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신학 수업
철학자의 신학 수업

강영안 | 복있는사람 | 304쪽 | 15,000원

저자는 현 시대를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시대라고 정의한다. 이 시대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어떠한지 이 단어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어느 유명 가수의 노래 가사처럼 영원한 것은 절대 없고 결국에는 자신만 남는다는 사상이 이 시대의 진리이다. 참된 것이 있으면 그른 것이 있고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이 분명히 있는데, 그러한 절대가 없고 기준마저 제각각이다. 이미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이 기준이 된 것이다.

필자는 현 시대의 사람들은 정의와 공의에 민감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러한 차별과 부당함에 아주 공격적이다.

이전에는 억울한 삶을 주어진 운명이라 생각하고 체념하고 단념하며 받아들였지만, 이제 불의를 향해 저항하고 기울어진 각도를 수평으로 맞추려고 한다.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기보다 무엇이든 이루어낼 수 있는 존재라 여긴다.

이렇듯 자아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불행한 운명을 숙명으로 여기지 않고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의지는 혁명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치명적인 약점은 자신에게 유익하면 참이고 무익하면 거짓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공의와 정의에 대한 감각은 살아있지만, 진리에 대한 기준이 고장났다. 자신에게와 자신과 관계된 것에 도움이 되면 참이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악이라는 고장난 기준은 더 나은 삶과 밝은 미래를 거부한다.

하나님

저자는 인간이 처한 악한 환경과 존재의 불행이 인식될 때, 하나님을 찾게 되는 인간의 본질을 말한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존재가 죄인이고 구원에 있어서 철저히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 자이다.

로이드 존스는 영적 파산을 경험한 자가 성도라고 표현했는데, 저자는 인간 존재의 밑바닥이 느껴질 때 하나님을 향하는 관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체스터턴, 파스칼 등 학자들의 의견을 따라 인간의 본질이 무능함을 알려준다.

인간의 존재와 본질이 이렇게 구원에 있어 한 치의 가능성도 없다는 것은, 인간은 절대와 선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반증이다. 자신이 유일한 기준이 되어 선악을 구별한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겠다는 독립선언이다.

일찍이 인류의 조상인 아담은 이 선언을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당해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경륜과 자비 아래 인간은 구원을 고대하고 갈망하게 된다.

우리 인생의 밑바닥과 민낯은 우리에게 절망을 넘어 하나님을 찾게 도와준다. 인생의 허무와 슬픔을 달래기 위해 다양한 것을 찾고 시도하는 인간의 손짓은 하나님의 도움을 소망하고 간구하는 영혼의 몸부림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인생의 절벽과 막다른 골목에서 드디어 그분을 향하는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자신이 전부이고 기준이라고 여기던 인식이 무너지고 하나님이 모든 것이고 중심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신학

인간은 자신이 기준이 되고 하나님이 되길 원하는 이기적인 존재인지라, 신학을 함에 있어서도 고립될 수 있다. 신학이라는 것은 본래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배우고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신학이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리스와 로마 문화에서는 모든 것에 이유와 근거를 대야 하는 것이 덕목이었는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시고 그분이 왜 주이시며 하나님이 되시는지 충분히 설득하였고, 그것은 영광의 신학이 되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신학은 인간의 영광을 위할 뿐, 교회만을 위한 크게 유익이 없는 학문이 되었다. 더구나 현대인은 신학에 대한 요청을 거의 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러한 신학의 사라짐을, 개신교의 교회개혁에 대한 대응으로 일어났던 가톨릭의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와 루터를 중심으로 일어난 성경 중심 전통이라고 설명한다.

전자에서는 교회만을 위한 세미나리에 충실하다 보니 국가와 사회와 시민을 포괄하는 신학을 놓치게 되고, 후자는 ‘오직 성경’이라는 넓은 의미의 깃발을 좁게 해석하여 외친 오류를 낳게 된 것이다.

신학이라는 단어도 교회 초기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아퀴나스나 칼빈도 주로 언급하지 않았다. 중세 이후 철학과 신학은 나눠지게 되고 둘은 별개의 과목으로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초기 교회는 신학을 하는 자들로 구성되었는데, 신학은 교회만의 전유물이 되지 않았고 지혜를 찾는 자들에게 바른 길을 보여주었다. 이기적인 인간은 신학도 이기적으로 만들 수 있는데, 모두를 위한 신학을 했던 초기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잃어버렸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의 어려운 과제가 된 것 같다.

고신학원 이사장 강영안 박사
▲저자 강영안 박사. ⓒ크투 DB
개혁

철학은 이성으로 하고 신학은 믿음으로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개념이다. 필자는 신대원 첫 학기 조직신학 수업 때 서철원 교수님으로부터 “신학은 믿음으로 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귀에 박히도록 들었다. 마치 이성이 여기에 개입되면 성경은 불경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신학이 건강한 사회와 바른 인간과 빛이 되는 교회를 위한 것이기에, 신학은 개혁을 위한 것이고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한 기준이다.

우리는 ‘오직’이라는 5대 교리가 종교개혁 때 외쳐졌던 구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교회가 개혁되고 새로워지는 중요한 원리였지, 구호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오직’이라는 것은 보수에 가깝고, 익숙한 인간에게 배제와 혐오로 사용하여 자기의 영역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은 집단을 우월하게 만드는 용어가 아니라 절대자의 권위 아래 모든 질서를 바르게 하고 각자의 영역에서 온전한 공동체와 인간이 되게 하는 원칙이었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에 충실했던 개혁자들이 외쳤던 슬로건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여, 교회에도 적용이 되고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개혁은 바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본성이 기울어져 있기에, 항상 원래의 위치로 귀환해야 한다. 교회도 삐뚤어진 인간이 모인 곳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늘 중심 삼아 개혁되어야 한다. 인간이 모인 사회는 바벨론 정신으로 살아가는 곳이기에, 무엇이 바른 삶인지 교회와 성도는 보여줄 책임이 있는 것이다.

결론

강영안 교수님의 수업을 인텐시브 코스로 혼자 배웠다. 한 학기 수업을 혼자 하루에 3-4시간씩 독학으로 읽은 것이다.

독서를 끝낸 나의 느낌은 ‘철학자가 들려주는 신학 이야기’라기보다, 성경과 지식이 풍성한 목회자가 들려주는 하나님과 인간과 이성과 믿음, 세상 속에 그리스도인에 대한 해박하고 통찰력 있는 설교다.

강대상에서 성경을 강해하는 설교와는 거리가 멀지만, 이 시대의 성도와 구도자에게 필요한 주제를 성경의 사상을 담아 선포하는 주제 설교이다.

필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저자는 딱딱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철학자라는 편견이 사람을 차갑게 볼 수 있게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이 그에게 더 어울리는 듯하다.

저자는 강의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교회가 빛과 소망이 되기를 원하는 성도라고 고백한다. 팬데믹 상황 속에서 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생명존중과 약자 우선이 기독교의 본래 모습이라고 대변해 준다.

철학자가 들려주는 강의가, 목회자가 들려주는 강의로 들린다. 이성의 중요함을 말하지만 믿음의 고귀함을 외면하지 않고, 공공선을 말하지만 교회의 고유함을 놓치지 않는다.

하나님을 절대선으로 말하지만 긍휼을 입어야 하는 연약한 인간을 품는다. 필자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저자는 한결같이 균형을 유지한다.

기독교 신앙은 말의 종교가 아니라, 삶과 열매의 종교이다. 저자는 이것을 진리라고 하는데, 포스트-트루스 시대에 그가 말하는 진리에 귀 기울여보길 권해본다.

방영민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서현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