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적 세계관 속 과학기술 천시 대가 혹독히 치른 뒤
한국인들 마음 속에 과학기술에 늘 두 가지 감정 교차
과학기술 발전과 진보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열망과,
이 발전 가로막은 유교·성리학 전통 대한 극단적 환멸

자산어보
▲성리학과 과학기술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정을 반영한 영화 <자산어보>.

◈과학기술과 성리학: 자연과학과 기술문명 발전의지를 말살시킨 성리학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전(설경구 분)과 상민 신분의 인물 창대(변요한 분)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옮긴 영화 <자산어보>는 성리학 근본주의로 인해 자연과학 및 기술문명 부문에서 발전이 거의 멈추다시피 한 조선의 갑갑한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정약전이 생존해 있던 시기(1758-1816년) 서구 각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격변을 경험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프랑스 대혁명(1789-1799년) 같은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하는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산업혁명의 경우, 이미 16-17세기 일어났던 과학혁명의 결실에 힘입어 기술문명의 힘을 극대화시키는 가운데, 서구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을 송두리째 바꿔버리기에 이른다.

서구인들은 이렇게 획득한 힘을 인간의 죄된 본성에 충실하게, 패권적으로 활용했다. 그 결과 전 세계는 서구 열강의 무자비한 식민지화로 인해 커다란 고통과 희생을 겪게 된다.

자연과학과 기술문명의 힘을 업신여겼던 조선 역시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된다. 양명학을 제외한 유교 사상의 지류 전반은 복고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는데, 성리학을 ‘그 자체대로’ 신봉하던 조선 사대부들 역시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심히 복고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자연과학과 기술문명 발전이 유교적 세계관과 윤리 관념으로 질서잡힌 조선 사회를 혼돈과 파멸로 이끌어갈 것이라 여겨, 과학의 발전을 경시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억누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조선의 패망, 일제 식민지배의 고통, 그리고 전쟁 직후 세계 최빈국(1953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 67달러)의 위치였다.

이렇듯 과학과 기술을 천시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한국인들은 이후 패권적 기술문명 발전에 사활을 걸게 된다. 그리고 이런 노력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적, 기술적 강점들을 키우는 원동력을 이루게 된다.

아직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 발전을 이뤄낸 강대국들에 비해 부족한 면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불과 60여년 전만 하더라도 가발과 봉제 수출에 의존했던 나라가 현재 세계 제1의 메모리 반도체 제조능력을 갖추게 된 것은 전 세계 역사를 통해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발전 사례이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지난 주에는 경남 사천의 한국항공우주산업에서 KF-21 시제기 출고식이 열렸다. 1950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대국민 모금운동을 통해 AT-6 고등연습기 10대를 캐나다로부터 힘겹게 수입해온 것이 불과 70여년 전인데, 이제는 자체 전투기 개발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경제적, 기술적 역량을 갖추게 된 것이다.

자산어보 KF-21
▲대한민국의 항공우주기술과 국방과학기술 발전 정도를 보여주는 KF-21 시제기.
비록 단편적이긴 하지만 이런 사례들이 알려주는 사실은, 한국인들이 그 누구보다 극적인 방식으로 자연과학과 기술문명의 힘을 실감하며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 마음 속에는 과학기술과 관련해 항상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고 있다.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발전과 진보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열망, 그리고 이런 발전과 진보를 가로막아온 조선의 유교, 성리학 전통에 대한 극단적인 환멸과 분노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과 한국인: 신앙과 윤리를 아득히 넘어선 과학주의의 기치

영화 <자산어보>에는 오늘날 우리 한국인 대다수가 공감하는 이 두 가지 감정이 정약전과 그의 제자로 등장하는 창대를 통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우선 정약전의 경우 동시대 영국이나 프랑스, 혹은 미국 같은 곳에서 태어났으면 제임스 와트나 일라이 휘트니 수준의 기술혁신 업적을 남길만한 천재였음에도 불구하고, 하필 성리학 근본주의에 갇혀 있던 조선에 태어난 점이 못내 아쉽다는 감정이 반영된 등장인물이다.

