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 두레수도원
▲동두천 두레수도원.
6.25 전쟁이 휴전 회담이 시작되자, 가장 뜨거운 감자가 포로 석방 문제였습니다. 전쟁 포로를 처리함에 있어 자유 송환이냐 강제 송환이냐가 문제였습니다. 유엔군 측은 자유 송환을 주장하였고, 공산군 측은 강제 송환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렇게 갈라진 이유가 포로들 중 북한군 포로들과 중공군 포로들 중에서도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반공 포로들이 전체 포로들 중에서 절반을 넘었기 때문입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중심으로 수용되어 있는 17만 넘는 포로들 중에서 7만 명은 송환을 원하고 10만여 명은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들이었습니다.

휴전 협정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은 투철하였습니다. “국토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휴전이라면 차라리 한국군이 작전 지휘권을 되찾아 독자적으로 북진 통일을 이루겠다.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뇌졸중으로 죽자, 휴전 회담은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의제가 포로 송환 문제였습니다. 휴전 회담이 대한민국 의도와는 다르게 진행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가 놀라는 결단을 단행하였습니다.

바로 ‘반공 포로 석방’이었습니다. 유엔군 관리 아래 있는 전국 7개 포로수용소에 한국군 헌병을 보내어 2만 6,930명의 반공 포로들을 석방시켰습니다.

포로들이 탈출 도중 유엔군의 총격으로 61명이 사망하고 116명이 부상하였습니다. 이 뉴스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세계가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에 찬사를 보내었고, 국민들을 높은 자부심을 품게 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런 결단의 결과로 한미 군사동맹이 체결되게 되었습니다. 이 대통령께서 단독으로라도 휴전을 깨고 북진 통일 하겠노라는 고집을 달래느라,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한미 군사동맹을 맺어 공산군의 재침을 막아 줄테니 휴전 회담에 반대하지 말고 가만히만 있어 달라며 한미 군사동맹을 맺을 것을 합의하였습니다. 이 동맹이 성사되자 이 대통령은 안심하며 다음 같이 말했습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공산주의 침략의 위협에서 벗어나 국가 발전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한미 군사동맹이 되었기에 우리는 경제 개발에 전념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6.25 전쟁에서 겪은 기적 중의 하나가 한미 군사동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