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는 자’는 생명(eternal life)을 가졌다(요 6:54)”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수혈받는 자는 살아났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이는 아마 ‘피에 생명이 있다(레 17:11)’는 성경 말씀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그 말씀의 정확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이다. 성경에서 ‘피’는 ‘죽음’을 상정(想定)하기 때문이다. 피가 몸 속에 있을 땐 ‘생명’이지만, 밖으로 분출될 땐 ‘죽음’이다.

그러면 그들은 ‘생명을 얻으려면 생명을 마셔야지, 왜 죽음을 마시느냐’며 또 의구심을 표한다. 죄인에게 ‘죽음’이 필요한 것은 그들이 지불해야 할 ‘죄 삯(the wages of sin, 롬 6:23)’때문이다. 그들에겐 그것이 없기에, 밖으로부터 그것을 가져와야 한다.

성경이 시종일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성경에서는 ‘죽음’만큼이나 ‘생명’도 많이 말한다. 실제로 예수님도 많은 곳에서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마 20:28, 요 10:15)’고도 말씀했고, ‘생명을 주려 왔다(요 10:10; 6:63; 20:31)’고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가 말한 대부분의 ‘생명(life)’은 죽음을 지향했다. 곧 그것은 ‘죄 삯 사망(롬 6:23)’을 지불하기 위한 ‘생명(딤전 1:10, 요일 1:2; 5:11)’을 의미했다. ‘생명’과 ‘사망’에 대한 그의 어법이 대개 다 그랬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요 6:33, 50).”

표면상으론 ‘자신의 생명을 준다’는 것으로 보이지만, 행간적 의미는 ‘자신의 죽음을 준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먹는다’는 ‘그의 죽음을 먹는다’이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요 5:26)”. 여기서도 ‘아들에게 있게 하신 생명’은 ‘아들의 죽음’을 두고 한 말이다.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을 통해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따라서 ‘아버지의 생명’을 취하려면, ‘아들의 죽음’을 취해야 한다. ‘생명’을 취하려고 하나님께 직접 나가는 것은 대제사장이 피 뿌림을 받지 않고 지성소로 직행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생명’이 아닌 ‘죽음’에로의 진입이다.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히 9:7)”.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의 정확한 의미는 ‘죽음의 요구(롬 6:23)를 벗어남’, 곧 ‘구원’이다. 성경이 ‘생명’과 ‘구원’을 상호 교호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5)”,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막 5:23)”,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욥 33:28)”.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취해 ‘죄 삯 죽음’의 요구에서 벗어나는 것이 ‘생명’이고 ‘구원’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죽음’ 없인 ‘생명(구원)’이 없다.

사도 베드로가 ‘구원’을 ‘피뿌림 받는 것(벧전 1:2)’이라고 한 것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덧입어 죽음에서 벗어난다(구원받는다)는 뜻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피를 마심’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마심’이고, 그로 인해 더 이상 ‘죄삯 사망’의 요구를 받지 않아 ‘생명(구원)’을 얻는다는 뜻이다.

다음 구절들에 나오는 ‘살과 피’, ‘생명’도 같은 어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인류의 죽음은 ‘죄의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 삯’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계명을 받은 후, 그가 그것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아담과 그의 후손은 다 죽었다(롬 5:15). 그러나 그 죽음은 ‘죄 삯(the wages of sin)’이 아닌 ‘죄의 결과(result of sin)’였다(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2번)

따라서 그들이 분명 죽었음에도, 지불해야 할 ‘죄삯 사망’을 여전히 요구받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는 ‘죄로 죽은 죽음’은 ‘부정한 죽음’이라, 죽는 순간 이미 그것은 ‘죄 삯이 될 자격’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겐 ‘죄 삯(the wages of sin)’이 될 ‘또 다른 죽음’을 필요로 했다. 곧 ‘죄 없는 의로운 죽음(행 7:52, 눅 23:41)’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것이다.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이것은 이미 구약 시대 이스라엘이 ‘정결한 짐승의 피’를 바치는 것을 통해 오랫동안 학습해 왔다. 그 ‘정결한 짐승의 피’는 ‘부정한 죄인의 죽음’을 대신하는 상징성을 띠었다(히 10:1-9).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가 속전을 바치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드려졌고,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피를 흘렸을 때 짐승 제사는 종식됐다(히 10:2, 12).

이렇게 그리스도가 죄인을 위해 ‘의로운 죽음’을 죽었으니, 그들은 마땅히 ‘그의 죽음’을 ‘자기 죄 삯’으로 취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자기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면 자신들을 위해 죽은 것이 명약관화하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그의 ‘고귀한 죽음’을 헛되게 할 뿐더러(갈 2:21), 그의 죽음을 더러운 ‘죄인의 죽음’으로 만드는 신성모독(blasphemy)이다.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9)”는 ‘불신’이 초래하는 ‘지옥 형벌’을 뜻한다.

사도 바울은 이를 더욱 명료화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

죄인이 지불해야 할 ‘죄 삯(the wages of sin)’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나의 ‘의로운 행위’도, ‘죄의 결과’로 온 ‘극심한 고통과 비참’도 ‘죄 삯’이 못된다. 그것들은 내가 지불해야 할 ‘죄 삯’을 단 한 푼도 상쇄하지 못한다.

심지어 불신자들이 당하는 ‘지옥의 형벌’까지도 그렇다. ‘지옥이 영원하다’는 것은 그 안에서 죄인들이 당하는 고통과 저주가 전혀 ‘죄 삯’을 상쇄하지 못한다는 증거다. (만일 그들의 고통과 비참이 ‘죄 삯’이 된다면 지옥의 고통이 멈출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죄 삯’,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지옥의 형벌’을 면하게 한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6)”.

지옥에 떨어지기 전, “살아서 예수의 죽음을 ‘자기의 죄 삯으로 취하는 자’는 죽음을 직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진 자에게만 ‘생명’이 있고, 그에게 죽음이 범접치 못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