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진
▲정교진 박사(고려대 북한통일연구센터).
작금의 최고 화두, 종전선언 문제

판문점 선언 3주년을 즈음하여 종전선언 문제가 다시 재점화되었다. 여건 일각에서는 북미, 남북 간의 교착상태에 대한 돌파구로 문 정부를 향해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하면서, 북미 핵 문제의 중재자가 아닌 한반도 평화문제의 주체자, 당사자로의 역할 전환을 촉구했다. 동시에 비핵화 우선론은 실패한 정책이라고 비판의 강도를 높이며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으로의 전면 수정을 주문했다. 더 나아가 4·27판문점 선언과 9·19남북군사합의 이행 차원으로 개성공단 재개 및 금강산 관광 정상화 선언도 강력히 요구했다.

때를 같이하여, 미국 연방하원에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 등을 요구하는 내용의 법안 발의가 임박했다는 소식도 들리고 있다. 미 하원 외교위원회 소속 브래드 셔먼(Brad Sherman) 의원이 이 같은 내용의 법안 발의를 준비 중이라는 것이다. 이 법안에는 종전선언 관련 내용도 포함되었다고 하며 개성공단 문제도 다뤄질 여지가 있다고 한다. 셔먼 의원은 지난달 한인 유권자 단체 미주민주참여포럼(KAPAC)이 개최한 행사에서 이 같은 내용을 언급한 바 있고, 이런 법안이 발의되는 데에 KAPAC의 역할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이 단체는 며칠 전 대통령 직속 헌법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와 업무협약을 체결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민주평통은 ‘공공외교’ 차원에서 해외 시민토론회, 간담회 등에 지원을 해 주고 있다. 민주평통은 홈페이지에 ‘한반도 평화선언’ 온라인 서명란을 만들어 놓기까지 했다.

작년 6·15남북공동선언 20주년 당시에도, 범여권 173명의 국회의원이 ‘한반도 종전선언 촉구 결의안’을 발의했고 당 차원에서 미 하원의원들에게 ‘한국전쟁 종전선언 결의안’ 서명을 받았었다. 이번에 법안 발의를 준비 중인 셔먼 의원도 이 결의안에 서명한 인사일 것이다. 이처럼, 최근까지 여권의 화두(talking point)는 종전선언이다. 문 정부도 5월 하순에 있을 한미정상회담에 앞서 미 행정부에 ‘싱가포르 선언’ 이행과 비핵화의 단계적-점진적 접근 및 상징적 의미의 종전선언을 제안했다. 두 번째의 단계적 접근은 미국이 내세우고 있는 선 비핵화 정책을 수정하라는 주문이자, 선 종전선언을 촉구하는 것이다.

북한 핵 보유 정당성에서 출발하는 종전선언 주장

종전선언을 주장하는 이들의 공통된 인식은 1953년의 정전협정이 남한의 의사는 배제된 채, 미국의 주도하에 체결되었다는 것이며 분단의 책임을 미국에 돌린다. 가장 전면에서 활동하는 어느 인사의 책을 검토해 보니, ‘미국의 군사적 일방주의’라며 더 노골적이다. 그는 해방 이후 미 군정 시기와 주한미군의 주둔도 같은 시각으로 본다. 주한미군 철수를 기정사실화하며 주한미군이 철수해도 절대로 전쟁(군사적 충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한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절약 차원에서라도 주한미군은 철수해야 한다고 강변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북한이 핵을 가지려는 이유에 대해 전쟁용이 아닌 미국의 ‘핵 선제공격’(그대로 옮김)을 억제하기 위한 방어용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이 미국의 군사적 핵 위협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므로 미국의 핵 위협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핵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북한의 핵 보유 정당성 발언이다.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읊조리는 것이다. 이 인사를 비롯해서 북한의 핵 보유 정당성을 내세우는 이들은 북한의 핵 개발 시기를 1990년대 초로 설정한다. 즉, 1차 북핵 위기 시기(1993년) 전후부터 본다.

