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의 ‘빙점’과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예고없이 우리를 덮쳐오는 위기는, 그 빙점이
저마다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걸 보게 한다
소설 <빙점>은 ‘누군가’가 아니라, ‘누구든’

우습게도 바보 같은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걸
불편하고 혼란스런 이야기를 통해 보여준다

빙점
빙점
미우라 아야코 | 최호 | 흥신문화사 | 598쪽 | 14,800원

드라마 <힘쎈 여자 도봉순>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친구에서 애인이 되는 방법은 간단한데, 둘 중 한 사람이 한 걸음 더 다가서는 거야.” 이것이 사랑을 얻는 방법이지만 동시에 용서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것을 소설 『빙점』 속 인물들이 아프게 배운다. 드라마 속 인물들처럼, 그들 역시 늦게 철이 들어간다. 그리고 철이 들면서 자신이 한 실수를 아프게 깨닫는다.

게이조는 병원장이다.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고 산다. 그런데 위기가 왔다. 너그럽고 자상한 남편으로 자부했지만, 아내가 외도한 것 같아 마음이 얼어붙었다.

아내에게 고통을 주려고 살인자의 딸 요코를 입양한다. 이를 알게 된 아내는 요코를 미워하고, 요코는 방황한다. 이들은 진짜 사랑이 뭔지를 아프게 배워간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서로를 조금씩 이해해 가면서.

불륜

젊을 땐 사랑이 전부다. 하지만 그 사랑만 보고 살기엔 인생에 변수도 많고, 그래서 내 뜻대로 되는 게 그리 많지 않다는 걸, 그때는 어찌 알겠는가.

결혼으로 부부가 되었어도 진실한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평생 노력이 필요할 수 있다는 걸, 살다 보면 내가 미울 때도 있고 상대가 미울 때도 있고,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고, 미움도 안으면 따뜻하다는 걸, 그때는 어찌 알겠는가.

내 기억으론 외국 소설 중 『가시나무 새』와 『빙점』이 가장 인기를 누렸다. 앞엣 것은 사랑의 고뇌를 다루고, 뒤엣 것은 사랑과 원죄를 다룬다.

『빙점』은 줄거리만 보면 ‘막장 드라마’다. 심리묘사도 약하고 우연도 많아서 문학적 깊이는 떨어지지만, 이야기가 주는 힘만은 놀랍다.

우선 불륜과 출생의 비밀을 둘러싼 갈등이란 소재 자체가 자극적이다. 1965년 이래 20여 년간, 한국 독자를 사로잡았다.

『빙점』의 인기 비결은 불륜이다. 불륜은 어느 나라에서나 인기가 높다. 프랑스엔 『보바리 부인』, 러시아엔 『안나 카레니나』, 영국엔 『채털리 부인의 사랑』, 한국엔 『자유부인』이 있다.

『빙점』은 이들 소설과 궤를 같이하지만 한 가지가 다르다. 기독교의 원죄를 다룬다. 그것도 노골적으로. 작가는 구원, 죄, 용서 같은 신앙의 문제를 불륜과 출생의 비밀이라는 자극적인 이야기 곳곳에 담아냈다.

이 소설을 추천하지만, 1964년 작품이고 일본 특유의 구시대적 여성관도 있어서 실망할 수 있다. 아내가 무릎을 꿇고 남편 양말을 신겨주는 대목이 나온다.

이런 게 아쉽지만, 등장인물처럼 우리 자신도 입으로 사랑을 말해도 실제론 비겁하다는 걸 느낀다. 그걸 깨달을 때 울컥 하는데, 이런 느낌을 영어로 엑스터시(ecstasy, 자신의 내면에서 신을 발견하고 신과 일체가 되는 특별한 경험)라고 부른다.

입양 상담을 하면서, 게이조는 자신이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는데 놀란다. 자기도 자신의 실상을 몰랐다. 그래서 작가가 제목을 ‘빙점’으로 삼은 것은 신의 한 수다.

빙점은 얼음이 어는 온도이고, 이게 소설에선 미움으로 인해 마음이 얼어붙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어는 온도와 녹는 온도가 같다. 그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작가는 빙점(氷點)이 어떻게 융점(融點)이 되는가를 보여준다.

빙점
▲지난 1967년 국내에서 영화화됐던 <빙점>의 한 장면.
의심

어느 자리에 있어도 빛나는 문장이 있다.

“한겨울에도 우리의 마음 속에 여름을 조금이나마 간직해야 한다.”

