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 교제 펠로우십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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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개인주의가 짙어지는 사회와 일상 속에서, 이제 부부도 서로 깊은 교제를 나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손에 스마트폰을 붙들고, 배우자와 함께 있지만 따로 시간을 보내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예전엔 사람들과 만나 함께 무언가를 같이 했다면, 이제는 함께 하더라도 각자 따로 집에서 이름도 모르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사회 풍조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함께 모여 ‘교제’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점점 그 ‘교제’의 진정한 의미를 기억하지 못한 채, 하나님께서 성도의 교제 가운데 베푸시는 은혜를 풍성히 경험하지 못하게 되는, 참 아쉬운 현실입니다.

교회가 함께 모일 때 ‘관중’이 되어 제공되는 여러 서비스를 잘 받고 집으로 돌아가 개인 시간을 보내는 성도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수년이 지나도 성도와 깊은 교제를 나누지 못하고 형식적인 인사만 나눈 채, 개인의 삶 속에 다른 지체의 삶과 연결 지점을 전혀 갖지 않음에도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지체들이 서로 유기적인 연합과 나눔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 속에 나그네로 살아가기에, 더 외롭고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 땅에 눈을 고정하고 세상의 기준을 따라 살아간다면,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눈을 고정하고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위대한 저항을 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함께 그 일을 하는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연합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 연합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교제’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이 험악한 세상 속에서 아이를 성경적으로 잘 양육할 수 있을까요? 누구에게 물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성도가 바른 기준을 가지고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각자 지고 있는 짐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죄와의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습관에서 어떻게 해방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새로운 습관을 어떻게 입을 수 있을까요? 성경이 이 모든 질문에 답을 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가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할 때 겪는 모든 은혜로운 일들을 통해, 다른 성도의 실질적인 필요를 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이기를 힘쓰라”는 권면과 함께, 다음과 같이 ‘회중 모임’의 목적을 설명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는 성도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주가 오시는 날이 가까이 올수록,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쳐야 하는 자선단체이거나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공동체에 좋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일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각 성도를 어둠 가운데 빛으로 불러내신 목적 즉 구원의 목적과 직결되는 일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그리스도는 자기를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는데, 그 계명은 다름 아닌 “서로 사랑하라”입니다(요 13:34).

그래서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요일 2:11)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 곧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합니다(요일 3:15).

교회가 함께 모일 때 분명한 목적이 있으니, 이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뜻에 따라 서로 사랑하고 선한 일을 열심히 행하는 주의 백성이 되자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제의 목적입니다.

성도가 만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성도의 교제 가운데 두신 이 목적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이와 관련된 칼럼입니다. 이 글을 참고하세요).

히브리서 기자만 이렇게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라(살전 5:11)”.

‘피차(one another)’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히브리서 기자가 ‘서로’라고 말한 것처럼 성도의 교제는 한 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입니다. 성도를 권면하고 성도의 덕(유익)을 추구하는 것은 목사처럼 직분을 가지고 섬기는 성도나 특정한 성도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 받은 은사에 따라 더 많은 필요를 보고 그 필요를 채우는 성도가 있겠지만, 모든 성도는 서로의 덕을 세우고 권면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제 가운데 어떤 일로 성도의 유익을 구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8)”.

데살로니가 교회에 “자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데리고 가신 성도를 의미합니다.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큰 슬픔과 상실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적인 고통은 영적인 질병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주를 향한 사랑이 식어집니다. 그럴 때 성도는 교제를 통하여 위로할 수 있습니다.

특히 바울이 말한 ‘위로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자는 자들’에게 임할 부활의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인만이 줄 수 있는 위로의 메시지가 아닙니까?

죽은 자에게 다시 살아나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고 영원토록 주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이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서로 위로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세상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 짊어지고 있는 짐들을 서로 불쌍히 여기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정한 위로를 전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감당할 만한 시험을 허락하시고 피할 길을 내시어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는 진리의 메시지로(고전 10:13), 주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위로의 메시지로(롬 8:28),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확신의 메시지로(롬 8:39), 우리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참된 위로를 성도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교제’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성도에게 위로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죄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 5:16)”.

야고보는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병은 육체의 질병을 말할 수 있지만, ‘영혼의 질병’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전 구절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기도가 모든 육체의 질병에서 구원(치유)받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낫게도 하시고 병들게도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죄를 범하였을지라도”라는 말에서, 우리는 이 질병이 죄와 관련 있을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서로 죄를 고백하라”고 명령한 것은 “병이 낫기를 위해 기도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서로의 삶 가운데 죄로 병들지 않도록 죄를 자백하고 그것에서 사하심을 입을 수 있도록, 구원(회복)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명령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성도가 함께 교제할 때 자신의 죄를 꺼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잘못하면 판단과 정죄의 문제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서로 가지고 있는 문제를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성도와 함께 나누고, 서로의 책임자가 되어 주는 것(accountable counselor)이 필요합니다.

또한 직접 죄를 범한 성도가 있다면 그에게 죄를 자백하고 함께 기도로 화해를 이루는 과정이 ‘교제’ 가운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솔로몬의 이 지혜로운 말을 들어보십시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9-12)”.

교회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어둠이 가득하고 죄가 만연한 세상 속에서 옛 자아가 원하는 욕망과 싸우면서 맞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 성도를 불러 교회로 세우셨고, 여러 지체를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체 사이에 ‘교제’라는 놀라운 은혜의 방편을 주셔서 교회가 감당하는 하나님 영광 드러내는 위대한 일을 능히 해낼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제’하며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서로에게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전함으로 참된 위로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실수와 잘못을 고백하고 서로 붙들어 주어 좋은 상을 함께 이어받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것을 해내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교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풍성하고 아름다운 ‘교제’를 누릴 때, 하나님은 그 ‘교제’를 통하여 당신의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 가운데 온전히 높이는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교제’합시다. 참된 의미를 잊지 말고, 그 위대한 가치를 기억하며 함께 ‘교제’합시다.

조정의
▲조정의 목사.
조정의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유평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