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복지기관 종교활동 자유로워… 선교와 사회복지 하나
종교계 사회복지단체들, 지원 이유로 너무 쉽게 정체성 넘겨
국가, 사적 단체 기본 권리 인정을… 종교 선택 자유 제한 X
해방 후 한국 기독교, 국가 감당 못하는 사회복지 역할 맡아

김명혁 박명수 대담 이성봉
▲박명수 교수. ⓒ크투 DB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가 사회복지정보자원연구소와 공동학술대회를 ‘한국사회 형성과 기독교 사회복지’라는 주제로 21일 오후 온라인 개최했다.

이날 소장 박명수 교수는 ‘해방 이후 한국사회 변화와 사회복지’라는 주제로 주제강연을 진행했다. 그는 “한국 기독교의 사회복지는 한국교회의 선교 정신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며 “초기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교의 대상을 한국 사회의 상류층보다 오히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로 정했다. 여성들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다. 전통 인 유교사회에서 배제된 여성과 어려운 사람들이 그 대상이었다”고 밝혔다.

박명수 교수는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이 의료와 교육을 시작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언더우드가 처음 한국에 와서 고아원을 만들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며 “당시에는 고아원이라는 제도가 없었다. 언더우드가 그래서 고아원을 시작했고, 이것이 발전돼 경신학교가 된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런 한국교회의 전통은 한국사회의 어려운 사람들을 특별히 사랑하는 선교로 계속 발전했다. 해주 결핵요양원으로, 맹아학교로, 어려운 청소년을 대상으로 성경구락부를 시작하게 만들었다”며 “전통적으로 볼 때 교육과 구제는 종교적 영역이었다. 유럽 교회와 동양 불교가 이런 일들을 감당했다. 이런 점에서 한국에서 교육과 구제사업을 기독교가 선교와 함께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전통이 해방 후 더욱 발전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명수 교수는 “해방은 한국 기독교에 특별한 위치를 부여했다. 한국 기독교는 일제 말 일본과 마찰을 빚은 거의 유일한 집단이었고, 일제는 한국 기독교를 친미 세력으로 보았다”며 “해방 후 일본은 한국 기독교를 한국사회를 이끌 집단으로 보았기에, 각 도별로 진행된 치안 이양 과정을 기독교 인사들에게 부탁했다”고 소개했다.

월드비전 밥 피어스
▲월드비전 설립자 밥 피어스 목사(오른쪽)가 1950년대 6·25 전쟁으로 다리를 잃은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크투 DB
박 교수는 “해방 직후 한국사회에는 일본과 만주에서 들어온 사람들, 그리고 북한에서 월남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우리는 이들을 전재민이라 부른다. 해방 후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전재민에 대한 처리였는데, 기독교인들이 여기에 앞장섰다”며 “특히 월남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많은 교회가 세워졌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영락교회였다. 한경직 목사가 세운 영락교회는 피란민을 위한 종합복지관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기독교는 패전국 국민으로 전락한 비참한 상황의 일본인들도 구제했다. 조만식·이윤영이 주도하던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에서는 일본인들이 교회로 피란 왔다”며 “한국 기독교가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군과의 네트워크 덕분이었다. 기독교인들은 미군과 다양한 채널을 갖고 있어,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을 불하받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지만, 동시에 특혜시비도 받게 됐다”고 언급했다.

또 “6.25 전쟁은 한국사회에 사회복지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인들의 구호사업 주 무대가 한국이 됐다. 이를 통해 새로 만들어진 단체가 기독교아동복지회(CCF), 월드비전, 컴패션, 홀트아동복지회 등으로, 후일 세계적 단체로 발전했다”며 “이런 복지활동에 있어 한국인들도 많은 역할을 했다. 구제사업의 주체는 한국인들이었고, 외국 단체들은 이들을 도와 발전되도록 한 것”이라고 밝혔다.