소로의 말에서 여름과 겨울은 은유다. 겨울이 어려운 시절을 뜻한다면 여름은 꿈, 열정, 혹은 사랑일 것이다. 이 문장을 게이조에게 적용한다면, 여름은 뭐가 될까. 사랑일 테지만, 질투와 의심은 게이조를 옥죄인다.

아내를 미워하라고. 아내에게 복수하라고. 그래도 된다고.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가 받은 상처보다 내가 준 상처가 더 오래 남는다. 이런 일은 흔하다. 나만 경험 못 했을 뿐이다.

누구나 빙점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게 내 안에 있을 때이다. 그 빙점이 게이조에게 생겼다. 아내 나쓰에는 스물여섯, 예쁘고 사랑스럽다. 그게 문제다. 나쓰에는 연정을 품은 안과의사 무라이 때문에 의도치 않게 남편에게 상처를 준다.

딸 루리코가 실종된 날 있었던 둘만의 수상한 행동, 그리고 목에 생긴 키스 마크. 털어놓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속내를 감춘 탓에 의심은 게이조 마음 속에서 날마다 몸집을 키운다.

시간이 상처를 무디게 해주지만, 어떤 경우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게 빙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에 보면, 재미난 대목이 나온다. 주인공이 TV를 켜놓고 보는 것 같은데, 실제론 마음 속으로 TV와 나 사이를 둘로 나누고 있다. 무료해서지만 나누다 보니 마지막에는 마음 속 공간이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작아졌다.

이게 무슨 말인지 싶겠지만, 『빙점』 속 이야기다. 외도에 대한 의심이 던진 여파는 컸다. 게이조의 마음이 얼어붙었다.

『상실의 시대』에서 작가는 주인공이 처한 울적한 상황을 공간 개념으로 묘사했지만, 『빙점』에서 작가는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생각으로 묘사한다.

게이조는 아내가 예쁘다가도 음탕하게 보이고, 가엽게 여겨지다가도 미워진다. 그것은 꼭 다윗을 바라보는 사울 왕의 눈빛 같다.

게이조는 이걸 친아들 도루에게 들키게 된다. 아버지를 존경했고 어머니를 아름답다고 여겼지만, 한 꺼풀 벗겨보니 아버지는 비열하고 질투가 심했고 어머니는 부정했으며, 여동생은 살인범의 딸이라는 게 드러났다.

게이조는 비로소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쳤지만,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그는 두려운 나머지 성경 구절을 머리에 떠올리려 했지만, 아무 구절도 떠올리지 못했다.

결핍

“내가 눈을 돌릴 때,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좋아.”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속 대사이지만, 나쓰에는 분명히 마음 속으론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소설 곳곳에서 나쓰에가 이런 눈빛을 즐긴다는 걸 보게 된다.

외도의 기회는 어디에나 널려 있다. 외도가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은 절대 없다. 아주 오랫동안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행동으로 옮겨질 뿐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남편과 조금 다툰 날 저녁, 미혜 씨에게 늦은 밤 ‘카톡’이 왔다. “선배 오늘 힘들어 보이던데, 점심 같이 먹어요.” 회사 후배 A였다. A는 미혜에게 유독 살갑고 친절했다. 그래서 둘은 가까워졌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났을 때, 미혜는 잠든 남편 옆에 누워 후배의 카톡을 읽으며 낄낄거리는 자신이 무섭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상황은 다르지만, 이게 나쓰에의 모습이다.

미혜 씨는 후배와의 감정을 깔끔하게 정리했지만, 나쓰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쓰에는 남편을 사랑한다. 아무 불만이 없다.

그런데도 나쓰에는 남편의 부재 중에 무라이를 만났다. 그리고 무라이와 단 둘이 있으면 너무 즐겁다. 그것이 이상했다.

한데 무라이가 볼에 입을 맞추려 하자 완강하게 몸을 비틀어 피했다. 무라이가 거절로 알고 문을 열고 나간다. 나쓰에는 그 순간 일어서며 혼잣말을 한다.

“싫어한 것은 아니었는데. (16쪽)”

나쓰에에게 거절은 교태였고 놀이였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밀당’인 것이다. 남편 아닌 남성의 키스를 받은 것만으로, 나쓰에는 흥분을 했다. 둘이 몰래 만나던 날 딸이 살해되고, 이후 무라이도 결핵에 걸려 병원을 떠난다.

이후 7년쯤 지나 무라이가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다. 안과의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쓰에는 무라이와의 재회를 알고, 날마다 피부를 공들여 매만진다(254쪽).

