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굳이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의존된 피조물이다”는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의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에 호소하지 않더라도, 기독교인이라면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수긍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이 자립적이려고 하는 순간, 그는 파멸에 빠뜨려진다. 뱀이 에덴에서 하와를 파멸에 빠뜨리려고 고용한 시험도 ‘하나님 의존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자결(自決), 자립(自立)하라’였다(창 3:5).

주지하듯 하와는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려고 했을 때, 그가 원하는 대로 자기의 ‘독립’을 이룬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배’에서 ‘죄, 사망, 마귀의 지배’ 아래로의 이동이었다.

주인 없는 빈집에 흉악한 일곱 귀신이 들어와 주인 노릇 하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마 12:43-45)이나,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난 인간의 삶을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 대한 추종(엡 2:2)’이라고 한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사실 마귀 지배 이전에 죄와 사망이 그를 먼저 지배했고, 전자는 후자의 결과물이다).

이는 인간은 스스로에게 주권자가 될 수 없다는 증거이며, 전능하신 주권자인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은 다른 지배력으로부터의 보호를 받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만왕의 왕, 만주의 주(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 계 19:6)’라 함은 그의 통치권 안에 있는 자에겐 어떤 다른 지배력도 미치지 못하는 최고의 왕(King), 주(Lord)라는 뜻이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찌어다(시 97:1)”고 노래한 것은 그것들이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 위에 초월하신(시 97:9)” 그 분의 통치권내에 있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억압과 구속으로 여겨 그의 통치를 벗어나려 한다(시 2:3). 그러다가 그들은 세상 온갖 것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간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통치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지고의 복이지만, 타락 후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없게 됐다(물론 이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그의 일반적인 통치 경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죄인이 공의로운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그것은 그에게 ‘구원 통치(salvation dominion)’가 아닌 ‘심판 통치(judgment dominion)’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인이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받으려면 먼저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없이해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통치를 말할 때 ‘평화(하나님과의 화목)’를 앞세우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사 52:7).”

성경 기자들이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인자(仁慈)한 ‘목자의 다스림(시 23편, 마 2:6)’에 비유한 것도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과 화목했기 때문이다(마 2:6, 벧전 2:24-25).

이렇게 하나님이 성도를 그의 인자(仁慈)로 통치하시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진정으로 즐거워 할 수 있게 된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계 19:6-7).”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할찌로다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이 외치며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대상 16:31-32).”

따라서 유대인들이 화목자 그리스도를 대적하면서 스스로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리스도 밖에서의 하나님 통치란 없다. 시편 기자가 ‘사람들이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를 대적’한 것을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것과 동일시 한 것은 옳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시 2:1-3).”

◈기꺼운 복종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가 ‘자비의 통치(reign of mercy)’였다면, 그것에 대한 그들의 응답은 ‘기꺼운 복종(voluntary obedience)’이다. 다음 말씀들은 그 예시 구절들이다.

“다윗의 가문에서 왕이 나와 신실과 사랑으로 그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사 16:5, 새번역)”, “주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를 다스리시고 주의 법을 나에게 가르치소서(시 119:124, 현대인)”.

사도 바울은 여기서 진일보하여, ‘하나님의 통치와 그 백성의 복종’을 ‘아내(교회)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어준 남편(그리스도), 그리고 그에 대한 아내(교회)의 복종’에 비유했다(엡 5:22-25). 이는 ‘하나님과 우리’ 간에 이뤄지는 ‘통치와 복종’을 가장 근사하게 표현한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아 2:16)”. 여기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부부의 ‘소유와 귀속’에 비유했다. 그것은 ‘일방적(一方的)’이 아닌 ‘쌍방적(雙方的)’임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우리를 소유하실 뿐더러 성도도 하나님을 소유한다. 더욱이 순서상으론 우리 편에서의 ‘소유’가 먼저다. 먼저 그가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요 3:16) 우리가 그를 소유했고, 그 결과 우리가 그의 소유가 됐다(계 5:9).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마지막으로 ‘누가 그의 통치를 받는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 입성 때에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마 21:5) 그의 통치를 받는 자들이 나귀새끼처럼 ‘세상의 볼품없는 자들’ 곧,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자들임을 예표한다.

실제로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수도(首都) 예루살렘을 중심한 탁월한 사람들이 아닌 갈릴리의 기층민(基層民)들, 예컨대 세리, 창기, 죄인같은 자들이었다. 세상의 왕들은 문벌있고, 훌륭한 백성들의 통치자가 되길 원하나 하나님은 스스로 설 수 없는 죄인, 무지렁이들의 왕이 되셨다.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preserve)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시 116:6)”,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uphold)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도다(시 145:14)”.

이는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는 것들을 부르신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고전 1:26-28)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렇게 천하고 멸시받는 자들이라야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어 감읍함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의(義)에 배불러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자들을 통치하지 않으신다. 아니 그들 자신이 그의 통치를 받기를 거부한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이미 말했듯,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통치(salvation dominion)’를 거부하고 ‘심판 통치(judgment dominion)’를 불러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