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전성시대: 비현실적 문학 vs 현실적 신앙윤리 충돌
초감성 불신과 신앙·윤리 무관심 등 시대정신 반영 결과
한국교회, 신앙 일깨울 수 있는 예술과 문학 활용 고민을
특정 문화 형태나 장르, 기독교적 선용하려는 노력 시급

웹소설 웹툰
▲최근의 웹소설 시장은 공모전을 통해 흥행할 만한 작가와 작품을 발굴할 만큼 크게 성장했다.
◈예술과 신앙윤리: 신앙과 윤리가 없는 예술의 허망함

서구에서 문학을 비롯한 예술 전반은 보통 인간의 성품과 감수성을 풍성하게 해주고 문화적 수준을 높여주는 유익한 행위로 여겨져 왔다. 가지적 이데아(intelligible ideas)를 최고의 지식과 윤리 기준으로 두었던 플라톤조차, 일부 예술 행위는 감각적 향유 수준을 넘어 존재의 진리를 어렴풋하게나마 보여줄 만큼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플라톤보다 감각의 세계를 더 중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연하게도 예술 행위의 가치를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련된 예술이란 곧 삶의 고결한 지혜의 표현이자 수준높은 윤리적 품성의 증거로 여겨졌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 육체의 욕구를 억누르는 금욕적 정서가 익숙했던 중세에도 예술은 믿음을 표현하는 일에 필수적이며, 신앙에 기반을 둔 윤리적 성품을 기르는 데 유익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중세 신학의 설계자 어거스틴은 자유학예(liberal arts) 가운데 한 과목이었던 음악의 유익을 강조하면서, 음악에 내재된 조화로운 수학적·형이상학적 개념들이 진리를 향한 인간의 감각을 일깨워줄 것이라고 가르쳤다.

근대에도 예술을 우대하는 이런 정서는 서구 사상가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인간이 자연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직면해서 느끼는 경탄, 그리고 예술적 아름다움을 앞에 두고 느끼는 미적 쾌감이 실천이성의 이념들, 도덕적 이념들과 연결될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수여되는 도덕 법칙을 수행하는 데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플라톤부터 칸트까지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예술에 대해 한 가지 경고한 바가 있다. 그들은 우리가 예술적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허구적 세계에 몰입해 그 안에서 근거없는 즐거움에 도취하게 되면 예술과 도덕, 혹은 예술과 윤리가 서로 완전하게 엇갈린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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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 일러스트레이터 마이클 셰발(Michael Cheval)의 그림. 예술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상에 탐닉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예술의 퇴락 조짐은 유럽의 낭만주의, 그리고 이 낭만주의와 결합한 독일 관념론에서 확연하게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전통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인간 정신이 가진 자유로운 상상의 힘으로 신과 세계, 그리고 인간 자신을 이해하고 규정하려 했던 19세기 유럽 낭만주의와 독일 관념론은 기존의 도덕적 관념들과 윤리적 준거들로부터 인간의 예술혼을 해방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로써 서구 예술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믿음을 바탕으로 도덕적 기준들을 따르려 했던 정서로부터 점차 벗어나,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옹립한 계몽주의적·근대주의적 가치들을 최대한 자유롭게, 최대한 환상적으로 표현하는 도구로 점차 전락해 갔다.

예술이 이러한 퇴락의 극치에 다다랐던 것이 바로 나치 예술(the Nazi art)이다. 독일 제3제국 당시 나치 수뇌부는 게르만 우월주의, 반유대주의 정서를 홍보하려 예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나치에 의해 양산된 예술작품들, 그림, 문학, 영화 전반은 윤리적 판단을 배제하고 본다면 높은 수준의 아름다움과 정교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움은 인간의 추악한 죄성을 아름답게 포장한 것일 뿐, 진정한 예술적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는 1943년 3월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펼쳐진 유대인 게토 폐쇄 작전 장면이 나온다. 병자나 반항하는 이들 혹은 제거 대상으로 지목된 이들은 도로 한가운데서 즉결처형을 당하고, 나머지는 강제로 집단수용소에 끌려간다.

그 와중에 한 슈츠슈타펠(SS, 나치 친위대) 병사가 끌려간 유대인의 집에 있던 피아노로 바흐의 영국 모음곡 2번 전주곡을 연주한다.

학살의 참상 한가운데서 죽어가는 이들의 고통과 절규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감정하게 피아노 연주를 즐기는 이 모습은 신앙과 윤리가 없는 예술적 즐거움의 표본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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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쉰들러 리스트> 中, 유대인 학살과 수용소 감금 현장에서 피아노를 치는 데 열중하는 나치 친위대 병사.