후에 보면 나쓰에는 아들 친구, 기다하라에게도 끌린다. 20대 기다하라의 청년다운 싱그러움에 끌린 것이다. 그런 기다하라가 자신이 아닌 요코에게 편지를 보낸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쓰에는 자기가 무시당하고 모욕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삿포로의 다방에서 기다하라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때도 나쓰에는 모욕으로 여긴다. 딸이 음독을 할 때도 비슷하다. 나쓰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대로 죽어 버린다면 남들은 나를 뭐라고 할까.’
나쓰에는 그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590쪽)”

나쓰에는 여러모로 아쉬운 인물이다. 소설이 종결되는 지점에서도 나쓰에는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나쓰에에겐 자신이 누구보다 중요하고, 늘 누군가 자기를 바라보는 눈길을 즐기고 싶어한다. 무라이 때도 그랬고 기다하라 때도 마찬가지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건, 나쓰에가 내적으로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나쓰에는 본인의 결핍을 무언가로 채우고 싶어하는데, 그것이 남자의 눈길이다.

빙점
▲1981년 국내에서 영화로 만들어진 <빙점>의 한 장면.
구원

게이조도 아쉽긴 마찬가지다. 그래도 나쓰에보다 나은 것은, 자신의 속마음을 조금은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신이 한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바꾸려고 애를 쓴다. 그는 신앙인이 아닌데도, 성경을 읽고 우연히 만난 선교사의 자기 희생을 보고 놀라워한다. 마음이 힘들어지자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교회를 찾아가기도 한다.

소설 끝에 보면 음독한 요코의 얼굴이 주사를 꽂자 괴로운 듯 일그러진다. 약하지만 맥박도 잡혔다. 살아날 가망이 생긴 것이다. 그가 깨어나면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자신을 미워했던 나쓰에도 바뀔 것이고, 자신에게 무덤덤했던 게이조도 바뀔 것이다. 이젠 가족 모두를 붙들고 있던 오해와 미움도 다 털어낼 수 있기에, 요코는 정말 상상으로도 꿈꾸지 못했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게 구원이다.

소설에서 작가는 노골적일 정도로 기독교를 언급한다. 하나님이란 표현도 등장하고, 크리스마스 선물은 성경이 좋다는 말도 나온다(253, 306쪽).

필자가 볼 땐 작가 미우라 아야코가 작정을 하고 쓴 기독교 소설인데도, 기독교 신자 수가 1퍼센트도 안 되는 일본에서 이런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소설에서 게이조는 조금씩 신앙에 마음을 열어간다. 그게 어쩌면 일본인 독자의 모습일 것이다.

책 속 한 문장

요코는 딸이다. 입양되었지만 소수만 알고 있다. 다들 쉬쉬 하고 감췄지만, 요코는 어린 나이에 눈치챈다. 엄마인 나쓰에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차가워지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학예회 때 입어야 할 옷을 만들어주지 않고, 학급비를 주지 않았고, 졸업식 답사를 백지로 바꾸고, 편지를 반송한다. 처음엔 실수인 줄 알았지만, 아니란 걸 눈치챈다.

요코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걸 알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어렸지만 자신을 지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자신이 양부모의 딸을 죽인 살인자의 딸이란 말을 듣자 절망한다. 그렇게 잘 크고 잘 참던 아이가 말이 없다. 그리곤 삶을 끝내려고 제방으로 기어 올라간다. 그 모습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요코는 기어오르듯이 제방으로 올라갔다. 제방으로 올라가서 뒤돌아보니 요코의 발자국이 눈 위에 줄지어 있었다. 곧게 걸어온 줄 알았는데 발자국이 흩어져 있었다. 요코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길을 돌아다보았다. (583쪽)”

요코는 고3이다. 열아홉 살이지만, 만으론 열일곱 살이다. 왜 요코는 삶을 포기하려 할까. 슬럼프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

슬럼프는 언제나 열심히 하는 선수가 빠진다.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있는 힘을 다해 달리고 있을 때는, 작은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날 힘이 없을 수 있다. 그게 요코의 모습이었다.

이정일
▲이정일 목사는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로 단숨에 주목을 받았다. ⓒ이대웅 기자
이정일 교수
미국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석사를 받았다. 신학을 하기 전엔 영문학을 공부해 문학박사를 받았다. 박사 후 뉴욕주립대 영문과에서 미국 현대시를, 세계문학연구소에서 제3세계 작가들을 연구했다. 대학에서 세계문학과 영어를 가르치며 전방 포병대대 교회에서 군(軍) 선교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