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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대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마가복음 6:3-6)”.

예수님께서 당시 유행했던 속담을 인용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했다”는 말씀의 핵심은, 장차 있게 될 제자들의 복음을 위한 파송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제자들도 파송이 되었는데, 제자들은 직접 보고 들은 예수님의 경험을 통해, 장차 당할 고통과 배척을 받더라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 것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고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누구에게나 정감이 느껴지고, 그리운 추억의 보물단지 같은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고 전해집니다. 때로는 고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저리고 설레기도 합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이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보금자리 같습니다.

냇가에서 친구들과 조잘대며 멱 감던 어린 시절, 사무치게 밀려오는 밤하늘의 별을 보던 그 때 그 시절의 필름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갈릴리 고향의 달빛은, 무수히 쏟아지는 별을 헤어보며 주님을 찬송하는 참 아름다운 복음의 밤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고향을 방문하셨지만, 가슴 따뜻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무시당했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떠날 때와 전혀 달라진 예수님의 모습에, 고향 사람들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예수님의 모습,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모습,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모습에 넋을 잃고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고향 사람들은 완전히 새롭게 변신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좀처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려하지 않고, 의심과 의혹에 찬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던 고향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수군수군거리며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고 합니다.

이 짧은 문장에서, 예수님에 대해 가졌던 고향 사람들의 속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추억이 깃들고 정이 그리워 고향을 찾아온 예수님을 고향 사람들은 반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조상 때부터 가지고 있던 오래된 선입견(先入見)과 편견(偏見) 때문이었습니다. 선입견과 편견은, 한 사람을 자신이 알고 있는 사전 지식과 정보만으로 단정지어버리는 아주 나쁘고 고약한 생각입니다. 이는 진실이 거짓으로 둔갑할 요소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미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생겨난 선입견과 편견은, 간교한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시작되어, 남자와 여자로서 편견과 자신의 우월감을 나타내려 상대방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적용되어 나보다 못살거나 지식이 없거나 어느 면에서든 못할 때 저지르는 죄입니다. 이웃을 무시하는 죄는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롯이 교만과 탐심에서 떠밀려오는 죄의 첫 단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선입견이란 어학사전에서 어떤 사람이나 사물 또는 주의나 주장에 대하여, 직접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마음 속에 굳어진 견해를 말합니다. 편견은 어떤 사물, 현상에 대하여 그것에 적합하지 않은 의견이나 견해를 가지는 태도, 다시 말해 특정인물이나 사물 또는 뜻밖에 일어난 일에 대해 가지는 한쪽으로 치우친 판단이나 의견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어느 사회나 집단에 속하는 다수를 말한다고 합니다.

선입견과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바라본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 아들도, 다윗의 자손도, 메시아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무지랭이 목수의 아들이었고,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너’, 아니 나보다 못한 ‘너’일 뿐이었습니다.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고향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이제 상황을 종료시키고자 마무리하시며 속히 다른 곳으로 떠나고자 하셨지만, 그래도 믿는 몇몇 병자의 병을 고쳐 주시고는 조용히 고향을 떠나가십니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은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온 복 아닙니까? 특히 자신들의 죄를 위해 스스로 고향을 찾아오신 복음의 축복을 비롯해 죽은 자를 살리시며 귀신을 쫓고 많은 병자들이 치유받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걷어차고 말았던 실로 안타까운 역사는,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 모습들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인간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 역시 선입견과 편견으로 인해 동생 아벨을 죽이며 인류 역사에 지금까지 나쁜 이름으로 안타깝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사울 왕 역시 다윗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으로 자신은 물론, 자녀들에게까지 비극을 초래한 것을 신앙인들이라면 잘 알 것입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 명분을 빼앗고 달아난 야곱 역시 장자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으로 죄를 지어 도망자가 되었지만, 철저한 회개로 장자의 복은 물론, 거부가 되어 개선 장군처럼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인생은 역전이 되어 지금까지 위대한 예수님의 족보 반열에 오르는 사람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들 역시 때로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판단하기보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스스로의 생각에 성을 쌓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성 안에 갇혀 나만의 선입견과 편견으로 상대방을 재단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허다함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우리의 그릇된 자화상으로 인해, 소중한 만남이 어긋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선입견과 편견으로 치장한 사람들은 창의력을 상실하며 누구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허약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신으로 늘 이기심과 남 잘 되는 것을 못 보는 처량한 사람으로, 이웃을 돌아보지 못한 채 십자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장기화되는 가운데, 우리 신앙인들은 스스로 우리 곁의 고향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냉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독생자께서 직접 방문해 주셨는데, 그 찬스를 놓쳐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 병마로 시달리며 고통당하는 자들, 억눌린 자들과 갇힌 자들은 옛부터 지녀온 선입견과 편견, 그리고 고정관념을 비워내고, 지금 고향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영접하며 복음을 위해 선입견과 편견 그리고 고정관념을 마음밭에 쏟아내야 합니다.

주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병이 낫겠다는 믿음을 가졌던 혈루증 여인처럼, 확고한 믿음으로 신뢰의 은총 속에서 주님을 맞이하며 정겨움과 정이 넘치는 신선한 믿음의 고향으로 돌아와야 하겠습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도 선입견과 편견, 그리고 고정관념에서 하루속히 탈피해, 시기와 질투, 모함이 없는 신실한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고향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이 교회를 방문할 때, 예수님을 맞이하는 듯한 신실한 마음으로 복음을 바르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선입견과 편견, 고정관념은 우리 믿음을 병들게 하는 냄새나는 악취의 고향으로, 속히 방역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는 귀한 시간으로 탈바꿈해야 하겠습니다. 고향을 찾아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듯, 교회를 찾아오는 귀한 영혼들을 내 식구처럼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