도입니다.

어린 시절이면 상상도 못할 아침의 모습이 정말 가관입니다. 등교하는 학생들이 저마다 아이스커피를 양손에 들고 등교합니다. 제 시간에 등교하는 것도 아닙니다. 몇 시간 후에야 버젓이 나타나면서도, 미안함은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조잘댑니다.

어떤 학생은 택시를 타고 학교에 도착하여 카드로 대금을 지불하다, 카드에 문제가 생기자 전화로 친구를 불러내 택시비를 지불하기도 합니다.

그 학생들에게 예전 어려운 시대를 이야기하면, 시대가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제아무리 시대가 달라졌어도, 어른을 공경하는 것과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 이웃 사랑과 나라 사랑의 역사는 시대를 불문하는 것 아닙니까?

참 이상한 논리로 현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나이 든 우리에게 불안으로 다가옵니다.

더구나 길거리나 학교에서 거침없이(?) 애정표현을 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애정표현을 길거리나 학교, 공공장소에서 쏟아내는 것이 과연 진정한 사랑일까요?

오늘날 교육 현장을 보노라면 참으로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얼마 전 아이들의 손과 발, 몸에 문신하는 것을 막아 달라는 민원을 제기하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표현의 자유라고 했습니다. 필자는 기겁을 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분노폭발을 합니다. 한 마디로 분노조절이 안 되며, 참을성이 없고, 남의 얘기는 들으려 하지 않으며, 오롯이 자신의 주장만 되풀이합니다.

십계명에서 금하는 이웃의 물건을 탐내며 훔치는 일은 이제 보통이 되어 버린 이 시대 교육현장을 바라보노라면, 부모들의 자녀 교육이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학교 역시 교육부의 지침대로 하려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스승을 존경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에는 시대를 불문하고 변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정의와 공의가 기치를 들고, 상식과 질서가 어우러져 춤을 추는 세상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아닐까요?

입만 열면 허구로, 거짓말과 꼼수, 술수가 만연한 이 시대는 5,000년 역사에도 없는 희귀한 논리로 나라를 망가뜨림은 곧 그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옛 조상들의 속담은 이 시대를 두고 남긴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존경의 대상이 되고, 젊은이들에게 미래의 표상이 되어야 할 공무원들이 소신 없이 눈치만 보기나, 남의 탓을 하면서 자신은 면피하려는 모양새는 참으로 보기에 민망할 지경입니다.

대통령부터 고위공직자들은 나라의 백성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명의 자리인데, 백성을 위하기는커녕 자신들의 향락과 쾌락을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잘못된 이념을 위해 백성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들 역시 이제 방향을 전환해야 할 것입니다. 꼬리가 길면 길수록,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한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못된 질병을 악용하여 국민을 현혹하는 이 정부의 기만은 극에 달했습니다. 잘못을 시인하고 전문가들과 소통하여 어려운 이 시기를 잘 극복해 나갈 방안을 모색해야 함에도, 고집과 아집으로 국민들에게 크나큰 근심만 안겨주는 정부가 과연 백성을 위한 정부인지 정말 답답하며, 누굴 위한 사명자인지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 칼럼 제목처럼, 신앙인들의 삶에 있어 바른 방향전환은 어떠해야 할까요?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니라(마태복음 4:17)”, “그 때에 세례요한이 이르러 유대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마태복음 3:1-2)”.

전인격적인 예수님의 선구자로 보냄을 받은 세례 요한은 천국과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고,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이는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메시아’를 영접하도록 준비하게 하신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선포한 말씀은 “회개하라”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돌이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동안 젖어왔던 방식에서, 그리고 자신의 욕심과 죄를 따라 행했던 이전의 것에서 완전히 돌이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곧 중심을 고치고 뉘우치는 것이며, 삶의 방향을 돌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완전히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에서 긴 시간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히며 살고 있습니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내가 먹고 살아가는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양적인 차이를 비교한다면,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특히 알지 못하는 것 중, 중요한 한 가지는 ‘나의 마지막 날이 언제인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들이닥칠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탁을 우리는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팡이 외에는 빵도 여행 보따리도 돈도,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이 준비 과정을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영혼 구원의 긴박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아모스 7:14-15)”.

구약 아모스 7장에서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닌, 그저 평범한 가축을 키우고 뽕나무를 재배하는 그를 주님이 붙잡으셨고, 가서 회개를 촉구하며 선포하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신분과 능력이 많고 적음을 떠나 모두가 회개 선포의 주체이며, 그만큼 회개가 촉박하고 긴급한 과제임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필자의 마지막 날이 어떨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한 노력과 회개는 지금 당장이어야 합니다. 내일 해도 되고 한 달 후, 일 년이 지나서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중요한 사실은, 나의 마지막 날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지금 즉시 최대한 빠를수록 좋습니다.

회개를 선포하는 주체는 바로 ‘나’이고, 회개의 대상 또한 ‘나’입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나를 통해 주변에 전해지고, 나 또한 회개로서 주님 앞에 기쁘게 설 수 있는 당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들 중에는 겉으로는 주님을 위하는 것처럼 포장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직장생활에 있어서 소신껏 하지 못하고 옆 눈치를 보거나, 승진을 위해 잘못된 것을 보고도 모른 체 하는 모습은 없습니까. 예수님의 사상과 정신은 ‘먼 옛날의 과수원 길’처럼 보는 세상입니다.

특히 자신의 권력의 유지를 위해 자기편과 상대편을 갈라, 주님은 온데간데없이 자신들의 영욕만을 위해 횃불을 밝히는 그들은 주님의 재림 때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면할지 몹시 안타깝습니다.

어서 속히 마음 밭을 갈아엎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삶의 방식에서 탈피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전적으로 의탁하며, 내 모든 삶의 방향을 주님을 향한, 좁은 길, 좁은 문으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