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한 우리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소위 ‘죄의 대속’을 통한 ‘구속적 연합’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삼아 내가 의롭게 되므로 그와 연합된다.

이는 ‘사람’이시며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이중 정체성(double identity)’의 구현이다. ‘제물 되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를 대속받고 ‘2위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연합의 방편(the means of union)’인 동시에 ‘연합의 대상(the object of union)’이다.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르치는 성경들이 대개 ‘그리스도의 죽음’을 지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성도의 연합’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세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 6:4)”,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롬 6:6)”.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는다(출 24:8, 벧전 1:2, 히 10:22)’는 말씀 역시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적절하게 묘사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덧입어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는 말이고, 그 결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뤄진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한다(요 6:56)”고 하신 말씀 역시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연합을 가장 실감나게 표현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먹어) 그와 연합한다’는 말이다.

‘둘의 연합’에 있어 ‘피 뿌림을 받음’이 은휘적(隱諱的)인 구약의 표현이라면, ‘살과 피를 먹음’은 신약의 사실적(事實的)인 표현이다.

이와 달리 ‘연합’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연합’이 아닌 ‘그리스도의 영(靈)과 인간의 영(靈)의 연합’으로 오도하는 이들도 있다. 종교다원주의자, 신비주의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이 근거로 예시하는 단어가 ‘영접(receiving, 요 1:12)’이다.

그들은 그것을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서가 아닌, 신비주의적인 ‘연합’ 개념으로 도용한다. 다음 어느 신비주의자의 기도문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예수여 오소서! 당신을 영접합니다. 잡동사니로 너저분한 내 마음을 깨끗이 비워 당신이 거할 오롯한 공간으로 만들었으니, 들어 오셔서 나와 합일하소서!”

죄인이 그의 마음을 깨끗이 비워낸다고(사실 죄인은 그렇게 비워낼 수도 없다)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도, 갖은 예(禮)를 갖추어 그를 영접한다고 그를 모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가 뿌려지지 않은 자와는 연합할 수 없다. ‘죽음 없는 연합’ 개념은 신인합일(神人合一)의 범신론적 신비주의(pantheistic mysticism)로 흐른다.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는 ‘예수’ 이름(마 1:21) 외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임마누엘’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마 1:23)을 가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와 연합’하신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스도와의 연합, 중생의 기초

성경은 ‘중생’을 ‘구원’과 동일시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이는 ‘중생’은 ‘죄로 죽은데서 살아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삯 사망(롬 6:23)’을 지불하지 못해 ‘율법의 정죄(사망)’ 아래 있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해 죄값이 지불되니 심판(사망)에서 살아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거듭남의 모태(母胎)이다.

사도 바울 역시 ‘새 생명’이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연합’으로 시작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중생의 생명(요 6:54)’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의 중생(롬 6:4-6)’은 ‘성령으로의 중생(요 3:5)’이다. 죄로 죽은 자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할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나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후,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나신 것과 같은 원리이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이렇게 ‘거듭남’을 ‘그리스도의 죽음’에 한정시킬 때, ‘성령으로의 중생’개념을 모호하지 않게 하여 그것에 ‘신비주의, 영지주의, 도덕적 중생’ 개념 같은 것이 기생하지 못하도록 해 준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

그리스도가 우리와 연합하므로 우리에게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일은 ‘그가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순간부터 우리 생명의 원동력은 그리스도시며, 그가 우리 삶을 주도해 나가신다. 이는 주권자 되신 하나님의 속성이시기도 하다. 그가 임재 하는 곳은 어디든지 그의 통치 아래 들어간다.

그러나 이 말씀은 ‘내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주권자 노릇을 하시도록 해 드려야 그렇게 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그에 대한 나의 협조 여부를 불문하고 그가 내게서 이루시려는 경륜을 진행하신다.

물론 나의 비협조가 성령을 근심시키고(엡 4:30) 때론 그의 징계를 불러오기도 하지만(히 12:4-11), 그것 때문에 그가 우리를 떠나시거나 우리에 대한 그의 경륜을 멈추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으로 우리에 대한 그의 경륜을 실패 없이 진행하신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그리고 우리와 연합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와 두 가지 관계를 형성한다. 먼저 ‘소유자’와 ‘피소유자’의 관계이다. 이는 ‘값으로 사신 바 됐다(고전 7:23)’는 구속의 개념과 일치된다. 그는 창조주로서, 구속주로서(사 43:1) 우리에 대한 ‘2중적 소유권’을 갖는다.

그의 ‘소유자 개념’은 다만 우리에 대한 ‘소유권(ownership)’만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의 강력한 ‘소유력(the power of ownership)’도 가졌음을 의미한다.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그의 강력한 장악력이 누구도 그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지 못하게 함으로(요 10:29) 우리의 안전을 담보한다.

그리고 ‘소유주와 피소유자(사 43:1)’의 관계를 일방적인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전락하지 못하도록 하는 또 하나의 관계가 있다. 그것이 ‘부부 관계’이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가장 핵심적으로 표현한 용어이기도 하다.

‘중세의 군주통치(monarch rule)’에 익숙했던 중세 신학자들(종교개혁자들을 포함해) 중에 ‘하나님의 주권’개념을 전제군주적(absolute monarchial)인 것으로 왜곡시키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물론 오늘도 그런 경향을 나타내는 이들이 있다).

이는 그들이 다만 ‘우리를 피로 값주고 사셨다’는 ‘구속’에서 멈춰 버리고, ‘그의 피로 그와 우리가 한 몸을 이뤘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5-27)”.

이렇게 그의 피로 한 몸을 이룬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결코 ‘전제군주’와 그로부터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받는 ‘백성’의 관계 같은 것일 수 없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유자이지만 결코 우리가 그로부터 일방적인 소유를 강요당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그를 소유하고 그 역시 우리의 소유되기를 마다 않으신다. 둘은 서로 ‘소유하고 소유 당하는 한 몸의 관계’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아 2:16).”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연합된 둘은 영원히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머리와 몸’이 서로 분리될 수 없듯, 한 몸으로 연합된 그리스도와 우리 역시 그러하다.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마 19:6).”

이는 다만 ‘혼인 서약’을 위한 말씀만이 아닌, 우리를 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불변의 사랑을 말한 것이기도 하다. 아니 버리실 수가 없다.

머리에서 몸이 떨어져 나가면 몸만 죽는 것이 아니라 머리도 죽기 때문에, 그에게서 우리의 분리를 허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둘은 연합을 통해 이미 공동 운명체가 된 것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