◈웹소설과 신앙윤리: 신앙없는 사회의 윤리없는 웹소설

이러한 비판의식을 최근 한국 문학계와 대중문화계의 원천 콘텐츠 풀로 자리잡은 웹소설과 웹툰에 적용해 보자.

거의 대부분의 웹소설과 웹툰 콘텐츠는 많은 이들이 현실에서 충족시키지 못한 개인적 욕망을 최대한 충실하게 표현하고, 이 욕망을 가상적으로 만족시키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웹소설과 웹툰에서 도덕과 윤리는 욕망의 대리만족을 위한 부속품 정도로만 취급된다. 주인공이 자기애(self-love)를 거부하면서 지켜내야 할 삶의 지침이 아니라, 그것을 지켰을 때(그것도 허구적인 장치들을 통해 부, 권력, 인맥, 힘을 얻어 아주 손쉽게 지켰을 때) 얻는 개인적 만족을 위한 주관적이고 사소한 기준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기준을 가리켜 ‘가언적 명령 혹은 자기애에 입각한 준칙’이라고 규정하고, 이것이 진정으로 보편적이고 정언적인 하나님의 도덕적 명령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정념적이고 이기적 욕구의 발로에 불과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웹소설, 웹툰 등에 표현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이상은 돈, 명성, 권력, 능력, 인기, 인정, 그리고 에로스(성애)이다.

이렇듯 현실에서 자기 삶을 말초적으로 기쁘게 해줄 조건들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 이 세계 전생, 회귀, 환생, 초능력, 마법과 같이 허구적으로 고안된 서사 요소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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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로 제작된 웹소설 <김비서가 왜 그럴까>를 보면 알 수 있듯, 웹소설 콘텐츠 대부분은 돈, 인기, 능력, 권력, 그리고 이성 간 사랑 등 지극히 말초적인 욕구 대상을 아무 거리낌없이 추종하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을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에 나열한 감각적 가치들을 싫어하는 이들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초월적 근거에 입각한 도덕이나 윤리는 최소한 이러한 욕구 대상들에 탐닉할 때 발생하게 되는 인간의 죄 문제를 고민하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웹소설과 웹툰의 서사는 이런 반성 기회를 최소한으로 축소시키거나 아예 배제한다. 그래야 자기만족의 강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웹소설과 웹툰이 이처럼 도덕이나 윤리를 인생의 지극히 사소한 요소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결국 최근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시대정신이 반영된 결과이다.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중시해 왔던 불교나 유교 종교이론에 기반한 도덕심과 윤리관은 상당 부분 무너져 쇠퇴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얼마간 기독교 윤리가 한국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기독교 신앙에 대한 무관심, 교회에 대한 실망, 그리고 현세 이외의 초감성적 존재 영역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면서 기독교 윤리의 사회적 영향력 역시 급속히 축소되고 있다.

웹소설과 웹툰이 대중문화 원천 콘텐츠로서 위상을 높여가는 상황은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이들의 심성이 얼마만큼 신앙과 윤리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지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징조이자 거울이다.

이런 때에 교회는 신앙의 정서를 표현하고 신앙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해 예술과 문학의 영역을 어떻게 활용할지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영국의 문필가이자 종교사상가인 C. S. 루이스, 그리고 역시 영국의 세계적인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시도를 눈여겨 볼만 하다. 두 사람 모두 각자가 지닌 ‘진지한’ 문필가로서의 명성과 위상에도 불구하고, 장르문학 취급을 받는 판타지 소설 집필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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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그리고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에이딘 연대기>. 장르문학의 영향력을 기독교 신앙의 정서와 가치를 소개하는 데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들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 그리고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1954)과 <실마릴리온>(1977) 등을 통해 영미권 문학계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이 세계 판타지 문학 장르가 가진 문화적 파급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영향력을 기독교 신앙의 정서와 가치를 소개하는 데 활용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1955), 그리고 맥그래스의 <에이딘 연대기>(2010)이다.

현재 한국도 판타지나 퓨전 장르문학 작품들이 대중문화계의 한 주축으로 부상한 상황이다. 우리에게도 영국 기독교 문필가들과 같이 특정 문화 형태나 장르를 기독교적으로 선용하려는 기독교인 작가들, 문필가들의 노력이 시급하게 요청되고 있다.

박욱주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