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박 선생
▲서울 소재 한국순교자의소리 사무실에서 순교자 연대표를 살펴보며 남편을 기억하는 박 선생.
한국순교자의소리(이하 한국VOM)는 최근 북한 교도소에서 예수님을 만난 탈북민의 간증을 소개했다.

2008년, 박 선생은 돈을 좀 더 벌기 위해 남한 DVD를 팔다가 북한 당국에 잡혔다. 그 때 남편 김 선생은 중국으로 도주했고, 당에서 일하던 다른 가족들은 박 선생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사건 담당자들에게 뇌물을 주었다(보안상 이들의 이름은 생략했다).

남편 김 선생은 중국에서 만난 한 가족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듣게 됐다. 박 선생이 석방되자 북한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자신의 가족에게 하나님과 성경에 관해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식사할 때마다 주님께 감사를 드렸다. 박 선생은 사역자에게 “그때 나는 남편이 미쳤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 선생은 자신의 담대한 믿음으로 인해 온 가족이 가혹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최소 20명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다. 박 선생은 “내 사건이 겨우 종결됐는데 왜 또 식구들을 위험에 빠뜨리려고 하는지, 당시에는 남편이 너무 원망스러웠다”고 말했다.

결국 누군가가 김 선생의 활동을 당국에 신고했고, 어느 날 밤, 당국자들이 부부의 집에 찾아와 두 사람을 체포했다. 김 선생은 곧바로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 박 선생은 남편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 선생은 남편이 어떻게 죽었는지, 누가 남편을 신고했는지도 결코 알 수 없었다.

두 부부가 체포되었을 당시, 박 선생의 삼촌이 북한 보위부 요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박 선생이 남편의 기독교 신앙 때문에 강제수용소에 보내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의 조카가 노동교화소로 가도록 도와 주었다.

노동교화소에 있은 지 6년이 넘었을 때, 마침내 박 선생은 석방되었다. 그녀는 “혹독한 환경에서 겨우 살아남았지만, 더 열악한 상황을 맞이했을 수도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석방 이후 탈북을 결심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머문 지 한 달 만에 함께하던 탈북민 일행이 경찰에 신고를 당하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경찰에 끌려갔고, 신분증이 없었기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됐다. 감옥에 있는 동안 박 선생은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 구금되어 있던 조선족 여성을 많이 만났다.

그녀는 “우리가 다시 북송되고, 교회나 기독교를 접했다는 사실이 발각됐다면, 우린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족 여성들은 저와 함께 지냈던 한 달 동안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많았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서 조선족 기독교인 여성이 치약을 손에 쥐고 감방 벽에 ‘예수 그리스도’라고 썼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처음 본 박 선생이 그 뜻을 묻자, 그녀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시작했다.

이후 석방된 박 선생은 한국에 있는 조카들에게 연락했고, 그들은 브로커를 주선해 박 선생이 한국에 건너오도록 도왔다. 그녀는 한국에서 다른 탈북민을 통해 순교자의소리에 대해 알게 되었고, 곧이어 순교자의소리가 운영하는 유티(Underground Technology·기초 제자훈련 학교)에 등록했다.

순교자의소리 현숙 폴리(Hyun Sook Foley) 대표에 따르면, 유티학교는 1년 과정의 프로그램으로, 북한어로 된 조선어 성경을 사용하여 탈북민들이 기독교를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북한 지하교회 방식으로 훈련하고 있다.

현숙 폴리 대표는 “박 선생은 ‘남편이 걸었던 길을 걷고 싶다. 남편처럼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라고 고백했다”고 전했다.

박 선생은 “남편이 처음 기독교 신앙을 전해주었을 때 그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당시 나는 남편과 똑같은 눈으로 보지 못했다. 그때 내가 지금처럼 영적인 눈을 가졌더라면… 그때 내 관심은 가족을 위해 돈을 벌고 사랑하는 조국에 충성하는 것밖에 없었다”고 했다.

남편이 기쁨으로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전해준 지 10년이 넘은 지금, 박 선생의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