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총독 빌라도, 대제사장 가야바, 저항군 유다
세 주인공이 예수님으로 얼키고설키는 이해관계
예수님 조연으로 밀어내 오히려 부각시키는 방식
가상 인물인 ‘밀정’ 갈렙의 갈등과 정보로 긴장감

환영과 처형 사이에 선 메시아
환영과 처형 사이에 선 메시아
애덤 윈 | 오현미 역 | 북오븐 | 344쪽 | 15,500원

기독교 소설, 나아가 기독교 문학의 지향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일반적인 문학은 ‘재미’에 초점을 둡니다. 재미를 통해 소설의 본질인 이야기를 이해시키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문학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성경을 쉽게 접근시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출발이 성경이고 끝이 성경입니다.

소설이라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 형식을 빌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일상의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기독교 소설, 기독교 문학의 지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기독교 소설은 ‘교훈’을 내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훈이라면, 훈시처럼 딱딱하고 고루해 보이고 거부감이 듭니다. 그래서 잘 만든 기독교 소설은 대놓고 ‘이제부터 성경 이야기를 하련다’라고 선언하며 쓰여진 게 아니라, 재미있게 잘 읽히게 하면서 뒤끝으로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겁니다.

이 소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시점부터 죽고 나서까지의 사회적·정치적 상황을 스릴러 형식으로 꾸미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세 부류의 위치가 등장합니다. 자신의 권력과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로마 총독 빌라도, 도성의 평화를 지키려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그의 아버지 대제사장 가야바, 로마를 붕괴시키려는 저항군 지도자 유다. 세 위치에서 느닷없이 등장한 예수님이라는 존재로 인해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게 됩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을 조연으로 밀어내면서 예수님을 부각시키는 방식을 썼다는 점입니다. 소설은 예수님보다는 이 세 위치의 관계에 더 집중합니다. 갈등을 조성하고 키우는 건 세 위치의 가교 역할을 하는 밀정입니다.

로마는 예루살렘의 상황과 반목하려는 세력을 없애기 위해 밀정을 세우고, 그 중심에 가상 인물인 갈렙을 활용합니다. 갈렙이 가지는 갈등과 정보로 이 소설이 채워지고 있습니다.

다 읽고 나면 이 소설의 제목은 <환영과 처형 사이엔 선 메시아>가 아니라 <밀정>이나 <갈렙>으로 해도 될 만큼, 비중을 크게 다루고 있습니다.

환영과 처형 사이에 선 메시아 killing a messiah
▲원저 ‘Killing a Messiah’.
밀정은 성경에서 다루고 있지 않은 부분입니다. 그러기에 더 읽는 재미를 주고 있습니다. 이 관점은 예수님보다는 밀정의 행각에 비중을 두므로, 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면서도 처형당했어야 했는지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주고 이해를 시켜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접근법입니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음(예수님의 처형)에도 서스펜스를 차용하여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읽는 속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매력적인 책입니다.

아쉬운 점은 있습니다. 우선은 신약시대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현대적 용어들을 쓴다는 점입니다. “가야바는 빌라도가 체스판에 놓을 가장 소중한 말이 되어야 했다(171쪽)”라든지, 갈렙이 은밀하게 대화나눌 시간을 일경(一更, 저녁 7시에서 9시 사이)라는 옛 시간대를 사용하고는(90쪽) 수시로 몇 시간 뒤 몇 미터 등과 같은 현대적인 단위를 사용한다든지, “상대방의 프리스타일 동작 앞에서 그 스텝은 바보같아 보였다(204쪽)” 하는 식으로 현대적인 용어와 격언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또 당시에는 이름 사용에 제한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작가의 작명 실력이 없었던 건지, 등장하는 가상 인물 이름이 우리가 알고 있는 구약 시대 인물과 같아 혼돈과 의문을 줍니다.

예수님의 처형에 대해서도 빌라도가 적극적이지 않으면서 그 공을 제사장에게 넘기는 부분의 설득력이 약하고, 예수님과 같이 못 박힌 두 명의 강도에 대한 다른 해석은 이해하기 쉽지 않으면서 논란의 소지를 줍니다.

작가도 이를 의식해서 인지 책 말미에 ‘저자의 말’과 ‘예수의 죽음과 반유대주의의 역사’라는 장을 넣어 이런 의문들에 대한 답을 썼습니다. 하지만 논란을 완전히 잠재울만 하다 보지는 않습니다.

끝으로 아쉬운 점을 하나 더 쓰자면 가장 끝에 가서는 ‘생각과 토론을 위한 질문’을 넣어 이 소설에 대해 되짚어 보도록 했습니다. 세상 어느 소설에서 이런 장(章)을 넣나요?

에필로그를 통해 작가의 의도를 간단히 알리는 선에 그치는 경우는 많지만, 내용을 강제로 복기하는 질문을 넣는 소설은 없습니다. 책에 대한 감상은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두죠.

사랑의교회
▲사랑의교회 강단. 부활을 상징하는 ‘빈 무덤’을 만들었다. (본 사진은 해당 서평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크투 DB
이 책은 소설이지, 교재가 아닙니다. 질문 또한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신학자가 쓴, 기독교 출판사가 낸 소설의 한계입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당시의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를 찾아내어 작가의 상상력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그리게 했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을 하나의 이야기로 읽는 것도 좋지만, 로마와 제사장과 저항군이라는 세 위치의 관점에서 읽는다면 재미가 더 배가될 겁니다. 나아가 세 가지 입장에서 본 예수님을 읽으면, 예수님이 처한 상황과 심정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분명 흥미로운 책입니다.

성경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을 딱딱한 신학서나 강해서가 아니라 신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한 소설을 읽음으로써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된다는 점에서, 기독교 소설은 꾸준히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처음과 반대로 생각합니다. 소설이 가지는 재미에 교훈을 붙여야 하는 것이 기독교 소설이 아니라, 딱딱한 교훈에 입힌 재미의 소설로 인해 성경이 더 무게감을 가지고 모든 이들이 성경을 접근하는데 조금은 용이하게 된다면, 기독교 소설로 그 역할은 다한 것이고 필히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도 이 소설은 읽을 만한 책입니다.

이성구(서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