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방역과 백신 정책, 비현실적이고 사회주의적
도덕적 통치자 이의 제기 말고 무조건 믿으라는 태도
겉으로는 고결해 보이나 교조적 이상 현실에 대입해
어떤 문제든 이상 따라 해결 자신감 때문에 일 그르쳐

백신 화이자 코로나19 접종 예방 병원
▲여타 백신들에 비해 안전성 측면에서 신뢰도가 비교적 높은 것으로 알려진 화이자 백신. 정부는 4월 24일 화이자 백신 2,000만명 접종분을 확보했다고 발표했으나, 상당수 국민들이 이 발표의 신뢰도를 의심하고 있다. ⓒ픽사베이
◈사회주의와 원죄: 인간의 힘으로 죄성을 극복하려는 사회주의

사회주의 사상은 거대하고 강력한 정부를 지향한다. 이런 성향은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상에서 기인한다. 마르크스는 불평등한 사유재산제가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악습과 부조리의 뿌리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해온 부르주아(대자본가, 대지주 등) 계급, 그리고 그 부르주아 계급에 협력해온 쁘띠부르주아(중산층 소시민과 중소규모 자영농) 계급이 점유하고 있는 모든 사회적 생산물, 생산수단을 박탈할 것을 권고한다.

이러한 박탈 행위는 우선 공산당 전위세력에 의해 주도된다. 즉 국가의 모든 정치권력과 경제력 모두를 공산당 일당이 독점하도록 한다. 그 다음에는 공산당이 전체 노동자들에게 이를 평등하게 분배하는 분권화된 민주사회로 나아갈 것이라는 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바라본 미래 인류 사회의 모습이었다.

이는 말 그대로 이상에 불과했고, 현재까지 어떠한 사회주의 국가나 공산주의 국가도 이 이상을 비슷하게라도 실현시킨 적이 없다. 대다수 공산주의 국가는 이 이상을 왜곡해서 결국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를 고수하다 그 폐해로 인해 체제 붕괴를 맞이했다.

소련이 붕괴되고 동서독이 통일을 맞이했던 1980년대 후반 데탕트 시기에, 대부분 공산진영 국가들의 공산당 독재 체제가 무너졌다.

현재 일부 남아 있는 공산당 독재 국가들도 중국처럼 자본주의 경제 요소를 상당부분 도입해 체제를 연명하거나, 아니면 북한처럼 아예 정상국가가 되기를 포기한 채로 공산주의 체제를 이어가고 있다.

결국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로 표현했던 사회주의 이상은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수십 년의 악몽과 같은 체제 실험을 통해 입증되었다.

왜 이 실험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마르크스가 무신론과 계몽주의 낙관론에 심취한 나머지 인간 본성의 어두운 부분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대학 시절부터 청년 헤겔주의 혹은 헤겔 좌파의 일원으로서 같은 그룹에 속해 있던 근현대 무신론의 대가 포이어바흐(포이에르바하, Ludwig Feuerbach)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의 신이 인간의 자기의식 가운데 최고로 아름답고 선한 부분들을 이념화해서 만들어낸 허상이라 주장했고, 진정한 도덕과 선, 정의는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나온다고 가르쳤다. 마르크스 역시 이 주장을 이어받아, 이상적인 사회 혹은 세상은 신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무신론적 인간 이해가 지닌 문제점은 삶의 현실에 명백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원초적인 죄성 문제를 간과하거나 일부러 외면하는 것이었다.

만일 기독교의 원죄에 대한 가르침을 수긍하게 되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와 계명에 대한 의식이 깨어나게 될 뿐 아니라, 인간의 계몽과 진보를 통해 이상향을 건설하려는 사회주의의 이상 자체가 처음부터 실현될 수 없는 공상임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포이어바흐 칼 마르크스
▲사회주의 사상을 지탱하는 무신론 정립에 기여한 두 사람,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왼쪽)와 칼 마르크스. 두 사람 모두 청년 헤겔주의에 심취한 경력이 있다. ⓒCFI.com
◈사회주의와 현실: 비현실적 이상에 붙들린 사회주의적 정권

공산당 일당 독재의 원리는 이렇게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원초적 죄성의 문제를 극복하고 흠이 없는 진보된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공산당 전위세력, 즉 당원들은 그 누구보다 가장 진보적인 인간들로서 도덕과 지식 양면에서 최고 수준에 이른 이들이어야 하고, 또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대전제이자 기초 신념이다.

사회주의 체제는 그것이 수정주의 노선이든 스탈린주의 노선이든 간에,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거대하고 강력한 정부를 지향한다.

