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성전 정화 장사 강도 굴혈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그린 엘 그레코의 성화(1600). ⓒnga.gov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마가복음 11장 17절)”.

복음서를 비교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두 번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 13-22절에는 공생애를 시작할 때의 사건으로, 공관복음인 마태복음 21장 12-17절, 누가복음 19장 45-48절은 고난주간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2장 14절에 돈 바꾸는 사람, 이들은 외국의 화폐를 하나님께 현금으로 드릴 수 있는 유대 화폐로 교환해 주었는데, 외국 화폐에는 로마 황제 등 이교도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장 16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거침없는 행동에는 제사제도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참 된 정신이 흐렸기 때문에 분노하신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방인의 ‘뜰’이란 마가복음 11장 17절에 나오듯, 이방 모든 민족들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음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성한 성전의 예배가 배금주의에 의해 변질되는 것을 참으실 수 없어 이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장소를 교회 또는 성소라고 부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헌법 제2장 교회 제7조에 보면, 교회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만민 중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여 그들로 무한하신 은혜와 지혜를 나타내신다. 이 무리가 하나님의 집(딤전 3:15)이요, 그리스도의 몸(엡 1:23)이며 성령의 전(고전 3:16)이다. 이 무리는 과거, 현재, 미래에 있는 성도들인데 이를 가리켜 거룩한 공회 곧 교회라 한다.”

제8조 ‘교회의 구별’에서는 “교회를 두 가지로 구별하여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라 한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만 아시는 교회요 보이는 교회는 온 세계에 산재한 교회다”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성소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따로 마련해 놓은 거룩한 곳을 말합니다. 그 곳은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서 머물기로 선택하신 곳, 다시 말해서 그 분의 지상 거처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지날 때 세웠던 성막과 예루살렘 성전을 주로 성소라고 불렀습니다.

아브라함 족장 시대에도 그 분의 특별한 계시를 체험한 곳에 예배 장소들이 생겨났으나, 사실상 성소는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이 주로 성막과 성전을 성소라고 불렀지만, 그 외에 제단과 다른 거룩한 제구들을 갖춘 다른 예배 장소들을 성소라고 부른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한 번도 화를 내시거나 분노하신 적이 없지만,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며 분노하셨습니다.

그만큼 성전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예로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성전 지을 것을 만류하시며, 솔로몬 때에 성전을 건축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피를 많이 묻혔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시대에 교회가 많이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움받은, 참으로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누구나 길을 걷거나 차를 타고 지나갈 때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 십자가가 보이는 교회일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 안에 담겨져 있는 그 갈망과 부르심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며, 성도들과 함께 친교를 나누는 복된 장소입니다. 그리고 맡은 직분자들과 봉사자, 그리고 지도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꿈을 꾸고 하나님을 향한 강한 갈망으로 부르심에 응답하는 장소 바로 교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 가진 자, 장애자, 그리고 무식한 자, 박식한 자, 연약한 자와 권력자 모두 한데 어울려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 교회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일시적인 문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도 그저 흘러왔다 흘러가는 많은 생각들과 사라져가는 것들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단편적인 것들로만 가득하고, 시간이 지나면 남아있지 않아 허무할 때가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많은 이들이 꿈을 꾸지 않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꿈보다는 손에 잡히는 어떤 물질적이고 외형적으로 드러난 결과만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꿈을 꾸지 않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꿈을 꾸게 합니다. 허무한 것이 아니라 진정 의미 있는 것들을 찾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한 갈망은 일시적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욕구와 다릅니다. 그 갈망을 찾아 나서는 것도 중요한 여정입니다. 일시적인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 안에서, 깊이 새겨져 있는 갈망을 찾고 그 분을 향해 간다는 것은 일종의 ‘혁명가’가 되는 것입니다.

각자 사람들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들이 있습니다. 고귀한 열망들이 우리 안에도 들어차 있습니다. 그 안에서 그분의 부르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도 하시고,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작금의 시대는 코로나19라는 질병으로 인해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세상 권력에 휘둘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으니, 너무 안타까울 뿐입니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19가 마치 교회 때문에 전염된 것처럼 포장하여 교회를 탄압하고 있음에도, 대응은커녕 그들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노릇입니다.