그의 월등한 지적 자질은 서학(천주학)으로 인해 어느 정도 개화된 면이 있지만, 조선이라는 과학기술 불모지의 정황적 한계상 주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가 집필한 수준의 생물학 저서를 남기는 데 그쳤다.

영화는 정약전 본인의 대사를 통해 이러한 조선의 갑갑한 현실을 확인시켜 준다. “주자(朱子, 성리학 창시자 주희)는 참 힘이 세구나.”

자산어보
▲<자산어보>의 정약전(설경구 분). 선구적인 실학자였으나 성리학 근본주의에 사로잡힌 조선의 고루한 시대적 현실에 막힌 비운의 천재.
다음으로 창대의 경우 과학기술 발전을 좌절시키고 더 나아가 인간과 사회를 망쳐온 성리학에 대한 환멸과 분노, 실망감이 반영된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 창대는 정약전이 추구하던 실사구시 정신을 ‘조선의 현실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할 사상’으로 판단하고, 성리학을 통해 입신양명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결국 그 성리학의 고루함, 그리고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상체계로서의 무력함에 분노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자산어보>의 두 주인공은 오늘날 우리가 과학기술과 성리학에 대해 갖고 있는 상반된 태도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 이면에는 과학기술 발전이 가져다주는 패권적인 힘과 그 결실의 향유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기독교적 관점으로는, 이처럼 과학기술의 힘을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이루겠다는 염원 자체를 나쁘게 보지는 않는다. 다만 이러한 욕망이 패권적 지배욕과 결합되는 것, 그리고 자연과학과 기술문명 발전의 가능성과 결실을 심히 과대평가하여 이를 우상화하는 처사를 경계한다.

과학기술의 힘에 도취되어 우상화에 빠지면 과학주의를 신봉하고, 결국에는 과학이 알 수 있는 수준 이상의 진리, 예를 들어 인간 존재의 기원이나 신의 존재 등에 관한 진리를 제한된 현상 관찰과 미검증된 이론에 기대어 단정적으로 언표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다시 말해 진리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을 진리로 옹립하는 인식적 월권을 범하게 된다.

자산어보
▲<자산어보>의 장창대(변요한 분). 실학이 지향하는 바를 거부하고 성리학에 위탁했다가 그 참혹한 실태에 좌절하는 인물.
과거 칸트는 인간의 과학적 인식이 갖는 한계를 분명하게 지정하기 위해 <순수이성비판>을 집필했다. 그런 그의 지혜는 오늘날의 급속한 과학기술 발전 현실에도 유효하게 적용된다.

서구인들은 비교적 오랜 시간 근대 과학기술의 힘과 한계를 경험해 왔다. 게다가 세계의 인과율에 얽매이지 않는 초월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전통을 갖고 있었으므로, 과학기술의 맹목적 발전이 초래하는 부작용을 어느 정도 반성할 수 있는 지적, 윤리적 토양을 일궈낼 수 있었다.

반면 우리 한국인들은 성리학 근본주의의 심각한 부작용과 과학기술 미비로 인한 역사적 비극 체험의 반작용으로 과학주의를 정당화하는 태도가 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있다.

신앙이나 윤리를 유념치 않고 오로지 남을 이길 힘을 줄 수만 있다면 어떠한 과학적, 기술적 발전이라도 환영한다는 태도가 국민적 공감대를 얻고 있다.

영화 <자산어보>의 내용이 특별히 우리 한국인들에게 감명깊게 다가오는 것도 이러한 공감대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단지 신앙과 윤리 차원에서만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 자체의 온전한 발전에 있어서도 장애물이 된다.

당장 우리 손에 힘을 쥐어줄 수만 있다면 그 한계나 부작용, 그리고 검증이 미비한 부분에 상관없이 어떠한 과학적 학설이나 기술적 원리라도 즉시 진리로 받아들여버리는 학문적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그들이 겪어온 역사적 경험 때문에 이러한 오류 가능성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계속>

박욱주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