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3월 군산 도착해 선교활동 시작
군산·익산·김제·서천 지역 교회 설립해
복음 전파하면서 여러 학교와 병원 세워
▲전킨 선교사 가족. 그는 아들 3명을 한국 땅에서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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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전킨(전위렴, William McCleary Junkin) 선교사는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나 워싱턴 앤 리 대학교(Washington & Lee University)와 유니온 신학교(Union Presbyterian Seminary)를 졸업하고,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한 선교사 7인의 일원으로 1892년 한국에 들어왔다.
명문대를 졸업한 그는 1891년 안식년차 미국에 들른 북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의 선교보고회에서 “조선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보고를 듣고 자원해 조선을 찾았다.
▲말을 타고 전도하러 다닌 전킨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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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킨 선교사는 평양신학교에서 강의하며 길선주 목사 등 한국 최초 목회자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1907년 평양대부흥을 계기로 호남 지방 대부흥운동을 주도했으며, 1908년 1월 2일 43세를 일기로 한국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선교 기간 조지와 프랜시스, 시드니 등 세 아들을 풍토병으로 잃어야 했다.
▲전킨과 함께 활동한 드루 의료선교사가 1896년 구입한 선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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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 전킨의 고향인 버지니아를 직접 방문해 자료를 수집하고 사진을 촬영했던 서종표 목사는 “전킨 선교사는 자전거도 최초로 보급하고, 야구도 질레트 선교사 이전에 보급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가 설립한 군산 영명학교에서 1919년 3월 5일 서울 이남 최초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현재 기전학교가 전킨 선교사를 기념해 세워진 학교”라고 설명했다.
▲군산 교회 최초 예배처소로 사용된 전킨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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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킨 선교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1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기꺼이 자원해 호남 즉 군산에 왔다”며 “이런 선교사들의 헌신과 수고로 어둡고 가난하고 미신과 우상에 찌든 우리나라가 엄청난 축복의 나라, 복음의 나라로 바뀌었다. 이것은 전킨 선교사를 비롯한 한 알의 밀알이 된 여러 선교사들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전킨 선교사의 부인 레이번 선교사와 주일학교 여학생반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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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목사는 “군산의 근대화를 가져오고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세운 전킨 선교사 기념관 설립 필요성을 제기하니 군산시장님도 공감했다”며 “시의회에서도 전킨 선교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니 긍정적 반응을 보여 예산이 세워지고 용역이 이뤄져 마침내 전킨 선교사 사역지였던 구암동산에 전킨기념관을 세우게 됐다. 너무 감사한 일이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밝혔다.
▲왼쪽부터 전병호 목사, 서종표 목사, 김재우 장로. ⓒ이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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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서 예수님을 영접해 지금까지 35년간 군부대 사역을 하고 있으며, 지금도 주일마 3곳의 군인교회를 섬기고 있다. 문준경전도사기념관 초대 관장(대행), 추명순전도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했고, 현재 전킨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 호성신학교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전킨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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