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훈
▲백성훈 목사.
시편 81편


은혜의 주인 되신 성령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은혜의 주인은 성령님입니다. 그 성령님은 우리 삶에 언제나 함께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마가의 다락방에 강림하신 이후 이 땅에 편재하고 계십니다. 편재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뜻으로 이 세상의 모든 시간과 공간에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어떤 공간에는 성령님이 계시고 어떤 공간에는 안 계신다는 공간론으로 성령님을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을 ‘보혜사’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요 14:16), 그리고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요 14:26)는 2가지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가 허락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 은혜를 붙들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은혜를 붙들고 누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시편 81편은 그 방법을 2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우리가 받은 은혜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81편은 유월절 또는 장막절 같은 특별한 절기에 불렀던 노래 가사입니다. 때문에 이 시편을 쓴 목적이 광야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자 함입니다. 시인은 절기에 나팔을 불면서 이 찬양을 부를 것을 선포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강조합니다.

“초하루와 보름과 우리의 명절에 나팔을 불지어다. 이는 이스라엘의 율례요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로다(3-4절)”.

하나님은 왜 절기에 이런 노래를 부르며 예배하라고 명령하셨을까요? 과거 일이지만 광야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으로, 지금 다시 그 은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소모품이 아닙니다. 그 은혜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과거를 추억하며 기억할 때, 은혜가 다시 지금 우리에게 임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은혜를 기억하며 찬양하는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의 은혜를 기억할 때, 아주 구체적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에도 시인이 그 구체적인 사건을 설명합니다. 바로 출애굽기 17장에 기록된 르비딤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 도착했을 때, 몹시 목이 말랐습니다. 그러나 물이 없었습니다. 갈증 때문에 힘들었던 백성들이 모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성경에는 모세와 백성들이 다투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반석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셨습니다.

그 물은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를 먹일 만큼 많고 충분한 양이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곳을 ‘므리바’라고 불렀는데, 시인이 이 므리바를 언급하며 찬양합니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7절)”.

그 감동의 기적은 오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감동으로 전해집니다. 왜냐하면 그 기적의 하나님이 여전히 동일하게 지금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기적들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단지 그분의 섭리는 늘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또 과거와 동일한 방법으로만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뜻은 우리가 다 알지 못하지만 그 섭리는 영원하여서 결국 우리를 광야의 기적과 이 회복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과거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나의 인생에도 과거에 주신 은혜가 있다면 늘 묵상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나에게 주어진 고난과 시험이 있다면 그 은혜를 기억함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지금의 고난과 시험이 내게 갈증과 같은 고통을 주지만, 결국 오늘도 여전히 므리바의 기적은 어떤 방식으로는 내 삶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받은 은혜에 늘 순종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과거에 받은 은혜를 기억함과 동시에, 그 은혜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때의 순종이 지금의 순종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이후 또 불순종합니다. 시인은 그 불순종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11절)”.

그렇다면 어떻게 순종해야 할까요? 우리는 므리바 사건 이후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로 아말렉과의 전쟁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말렉 민족이 쳐들어와서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그때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 전쟁에 승리하게 됩니다.

갈증에 물을 주신 것처럼 전쟁에 승리도 주셨습니다. 이 전쟁의 기적에는 또 다른 승리의 비결이 있었습니다. 바로 순종입니다. 과연 어떤 순종이 있었을까요?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출애굽기 17장 11-12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아주 비상식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과 함께 전투를 하는 동안 모세는 산 위에서 두 팔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팔을 들면 전투에 이기고 팔을 내리면 지는 식입니다.

사실 말이 안 되는 방법입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순종합니다. 팔을 들고 있다 피곤해서 자꾸 팔을 내리게 되니까, 아론과 훌이 옆에서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돕습니다. 아마 필자가 아론과 훌이었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방법에 순종 못하겠다고 불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왜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직전에 므리바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부터 광야에서 있었던 많은 기적들도 있었습니다. 그때의 경험들이 지금 이 말도 안되는 방법에도 순종하게 만든 겁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는 방법을 따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무조건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되어도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방법이 아니어도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순종의 본질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받은 은혜가 있다면,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승리의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강력한 명령을 다시 강조하며 마칩니다. 지금 고난 중에 있습니까? 받았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지금 한국교회는 은혜가 메마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과거 찬란했던 부흥의 시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회개하며 어떻게 순종했었는지 그 역사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 순종의 역사를 이어가야 합니다. 개인의 생활에 대한 염려보다 복음을 외치는 구령의 열정을 더욱 회복해야 합니다.

여행 간다고 예배를 빠지는 세대이지만, 이제 다시 예배로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를 떠나 가나안 성도가 되는 일이 많지만, 다시 교회로 돌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밤새 부르짖던 기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들렀던 지하 기도실이 다시 기도자의 발걸음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렇게 부흥의 시절을 기억하며 순종할 때 한국 교회는 다시 회복할 것입니다.

지금도 시인이 외치는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합시다. 그때의 하나님이 지금도 동일하게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13절)”.

백성훈 목사(김포 이름없는교회)
<시편의 위로>, <시편의 소망>, <팀사역의 원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