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양평 덕촌교회(합신, 30)
일시: 2021년 7월 4일
본문: 시편 139:14, 17-18, 고린도전서 15:10, 디모데전서 1:15,16

김명혁
▲김명혁 목사. ⓒ크투 DB
‘나의 어린이 시절 신앙생활 이야기’ 간증 설교를 시작합니다. 우선 유아 시절과 유년 시절의 추억들을 살펴봅니다.

저는 유아 시절과 유년 시절을 주로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한경직 목사님의 초청으로 1938년부터 신의주 제2교회 부목사님으로, 나중에는 담임 목사님으로 9년 동안 목회를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1살 때부터 9살 때까지 신의주에서 살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제가 한 살 때부터 저를 안아 주시면서 사랑하셨는데, 제가 평생토록 한경직 목사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은 것은 너무나 큰 은혜와 축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장난꾸러기였습니다. 신의주에서 살던 유아 및 유년 시절에 동네 친구들과 이곳 저곳으로 놀러 다니면서 심한 장난을 치곤 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중국 사람들이 가꾸던 토마토 밭에 들어가 몰래 토마토를 따서 먹기도 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길가에 조그만 웅덩이를 파고 웅덩이를 종이와 흙으로 덮은 다음 숨어서 보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웅덩이에 빠지는 것을 보고는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겨울에는 썰매를 티고 쇠통에 담은 숯불을 쇠줄에 매달아 휘두르며 친구들과 이곳 저곳으로 몰려 다니면서 신나게 놀기도 했고, 여름에는 친구들과 함께 압록강에 들어가 미역을 감고 물 장난을 치면서 즐겁게 놀기도 했습니다.

동네 친구들을 데리고 교회당(신의주 제2교회) 지붕 위와 교회 건물 맨 꼭대기에 올라가서 놀다가 어느 아이가 똥이 마렵다고 하면, 제가 똥을 종이에 담아서 멀리 던져 남의 집 지붕 위에 떨어지게 하는 못된 장난까지 쳤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놀기를 좋아했고 장난 치기를 좋아했는데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저를 꾸짖거나 야단을 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너무너무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좀 심한 장난꾸러기였는데, 저의 손자들이 저의 장난꾸러기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둘째 손자 수혁이는 세상에 장난꾸러기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이고, 다른 하나는 외할아버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엄마한테 야단을 맞지 않아서 너무 좋았을 거라고 말합니다.

신의주 제2교회에서 감동받은 성극 ‘네 번째 동방박사’ 이야기

저는 심한 장난을 치면서도 신앙생활은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서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유치부 시절 어느 성탄절에 신의주 제2교회에서 성극을 공연하는 것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는데, 그때 받은 감동을 평생 지니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박사인 알타반 박사에 대한 성극이었습니다. 동방에서 떠난 네 번째 박사는 세 박사들과 만나기로 약속했던 장소를 향해 말을 타고 달려가던 중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던 병자 하나를 살리기 위해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준비해서 가지고 가던 세 개의 보물 중의 하나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알타반 박사는 시간을 지체하므로 세 박사들을 약속 장소에서 만나지 못했고 베들레헴에 늦게 도착해서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지도 경배하지도 못했다는 서글픈 이야기였습니다.

메시아이신 왕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보물 하나는 병자를 위해서, 다른 하나는 베들레헴 어느 집의 아기가 군인들에게 잡혀가려고 하는 것을 살리기 위해 써 버렸습니다. 그 후 알타반 박사는 평생토록 메시아를 만나 경배하기 위해 애굽으로 이곳 저곳으로 찾아 다녔지만, 메시아를 만나지 못했다는 서글픈 내용의 성극이었습니다. 자기가 지니고 있던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거의 다 써 버렸습니다.