북한 핵 개발 착수, 1950년대부터

북한의 핵 개발 시작은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일반적으로 ‘북한의 핵 개발 60년사’로 통용되고 있다. 북한 김일성은 6·25전쟁 직후부터 핵 개발에 착수했다. 1954년에 인민군 내에 ‘핵무기 방위부문’을 설치했고 1956년에 30여 명의 물리학자를 소련의 ‘드부나 핵 연구소’에 파견하였다. 1959년에는 조-소 원자력 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때부터가 북한 핵 개발의 공식적 출발로 평가된다. 1962년에는 ‘국방·경제 병진 노선’을 선언하면서 같은 해에 영변 지역에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김일성대학교, 김책공과대학에 핵 연구 부문을 창설해 핵 개발 요원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1965년에는 영변에 소형 연구용 원자로 2MWe급 IRT-2000을 소련으로부터 도입했는데, 이때부터 김일성은 핵 보유에 대해 공식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노동당 대회에서 “불원간 핵을 보유할 수 있다”라고 했고 1967년, 군지휘관 회의에서는 “우리도 원자탄을 생산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1970년에는 당시 부총리가 북한을 방문한 일본 사회과학 대표단에 “1972년까지 원폭 제조에 노력하겠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핵 개발 감추기 위한 연막전술 및 제 발등 찍기

이후, 북한은 핵 개발 사실을 감추고 연막전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유엔에서 NPT(핵확산방지조약, Non Proliferation Treaty, 1968년 7월 1일 체결)가 1970년에 비준 완료되어 효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NPT 핵심 조항은 1967년 1월 1일 기준으로 비핵국가는 핵 개발을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NPT에서 핵보유국으로 인정된 국가는 미국(1945년 핵 개발 성공), 소련(1949년), 영국(1952년), 프랑스(1960년), 중국(1964년) 등 5개국이다. 인도는 1962년에 핵 개발을 시작했지만, NPT가 비준(1970년)될 때까지 완료하지 못하다가 1974년에 성공해서 현재까지 NPT에서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파키스탄(1998년), 이스라엘(1980년대 추정)과 함께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식될 뿐이다.

북한은 핵 개발을 계속해서 추진하면서 이를 감추려고 1974년에 IAEA(국제원자력기구)에 가입했다. 1970년대 중·후반, 남한의 박정희 정부가 국제사회로부터 핵 개발 의혹을 받자, 북한은 대내외적으로 남한의 반핵운동에 앞장섰다. 급기야, 북한은 1985년에 NPT에 가입했다. 결과적으로 북한이 둔 최대의 악수(惡手)이다.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꼴이 되었다. 왜냐하면, NPT 가입국은 18개월 이내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핵안전협정체결’을 하고 핵 사찰을 받아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핵안전협정체결을 하지 않고 핵사찰을 거부하고 버티다가, 결국 미국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미국은 1989년 1월, 북한을 A급 감시지역으로 설정하고 군사 정찰위성의 정찰 활동을 배나 증강시켰다. 그해 7월에는 영변 지역에 핵폭탄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재처리시설이 있다고 발표하게 된다. 다음 해인 1990년에 미국은 이를 공론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상업용 정찰위성으로 촬영한 영변 핵시설 사진을 일본의 한 대학에 판독하게 하고 그 결과, 북한이 건조 중인 원자력발전소, 핵연료 재처리 시설이 공개되었다. 북한이 핵 개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연막전술을 펴면서 남한에 대해 반핵을 외치던 와중에, 북한은 영변지역에 5MWe 실험용 원자로(흑연감속로) 착공(1980년)했다. 흑연감속로는 고농도 플루토늄을 추출하는데 특화된 원자로이다. 마각이 드러나면서 국제사회의 북한에 대한 핵 억지(抑止)가 시작되었고 결국, 1993년에 1차 북핵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10년 넘게 북핵 문제로 국제사회와 줄다리기를 하던 북한은 2006년에 제1차 핵실험을 감행하고 10년에 걸쳐 여섯 차례나 핵실험을 했다. 북한은 2017년 9월에 6차 핵실험을 마치고 11월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을 발사한 후 핵 무력을 완성했다고 천명했다. 2018년 1월 김정은의 신년사에 이어 4월 당 전원회의에서 핵보유국임을 선언하면서 핵 폐기가 아닌 핵 동결을 내세웠던 것이다. 기존의 핵무기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북한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는 최대 60대로 추정된다.

