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 에덴동산
▲루카스 크라나흐의 작품 <에덴 동산>.
어학 사전에서는 사이를 ‘어느 때에서 다른 한 때까지의 동안’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눈 깜짝할 사이, 그들의 사이의 비밀, 나뭇잎 사이 등에서 사용됩니다. 또 공간이라 함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곳’을 말합니다.

어렸을 때 일본 말을 흉내내면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을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유머성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유머 감각이 뛰어난 친구가 “비사이로 막가상”이라고 대답을 하며, 맞혔다는 즐거움에 크게 소리치며 기뻐합니다.

함께 있던 친구들은 예상 밖의 대답에 놀라 그 친구를 대견해 하면서, 함께 웃으며 또 문제를 내기도 했던 추억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특히 요즘처럼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영상을 보노라면, 마치 신비에 가까운 장면을 수없이 목격합니다. 특히 스포츠 같은 경우는 실점을 하지 않기 위해 느린 영상을 통해 심판의 실수든, 선수의 실수든 느린 영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합니다.

인간들도 자신의 실수에 대해 눈과 마음으로 느린 영상을 볼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며 서로가 협동하며 죄짓는 일과 악행은 발생하지 않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무거운 요즘 같은 때, 불청객인 봄장마까지 겹쳐 세상 분위기가 어둡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그래도 떨어지는 빗줄기를 유심히 바라보며, 그 빗줄기 사이사이 많은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특히 비에 젖고 날리는 거센 바람에 못 이겨 떨어지는 꽃잎들이 떨어지는 장면을 아주 느린 영상으로 보더라도, 꽃잎들 사이사이 수없이 많은 공간이 있음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가깝고도 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공간마다 약속하신 사랑을 충만하게 채워주시면서 우리 곁에 늘 계심을, 의심치 말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들과 세상 사이,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분명히 현존하고 계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우리 곁에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이 신비는 느린 영상으로도 볼 수 없는 영역이고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이 신비를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그리고 인간으로써 알 수 있는 내용도 아니면서, 다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주신 은총으로 온갖 지혜와 총명 안에서 당신의 신비를 알게 해주셨다(엡 1:8)”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성령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대언하는 주의 종들을 통해 이를 믿고 받아들이겠다는 우리 신앙인의 고백이요 신실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실제 삶에서 사랑하고 헤어지고 깨어지고 실수하며, 다시 하나 되는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조금씩 체험하고 혹은 확인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받아들이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결과는 과연 무엇일까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사이와 공간’의 자리로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많은 풍경들 중 제일 아름다운 풍경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라는 노래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셨던 그 사이와 공간의 자리로 되돌아감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돌아가야 할 제자리는 과연 어디일까요? 우리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처음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더라도 미래 돌아갈 곳 역시 하나님께서 머물고 계신 사이와 공간입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성부 하나님을 제대로 보여주신 성자 예수님의 가르침을 성령의 도움으로 잘 알아듣고 행동으로 실천한 후, 장차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우리의 모습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이 아닐까요?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왕의 사명을 잊은 채, 아들 요나단의 친구인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사울 왕 자신의 사위로 삼아놓고도 그를 의심했던 탐욕적 인생은 실패한 인생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 하나님 보시기에 겸손한 자로서 후광을 얻었지만, 의심과 탐욕 그리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우상을 의지하면서 씻지 못할 죄로 인해 멸망당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우리 신앙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이 나라에서 정치하는 분들과 사회를 리드해 가시는 분들, 그리고 신앙인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사울의 이야기를 그저 건성으로만 듣지 말고, 사이와 공간을 잘 활용하여 그의 실패됨을 철저히 분석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살 수 있는 것이 있고, 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 해서, 믿음을 돈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며 주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자가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잘 활용하여 크리스천으로서의 성공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와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 관계라 함은, 말 그대로 주변 이웃들과의 관계도 포함됩니다.

그 관계에서는 이웃들과 약속, 그리고 신뢰,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관계는 멀어지며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정직해야 하고, 공공질서를 지키며 공명정대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생활 속에서 늘 이런 약속이 지켜진다면, 이 땅에 복음은 아름답게 이루어져 나가고, 세상은 더욱 아름다운 풍경으로 옮겨 갈 것이며, 사이와 공간이 주는 신비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