30여년이 지난 후 백발의 노인이 된 알타반 박사는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그 때 군중들이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왜 그리로 올라가냐고 물었더니, 메시아를 못박아 죽이려고 올라간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이제라도 메시아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군중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노예로 팔리기 위해 군인들에게 잡혀서 끌려가던 한 소녀가 알타반 박사를 향해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하나 남은 보물을 그 소녀에게 주므로 그 소녀를 구해 주었습니다.

서글픈 이야기였지만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유치부 어린이였던 저에게 깊은 감동을 준 장면은 성극의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빈 손으로 서글픈 마음으로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던 백발의 노인이 된 알타반 박사가 지진으로 돌무더기에 뒤덮여 죽어가면서 들은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이었습니다.

“알타반아! 알타반아! 너는 나를 만났느니라. 네가 준비했던 보물들은 내가 모두 받았느니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니라.”

유치부 어린 시절 제가 들은 “알타반아! 알타반아!”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저는 평생 잊지 못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결국 목회자가 된 후에도 저는 알타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교회에서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우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받은 감동과 은혜를 평생 지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제 시대, 아버지에게서 배운 순교 신앙

신의주에 있을 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일제 시대와 공산주의 시대에 자주 감옥에 투옥되어 감옥 생활을 하셨는데 신의주에 있을 때 저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갇혀 있던 감옥을 자주 찾아가, 감옥 담장 밖에서 목청을 돋아서 노래를 부르면서 “아버지이… 아버지이…!” 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그때 제가 자주 부르던 노래는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였습니다. 저는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봄으로 순교 신앙을 몸으로 느끼며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저에게 잔소리는 고사하고 타이르는 말씀도 별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저를 칭찬해 주시고 격려하신 것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하실 때, 제가 대답을 하면 잘했다고 칭찬을 해 주시곤 했습니다.

저는 신의주와 평양에서 아버지의 목회의 삶과 고난의 삶을 바라보면서, 새벽 기도와 주일 성수와 순교 신앙의 유산을 제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체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립니다. 저는 신의주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장난꾸러기였지만 공부는 언제나 잘했습니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가 공부 잘 하라고 잔소리를 하신 적은 거의 없었다고 기억됩니다.

특히 어머니는 모든 것을 제가 스스로 하도록 저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자발적으로 또는 창의적으로 무엇을 하곤 했습니다. 좀 심한 장난도 쳤지만 저는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을 생각하면서 그런 일을 찾아서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저를 칭찬하시곤 했습니다.

결국 저는 공부도 잘 했고 놀기도 잘 했고 글도 잘 썼는데 글을 잘 쓴다고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해 2학년에서 4학년으로 월반을 하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사동 탄광에 투옥되신 아버지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47년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께서 신의주 제2교회를 사임하시고 평양 서문밖 교회로 부임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공산주의 정부와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강량욱 목사와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감옥에 투옥되셨습니다. 처음에는 평양 감옥에서 감옥생활을 하시다가 나중에는 평양 외곽에 있는 사동 탄광에 투옥되어 중노동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끔 아버지를 면회하러 어머니와 함께 사동 탄광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남루한 죄수복을 입으신 아버지를 몇 번 만나 뵈온 기억이 납니다. 저는 아버지로부터 신앙적인 감화를 계속해서 은은하게 받았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고난도 감수해야 한다는 교훈을 말이 아닌 삶으로 계속해서 전수받았습니다.