핵 인질이 된 현실외면, 종전선언을 내세우는 진짜 속내

핵 인질이 되어버린 위협 앞에 주한미군 철수를 염두에 둔 종전선언을 외치는 이들의 진짜 속내는 무엇인가. 만일 북한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면 정말 끔찍한 일이다. 북한은 작년 6·15공동선언 이후부터 ‘종전선언’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내놓고 있는데, 당 기관지인 노동신문 사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다. “정전은 평화가 아니다 이 땅에 제국주의와 계급적 원쑤들이 남아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해이될 수 없다.” 이 내용은 종전선언의 목적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구호인데, 여기서 북한이 설정하는 평화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남한 땅에서의 주한미군 철수를 최종 목표지점으로 두고 있는 것인가. 필자가 볼 때는 아니다. 그 다음 목표지점을 분명히 설정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남한 내 불순세력(계급적 원쑤) 척결이다. 계급적 원수는 이 정부 들어 너무나 자주 듣고 있는 적폐세력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이처럼 북한은 평화의 시기를 남조선의 해방과 더불어 불순세력 제거까지 설정하고 있다.

작년부터 북한은 김정은을 평화의 수호자라고 대대적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김정은이 남조선 해방의 주체이자 (적화) 통일된 국가의 지도자라는 것이다. 이 같은 전략적 목표를 갖고 핵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북한에 종전선언이라는 선물을 안긴다면, 그것은 국가안보의 울타리를 다 걷어내는 행위가 될 것이다. 상존하는 북핵위협 가운데, 종전선언 촉구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종전선언을 하게 되면, 휴전이 종결되는 것이기에 당장 유엔군 사령부는 해체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주한미군 철수도 실행단계에 접어들 수 있다. 안보의 구멍이 아니라 안보의 둑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의 김정은이 가장 원하는 시나리오다. 북한에 보조를 맞추며 이 시나리오를 평화라는 이름으로 각색해 무대에 올리려고 애쓰는 자들, 그들의 주적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다. 문 정부를 향해 주체자-당사자가 되라는 것은 북한 편에서 함께 대놓고 싸우라는 주문이다. 문 정부도 이미 이런 패턴으로 가고 있다.

매우 시급한 바른 통일교육

앞서 기술했던, “북한은 절대로 핵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장담한 인사는 미국의 선재 핵 공격에 대해서는 그 가능성을 크게 열어두고 있다. 그의 책(우리 함께 살 수 있을까?) 전체를 살펴보면, 반제국주의적 면모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북한의 3대 세습도 이런 측면에서 접근하여, 북한 주민들이 선거와 투표를 통해 김정은을 직접 뽑았다고 제시한다. 북한 주민들이 볼 때 김정은이야말로, 김일성과 김정일을 이은 반제·자주의 가치를 계승할 지도자로 가장 적격이었다는 것이다. 100% 가까운 투표율도 자발적 참여로의 민주주의 방식이라고 포장한다. 북한 지도자들에 대한 미화는 그 도를 넘었고 조선노동당에 대해서도 칭찬 일색이다. 이런 책이 버젓이 나온 것도 충격인데,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와 같은 내용의 책들이 서울시 초중고생들에게 추천하는 통일도서에 선정되어 서울시 교육청이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안보가 사정없이 무너지고 있다. 북한 김정은 정권을 추종하는 세력이 판을 치고 있다. 3년 전 대학생을 주축으로 ‘김정은위인맞이환영단’이 결성된 것도 절대로 우연히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절감하게 된다. 이제 이들은 청년들뿐만 아니라 청소년, 어린아이들까지 북한친위대로 양성하려고 그 마수를 뻗치고 있다. ‘북맹 탈출’(컴맹에서 차용)이라는 그럴싸한 슬로건을 걸고 말이다. 북한 정권의 실체를 올바로 알리는 통일 교육이 참으로 시급한 때이다.

이글은 WORLDVIEW 6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정교진 박사(고려대 북한통일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