이제는 코로나19 책임을 교회에 떠넘기다 못해, 예배금지법을 발의해 코로나19를 이용하여 교회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법을 만들어 징역형이나 벌금 그리고 교회를 폐쇄하는 법을 만들고 있다니,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자신들이 싫어하는 군사독재 시대에도 이러한 발상과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는데, 이 정부는 마치 공산당을 방불케 하는 발상을 하고 있으니, 정부의 앞날이 불 보듯 합니다.

하지만 대형교회 목사님들께서는 지금 이 시대를 그저 바라만 보고 계실 것입니까? 한국에 있는 전 교회와 연합하여 이 정부에 대해 할 일을 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이 나라 삼천리 금수강산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셨던 선열들과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다 바쳐 희생했던 믿음의 선배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은지요….

매일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대접받으며 좋은 승용차를 타고 VIP 대접 받는 자신의 모습이 영화로운지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두렵지 않습니까? 이제 이 땅에 공산당이 들어서면 VIP 대접받는 것도 끝이 날 것입니다. 누구 하나 살아남을 사람이 없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가던 길을 멈추고, 초심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설교 때마다 초대교회 운운하셨지만, 정작 본인들은 세상 연락에 물들어 진정 하나님의 거룩한 사자들인지 분간을 못할 지경입니다.

그리고 교회들마다 목사님들께서 설교를 제대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교회 내 좌파와 우파, 그리고 극단적인 사람들이 무서워서, 당당하게 말씀을 전하지 못하신다니요. 나라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이 시대를 정확히 읽고 설파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무엇이 겁나고 무서운지요? 우리를 간섭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늘 보호해 주시는데,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시는지요?

자신의 백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모르드개는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스더 4장 14절)”라고 했습니다. 그때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스더 4장 15-16절)”.

에스더는 누구든지 왕의 부름을 먼저 받지 않고는 왕에게 나아갈 수 없는 왕실의 어려운 법도에도 불구하고, 민족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말고 헌신하라고 당부하는 삼촌인 모르드개의 말에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은사를 주신 목적을 알고, 자기 백성을 궁극적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모르드개의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때가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향한, “이 때를 위하여 너를 택한 것이 아니겠느냐”라는 외침이 민족을 살리고 자신 역시 부흥케 되는 엄청난 결과를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1천만에 가까운 기독교 성도들이 있고, 더구나 만군의 여호와께서 계시는데, 무엇이 두려워 아직까지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행동도 못하는 종들이 되셨는지요?

특히 국회의원과 지식인들, 그리고 정부에서 근무하시는 분들 중에는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는 줄 아는데, 그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백성들인지, 나라가 이 지경까지 되었는데도 왜 손을 놓고 있는지요?

군사독재 시절에도 그렇게 시위를 하고 난리법석을 떨더니, 왜 정작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들만의 태평성대를 이루며 살고 있는지,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국민들은 답답하여 한숨만 내쉬며 한탄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내는데,그들은 피땀 흘린 국민의 혈세를 마치 자기 것인양 마구 퍼주는 모양새입니다. 자신의 돈이면 이렇게까지 퍼줄까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저들을 향한, 예수님의 회초리 소리가 점점 근접해 오고 있음을 가슴으로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하는 하나님의 교회를 더럽히는 자들에게 분노하시고 행동으로 저들을 내쫓으셨습니다. 하물며 자유로운 시대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저들을 향하여 응징을 해야 함은 이 시대의 요구가 아니겠습니까?

목자와 성도들은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교회가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나라의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종들을 부르셔서 난국을 수습하고 구원의 승리로 이기게 하셨습니다. 그 과정과 결과에는 늘 종들의 아름다운 헌신과 순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주의 종들이여 깨어 일어나소서! 이 난국은 교회가 해야 할 소명임을 잊지 마시고, 기도로 찬송으로 무장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일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특히 교회는 어느 누구의 간섭과 외압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며, 고요한 기쁨으로 하나님과 은밀히 대화하며, 성령의 열매로 가득한 곳이어야 합니다.

억눌린 사람들과 가난한 자들, 그리고 상처를 받고 신음하는 자들의 위로가 되는 곳, 평안의 쉼을 얻는 곳이 되어야 함은 물론, 만인들이 기뻐하고 사랑하는 곳, 소망과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