제가 평양 제5인민학교를 다닐 때 주일 성수를 끝까지 고수했던 이유도 바로 아버지로부터 받은 감화와 교훈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더욱 더 열심히 했습니다. 평양은 바로 최봉석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께서 1944년 4월에 순교하신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에게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와 순교 신앙의 씨앗을 심어주신 분들이 주일학교 선생님들인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이었습니다. 저는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를 철저히 했고 순교 신앙을 귀중한 신앙으로 이어받았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선생님들의 말씀을 잘 들었는데 선생님들이 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했습니다. 교회에 와서 유리창을 닦으며 청소를 하라고 하면 청소를 했고, 새벽 기도를 하라고 하면 새벽 기도를 했고, 주일날 공부를 하지 말고 물건이나 음식을 사지 말라고 하면 공부도 하지 않고 물건이나 음식도 사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평양 제5인민학교(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일요일 날 학교에 등교하라는 명령을 매주 받았지만, 일요일 날 학교에 등교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결국 2년 동안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섰고 때로는 정학을 받았지만, 주일날엔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일학교 오후 예배 시간에 누구든지 기도하라고 하면 제일 먼저 제가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주일 저녁 어른 예배시간에 때때로 제가 나가서 “간증” 또는 “발표”를 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저를 가장 많이 사랑했지만 저에게 잔소리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공부를 잘 하라고 타이르는 일도 별로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나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평양에서도 저는 공부도 잘했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저는 저를 믿고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신 어머니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깊은 사랑과 존경을 표합니다.

잔소리보다는 순수한 사랑과 격려가 그 무엇보다 귀중하다는 것을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잔소리를 많이 듣고 자란 어린이들은 자발성이나 창의성보다는 짜증과 불쾌감을 지니고 소극적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를 바로 드리면서 살기 위해 11살 때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북에 남겨 두고 38선을 혼자서 뛰어넘어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엄청난 일이었는데 제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결정한 일이었습니다. 저를 강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을 저는 잘 압니다.

주일성수를 위해 부모를 떠나 월남하다

제가 평양을 떠나기 전에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가서 주일을 바로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저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가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를 너무 사랑하시면서 저 없이는 못 살겠다고 늘 말씀하시던 어머니도 울면서 “그러면 가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저의 자발적이고 모험적인 기질을 잘 아시는 어머니께서 제가 떠나기 전에 저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 위험한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를 믿고 저를 멀리 떠나 보내시는 슬픔과 아픔을 지니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립니다.

저는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평양을 떠나 기차를 타고 해주로 오면서,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지니면서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 하나님을 바로 믿고 섬기기 위해서,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좋은 목사님이 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미지의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면서 저의 마음을 추스르기도 했습니다.

해주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다음 날 밤 어른들 5-6명과 함께 38선을 넘게 되었습니다. 안내원을 따라서 조용 조용히 국경을 넘다 우리 일행은 국경경비 군인들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일행을 향해 모두 손을 들고 서라고 명령했습니다. 손을 들고 서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손을 들고 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 수 없었습니다. 국경을 넘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고 바로 예배 드리기 위한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좋은 목사님이 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손을 들고 설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언덕을 넘고 긴 파밭을 달리고 목에 차는 강을 건너면서 계속 달렸습니다. 파밭을 지날 때 파들이 꺾어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도 두렵지가 않았습니다. 약간의 스릴까지 느꼈습니다. 아마 40여분 동안 달린 후 저는 남 조선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11살 때 혼자서 38선을 넘은 사건은 그후 저의 평생의 삶의 성격과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움 없이 모험적으로 뚫고 나아가는 “막가파”의 삶이 저의 삶의 모습이 된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어떤 삶을 사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저는 남쪽에 와서 어느 작은 초가집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지난 밤에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젊은이가 저에게 다가 오더니 어디 가냐고 물었습니다. 서울로 간다고 했더니 어떻게 누구하고 가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같이 오던 어른들이 모두 잡혀서 어떻게 서울로 가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저를 서울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청년과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왔습니다.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저는 화려한 도시 모습에 크게 감탄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청년의 친절한 안내로 해주에서 서울까지 무사히 올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주머니에 서울 중구 회현동 2가 45번지라는 주소 한 장을 가지고 왔는데, 서울역에서 걸어서 서울 중구 회현동 2가 45번지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수년 전부터 서울에 와서 사시던 이모님의 집이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이모님을 반갑게 만나게 되었고 이모님 집에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서울에서의 나그네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후에 저를 서울까지 친절하게 데려다 준 그 청년을 찾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애를 썼지만,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청년을 하나님께서 저에게 보내주신 “천사”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서울에 와서 이모님 집에서 살면서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지만, 처음 2년 동안은 저는 밤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마음껏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좋았고 너무 감사했습니다.