산업화 시대의 기독교 사회복지에 대해선 “당장 어려운 사람들을 구해야 하는 초기 단계에는 긴급구조가 가장 절실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인간의 기본적 복지를 생각하는 차원으로 사회사업이 변화하면서 재활교육과 직업교육과 같은 사회복지 단계로 발전했다”며 “한국교회의 구제사업도 이런 방향으로 변화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에로 변화하면서 진보 진영에서는 노조운동 방향을,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전통 구호사업을 각각 발전시켰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대부분의 사회사업 단체들은 한국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기존 사업을 한국인들에게 인수하고 한국을 떠났다. 월드비전과 컴패션 등은 도움을 받는 단체에서 주는 단체로의 변화를 잘 진행하고 있다”며 “한국 기독교의 사회복지는 사회에 다양한 영향을 줬다. 가나안 농군학교 같은 단체들을 통한 농촌 근대화, 청십자 운동으로 대표되는 의료조합 운동 등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공동학술대회가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모습. ⓒ연구소
박명수 교수는 “한국이 더 발전하면서 사회구호단체들은 구호사업에서 벗어나 복지·개발 사업으로 전환했다. 구호단체들의 대부분은 기독교적 배경을 갖고 있다”며 “과거 한국 기독교는 사회복지의 중심에 있었다. 국가의 힘이 미치지 못했을 때 한국 기독교는 유사정부 역할을 했지만, 국가가 사회복지를 많이 담당하면서 과거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사회사업을 하던 교회가 이제는 정부의 도움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국가의 간섭도 나타난다”고 전했다.

박 교수는 “과거 사회복지기관의 종교활동은 자유로웠다. 선교와 사회복지는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그러나 국가의 세금을 지원받는 단체들이 종교활동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주요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며 “그래서 최근에는 종교활동을 해당 단체 직원들만 하는 것으로 조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 어느 정도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여기서 종교단체들은 너무 쉽게 정체성을 넘겨주고 말았다”고 아쉬워했다.

박 교수는 “비록 국가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그것이 종교활동을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해야 했다. 우선 기독교사회복지단체들은 오랫동안 종교활동을 해 왔고, 이것이 설립 목적이었다. 국가는 사적 단체의 기본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며 “한편으로 사회복지시설은 선택의 대상이다. 그 단체들이 자신의 종교를 밝히고 있다면 이미 알고 선택한 것이므로, 종교 선택의 자유를 제한했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끝으로 그는 “해방 이후 기독교 사회복지는 한국사회의 대표적 구호기관이었다. 국가가 감당하지 못할 때 교회가 이를 감당했고, 그래서 기독교를 유사정부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한국사회는 이런 기독교의 기여를 인정해야 한다”며 “종교행위를 강요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미 종교단체가 설립한 사회복지 기관이라면 강요하지 않는 범주 내에서 종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받아야 한다”고 정리했다.

이후 제1세션에서는 사회복지정보자원연구소 연구논문 발표가 진행됐다. 이은진 교수(서울신대 사회복지학과)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지역사회 적응과 교회의 역할’, 조성희 교수(서울신대 사회복지학과)는 ‘북한이탈 여성을 위한 교회의 역할: 폭력피해와 영성의 영향을 중심으로’를 각각 발표했다. 논찬에는 신혜정 박사(광명종합사회복지관)·박소영 교수(세명대 사회복지학과) 등이 나섰다.

제2세션에서는 ‘6·25 전쟁 시기 유엔 한국민간원조사령부(UNCACK)의 구호활동과 한국정부와의 갈등’을 양준석 교수, ‘외원단체연합회 설립과정과 특성’을 장금현 교수, ‘1960년대 아동복지정책과 아동복지론의 모색’을 윤은순 교수(이상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가 각각 발표했다. 논찬은 조의행 교수(서울신대)와 박종현 박사(연세대), 양용희 교수(삶과죽음연구소)가 각각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