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성길 한국성과학연구협회 회장(연세의대 명예교수)
▲민성길 한국성과학연구협회 회장(연세의대 명예교수).
17-18세기에 발달하였던 자유(방탕)사상(Libertinism)이나 계몽주의는 도시적 사회문화, 성(섹스)에 대한 이해, 성적 자유, 등등에서 핵심적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즉 현대인이 현재 구가하는 성적 자유, 자율성, 사생활보호 등은, 18세기 계몽주의에 기원한다. 더구나 과학의 발달과 일차산업혁명과 관련하여, 지식인들 사이에 무신론과 더불어 인간에게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는 “착각”이 번지고 있었다. 자연스레 종교(기독교)에 의해 억압된 인간성을 해방시키자는 사조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거기에다 18세기에 모든 서구 국가에서 자본가 계급(부르주아)이 부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계몽사상에 영향을 받아 봉건제 또는 절대군주제를 타도하고 시민 계급(부르주아)이 지배하는 법률상 자유와 평등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낭만적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시민혁명 또는 부르주아 혁명은 봉건제의 잔재를 일소하고 자본주의의 발전을 보장하는 정치적·사회적 변혁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런 혁명사상은 나중에 “자유는 보편적이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즉 봉건적 체계의 위계적 사회질서는 깨어지고, 대신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각 개인에게 동등하다는 근대적 사회질서 쪽으로 이동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8세기는 민주주의 혁명의 시대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최초의 부르주아 혁명으로 간주되는 것은 17세기 영국의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이며, 뒤이어 1776년에 일어난 미국 독립혁명과 그리고 그 10여년 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 등이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구체제)의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시대에 지식인들은 계몽사상과 산업혁명과 더불어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을 인식하면서, 왕정과 기독교에 의해 억압된 인간성을 해방시키자는 열렬한 의도를 가졌다. 불만이 가중되던 중 1789년 흉작이 일어나 국가 재정이 파탄 났다, 분노한 도시민(부르주아)과 농민이 봉기하였다. 이 기회에 혁명가들은 절대군주제와 봉건제를 타도하고 시민 계급(부르주아)이 지배하는 자유와 평등의 유토피아적인 사회를 건설하려 하였다. 혁명가들은 왕족과 귀족들과 더불어 프랑스 카톨릭교회를 억압자로 동일시하였다. 그들은 자유의 이름으로 카톨릭교회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였다. 혁명가들은 기독교 교리를 비하하거나 조롱하였고, 수많은 성당들을 파괴하였고, 교회재산을 몰수하였고, 수천명의 신부들을 추방하거나 처형하였다.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는 이에 대해 강력히 반격하면서, 이를 문화전쟁(culture war)이라 불렀다. 이에 대한 반격으로 프랑스 혁명가들은, 계몽사상에 근거하여 이신론(理神論 Deism)을 제시하면서, 자율적 이성(autonomous reason)을 “해방의 여신”으로 격상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예배하게 하였다. 노트르담 성당은 이성의 신전(Temple of Reason)으로 개명되고 거기서 자유에 대한 송가가 불리어 졌다.

그러나 혁명은 유혈이 낭자한 채 10여년만에 끝났다. 혁명의 지도자들도 자신들의 동지들에 의해 자신들이 고안한 키요틴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인권을 위한 혁명이었으나, 성의 해방은 물론 여성의 해방은 아직 아니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인간과 시민의 권리”(rights of man and citizen) 선언에는 성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없다. 가족과 사회는 여전히 가부장적이었고, 여성은 억압받았다. 휴머니즘이나 계몽은 남자 엘리트들만의 일이었다. 칸트, 루소 같은 계몽주의 또는 낭만주의 사상가들마저도 여자의 공간은 여전히 가정 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혁명의 “여신”이 자유와 평등을 향한 해방을 이끌었지만 “여성”들은 평등권을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가들은 전통 종교(기독교)를 공격함으로 전통적 관습을 파괴하려 하였는데, 이는 전통적 윤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으로, 간접적으로 성혁명에 기여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적으로 가정 내에서도 실용주의적 사고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개인의 의사존중이라는 관념에 따라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연애와 결혼이라는 관념이 생기었고, 양성 평등이 거론되기 시적하였다.

이제 어느 정도 계몽도 되었고 감정의 힘도 알게 되었고, 혁명도 해 보았던 인간들이, 전에는 못해 본 것들 중에 더 성취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동안 억압하여 왔던 성적 욕망이었다. 정치적 자유(liberty)라는 개념은 성적 자유(방탕)(libertinism)에 시선을 두게 되었다. 성 해방을 향한 발걸음이 한발 더 나아갔다. 혁명과 해방과 무신론으로 인하여 서구사회는 조금씩 성에 허용적 사회가 되어 갔다.

민성길 한국성과학연구협회 회장(연세의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