주일에는 영락교회에 가서 종일 예배를 드렸고, 주중에도 모든 예배에 참석하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주일 성수는 계속해서 철저하게 했습니다. 새벽 기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님을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가웠는데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평생 부족한 저를 사랑으로 품어 주신 아주 귀중한 스승이셨습니다. 신의주 제2교회 출신인 김익순 장로님도 저를 따뜻하게 만나 주시고 대해 주셨습니다.

저는 서울에 와서 방산국민학교 5학년에 입학하여 2년 동안 공부했는데, 저는 공부도 운동도 잘해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는 제가 이북 사투리를 한다고 반 친구들의 놀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친구가 저를 계속 놀려서 제가 그 친구에게 학교 뒷마당에 가서 나하고 싸움을 하자고 했습니다. 결국 반 친구들이 학교 뒷마당에 모두 모였습니다. 반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그 친구를 때려 눕혔습니다. 제가 이겼습니다.

그 후부터 그 친구는 저를 놀리지 않았고 반 친구들은 저를 부러워했습니다. 운동도 싸움도 공부도 제가 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반에서 두 명씩 뽑아 남산에 가서 과학 경연대회를 한 일이 있었는데 제가 뽑혀서 간 일도 있었습니다.

저에게 있어 평생 신앙 생활이 첫째이고 공부는 둘째였는데, 저는 공부도 잘 해서 당시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던 서울중학교에 어렵지 않게 합격했습니다.

저는 서울중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도 잘 했고 엉뚱한 짓도 잘 했습니다. 어느 날 국어 선생님이 강의를 하시는데, 저는 두 손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선생님을 계속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국어 선생님이 저를 앞으로 나오라고 하더니 “은진 미륵같이 생긴 놈이 그런 짓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 라고 나를 책망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생님들의 말씀을 잘 들었고 특히 김원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었는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깨끗하게 부지런하게 책임 지키며 살라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려고 평생 노력을 했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저의 삶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원규 교장 선생님이 초청해서 말씀을 전하게 하신 변영태 교수님(후에 총리)의 말씀을 들었는데, 변영태 교수님은 절약하면서 검소하게 살고 운동을 하면서 건강하게 살라고 권면했는데 치약도 절약해서 사용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는 본래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듣는 터라 그렇게 살려고 평생 힘썼는데, 저는 지금도 양치할 때 치약을 절약해서 조금씩 사용합니다.

서울에 와서 엉뚱한 일을 하나 한 일이 있었습니다. 중구청에 가서 주민등록을 하는데 구청 직원이 저보고 “본”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본”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얼떨결에 제 “본”이 “남양”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평양에 있을 때 남양군도에 살던 토인들이 등장하는 만화를 아주 좋아했는데, 갑자기 남양군도가 생각나 “남양” 이라고 대답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 본은 “김해”인데 저는 평생 “남양 김씨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합동신학대학에서 “은퇴 기념 논총”을 나에게 증정할 때 “남양 김명혁 목사 은퇴 기념 논총”이라는 제목을 사용했습니다. 제 딸은 “남양” 김씨 가문이 자기 대에서 끊어지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월남 한지 2년 만인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인민군들이 탱크를 타고 서울 시내를 지나가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미국 비행기 B29의 폭격도 눈앞에서 목격했습니다. 제가 들어갈 수도 있었던 방공호가 폭격으로 인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고, 폭격으로 인해 사람들이 길가에 쓰러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전쟁의 불행과 비극을 직접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서울을 떠나 피난민 대열에 끼어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모부님이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회사 사장님의 봉고차를 함께 타고 사장님 가족과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 부산까지 내려갔습니다.