즉 사회주의 정권 혹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권은 어떤 현안이든 민간의 자율적 활동에 내맡기는 것을 기피하는데, 이는 공산당 혹은 사회주의 정당 이외의 다수 대중이 아직 당원들에 비해 세계에 대한 이해나 도덕성 수준이 미진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모든 일을 정권의 간섭과 감시 하에 두는 것을 통치의 대전제로 간주한다.

작금의 코로나 백신정책은 그동안 현 정권이 추진해온 여러 핵심 정책들과 마찬가지로, 정부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고 관리되어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통치 이념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태는 현 정권 수뇌부의 도덕성과 사상적 진보 수준에 대한 강요된 신뢰를 바탕삼고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분명 이념 자체만 본다면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가 훨씬 고결해 보인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경제적 이기심과 욕망을 수긍하고 이용하자는 주장을 펼치고, 자유민주주의는 개개인의 책임 하에 각자의 삶의 자율성 혹은 자의성을 보장하라 가르치기 때문이다.

반면 사회주의는 인간의 경제적 이기심과 욕망을 극복해낼 것을 요구하고, 사회민주주의는 사회 전체를 위해 개인적인 삶의 자의성을 자발적으로 희생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론 자체만으로는 사회주의가 더 고결해 보이지만, 현실성 측면에서 사회주의는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죄악된 본성을 지닌 인간 현실을 수긍하면서 어느 정도 방관하는 입장이고,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이 본성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으니 진보를 향해 스스로를 희생하고 제한하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당연히 이론상으로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바람직해 보이는데, 문제는 사회주의 및 사회민주주의 이념이 인간의 실제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실에서 인간이 자력으로 이기심과 죄성을 극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한 사람 혹은 한 집단에게 많은 권력과 정치력이 주어지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현 정권의 코로나 방역 및 백신 정책을 보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권들 대다수가 그러하듯 수뇌부의 도덕성과 인권운동 경력, 그리고 현실에 대한 진보적이고 낙관적인 전망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것을 요구하면서 정부가 시행한 방역 노력 또한 아무런 결점이 없었다는 것을 극구 강조하고 있다.

백신 수급 상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정권에서 확보했다고 주장한 백신들 가운데 보다 안전한 것으로 알려진 화이자 백신은 사실상 국내에 도입된 물량이 많지도 않은데다, 3분기 시작과 함께 얼마만큼의 접종 수량이 도입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오로지 확실한 것은 충분한 접종 수량을 현 정권이 ‘확보’해냈다고 발표한 사실뿐이다. 이상적이고 진보적이고 도덕적인 통치자가 그렇다고 발표했으니 아무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는 식의 이런 태도는, 이상의 허구적인 우월함을 현실의 독재와 통제 명분으로 삼는 사회주의 정권들의 행태와 대단히 닮아있다.

백신 공급 정부 도입 계획 충분
▲현재 정부에서 제시하고 있는 코로나 백신 도입 로드맵. '확보'되었다고 하는 백신 물량의 도입 가능성이 지극히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간과한 계획은 아닌지 우려된다.
그동안 정권 수뇌부 인사들의 여러 비위와 편법 행태들을 봤을 때, 현 문재인 정권이 스스로의 신뢰성 근거로 내세우는 도덕성과 진보 수준이라는 것 자체도 회의적이다.

게다가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리를 적용할 수 있는 여러 정치경제 현안과는 범주를 달리하는 전염병 방역 및 백신 문제를 이념적 성향으로 해결해보려는 접근방법 역시 비현실적이다.

기독교 신앙이 정교분리 원칙을 따르는 이유는 현실 정치라는 것이 신앙이나 이념만 가지고 해결할 수 없는 삶의 포괄적인 문제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원죄를 수긍하고 이용하지 않고서는 삶의 현실을 온전히 살피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에 정치적으로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독교인들은 죄성의 문제가 교회 안에서 신앙을 통해 해결받아야 할 문제이지,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인정한다. 그래서 현실정치를 대할 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막 12:17)”라는 가르침을 따른다.

반면 사회주의적 진보를 믿는 이들은 겉으로는 고결해 보이지만 실상 비현실적인 교조적 이상을 현실정치에 그대로 대입하려 하고, 이 때문에 어떠한 문제든 그들의 이상을 따라 해결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많은 일들을 그르치는 모습을 보인다.

스탈린의 집단화나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 김일성의 천리마운동 모두 그 뜻은 이상적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참담한 실패와 재난을 초래했다.

향후 우리 정부의 코로나 방역과 백신 대응책 역시 나라 전체에 큰 고통과 불신을 초래하는 방식을 벗어나, 보다 현실적인 대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선회되기를 바랄 뿐이다.

박욱주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