부산까지 내려가는 길에서도 폭탄이 터지고 길가에 쓸어지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전쟁은 불행한 것이고 비극적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부산까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부산에서 몇 달 동안 피난 생활을 하다 대구로 옮겨와서 3년 동안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셋방 하나를 얻고 한 방에서 불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모님이 시장에 나가 옷감 장사를 하며 돈을 잘 벌어서, 차츰 어려움이 없는 피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3년 동안 피난 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일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를 정성껏 드렸고 봉사와 전도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새벽기도는 거의 빠지지 않았습니다.

셋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새벽마다 대문을 열고 교회에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대문을 열고 나가서 밖에서 대문을 잠그는 방법을 알아내었습니다.

결국 저는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새벽마다 대문을 열고 나가서 밖에서 대문을 잠그고 교회에 가서 마음껏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처음에는 대구 제일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여러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 때 대구에는 SB(Sister/Brother) 즉 누나 동생을 맺는 것이 유행했는데, 대구 제일교회에 다니던 누나 뻘 되는 주명숙이라는 고등학생이 저하고 누나 동생을 하자고 했습니다. 저를 귀엽게 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주명숙 누나는 그 때 내가 다니던 영남중학교 교장인 주덕근 교장 선생님의 딸이었습니다. 저는 누나와 친하게 지냈는데 저를 누나 집에 데려가서 음식도 해 주고 선물도 주고 내 손수건도 빨아주었습니다.

저는 그 때 사과 껍질을 깎는 법을 누나에게서 배웠습니다. 즉 칼로 사과를 톡 친 다음 껍질을 깎는 법을 배웠는데 저는 지금도 그렇게 사과 껍질을 깎곤 합니다.

제가 대구에서 잊지 못할 귀중한 추억은 ‘한국의 무디’라고 불리시던 이성봉 목사님을 만난 일이었고, 이성봉 목사님을 통해 깊은 은혜와 감동을 받은 일이었습니다.

그 때 이성봉 목사님께서 몇 달에 한 번씩 이 교회 저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셨는데 저는 12번이나 부흥회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그 때는 부흥회가 월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개학 때는 새벽과 저녁 집회만 참석했지만, 방학 때는 오전 집회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아무도 저를 강요하지 않았지만 은혜를 사모했기 때문에 제가 스스로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된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언제나 신앙생활이 첫째였고 공부는 둘째였습니다. 이성봉 목사님께서 새벽마다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셨고, 오전과 저녁 집회 때는 은혜 사모와 성결과 헌신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천로역정 강의는 너무너무 재미있었고 은혜로웠습니다.

때때로 “세상 만사 살피니 참 헛 되구나…” 허사가를 부르시곤 했는데 목소리가 너무 좋았고 감동도 충만했습니다. 성경 아무데를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면 저는 성경을 찾지도 않고 암송해서 읽곤 했습니다.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는 말씀들을 제가 거의 다 알고 있었고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주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던 말씀 중의 하나는 시편 50편 15절이었습니다. 금요일 밤에는 철야기도를 했고, 토요일 새벽에는 안수기도를 받았습니다.

기도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후에는 묻지도 않으시고 “너 기도 제목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거지”라고 말씀하시면서 안수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12번은 안수 기도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었고 축복된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죄를 고백하는 회개의 삶이 너무너무 귀중한 것을 배우게 되었고 그래서 평생 회개를 힘쓰면서 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을 너무너무 존경하게 되었고, 결국 2000년 5월 1일 신촌성결교회에서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조명”이란 제목으로 “이성봉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 강의”를 하게도 되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였습니다.

어린이 시절의 이야기를 다 하려면 시간이 부족해서 다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청년 시절의 이야기와 장년 시절의 이야기와 노년 시절의 이야기를 다 하려면 너무너무 시간이 부족해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평생토록 부족한 죄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얼마나 많고 놀라운지 다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고백한 한 마디를 인용함으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시편 139편 14, 17-18절 말씀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 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 139:14, 17-18)”.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