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
▲광야로 나서는 모세와 히브리 민족의 모습. ⓒ못생긴나무 제공
아담, 노아, 아브라함, 그리고 모세….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신 대상들을 소환하여 코로나19 사태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해줄 것인지 상상해보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당시 그 언약의 대상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그들이 겪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전심으로 섬기며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유효한 약속이었다. 동시에 각각의 언약은 언약의 완성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새 언약을 맺으면서 완성되었다.

그리스도의 때를 바라보고 기대했던 아담, 노아, 아브라함은 여자의 후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언약을 성취하신 우리 시대에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어쩌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고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긍휼하시고 자비하신 성품을 각자의 경험과 입장에서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코로나를 겪는 우리에게 모세가 한 마디 한다면, 그는 과연 어떤 말을 할 것인가?

하나님은 모세와 개인적인 언약을 맺지는 않으셨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세 언약’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 (어떤 이는 그래서 모세 언약 대신 시내산 언약, 모압 언약이라고 부른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에게 맺으신 언약과 모세의 언약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아담에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 그리고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란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행위와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하신 약속이다.

노아 역시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땅과 자손 그리고 복을 약속받았는데, 아브라함에게 특별히 무언가 조건을 걸지 않으셨다.

하지만 모세 언약은 바로 이 점에서 다르다. 조건이 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약속의 땅 앞에서 이스라엘 다음 세대와 하나님이 약조하신 언약은 다음과 같다(모압).

“네가 오늘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들으라 확언하였고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너를 그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 확언하셨느니라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신 26:17-19)”.

언약주의 관점에서 이 조건부 언약은 이스라엘의 언약 이행 실패로 파기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새 이스라엘 교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운 언약을 맺으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에 제한된 구원이 아닌 아담과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은혜로) 약속하신 범세계적 구원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세대주의 관점에서는 원가지인 이스라엘의 영원한 유기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이 시기하게 하기 위해 이방인에게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롬 11:11-12),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의 예언이 여러 선지자를 통해 허공에 메아리치는 것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문자 그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라고 물은 사도들이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것이 아니라면(행 1:6-8), 구약의 선지자들이 바라본 이스라엘의 미래와 그리스도께서 부정하지 않으신 때와 시기, 사도 바울이 믿고 바라고 있던 골육 친척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복은 조건부 언약으로 파기된 것이라 보기 어렵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넘어졌지만, 그것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충만함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롬 11:12)?

다시 모세로 돌아가서, 그가 만일 시내 언약을 맺고 있었던 그 때의 관점으로 코로나19 사태를 겪는 우리에게 한 마디 한다면, 아마도 그는 이런 말을 했을 것 같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원망하느냐? 너희의 원망은…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출 16:8).”

이스라엘은 자력으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강한 손을 펼치사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그들이 자유를 얻었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들을 안고 가는 것처럼 그들을 보호하시고 공급하시고 지키시며 인도하셨다(신 1:31).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날마다 만나를 내려 먹이시고, 옷과 신발이 닳지 않도록 하셨다.

엄밀히 말하면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의 선한 행위를 담보로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주셨다(야곱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셨다).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신 29:13).”

광야의 험한 길과 다양하지 못한 음식,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과 적군은 하나님을 향한 불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누리고 있는 이 특별한 언약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했다.

그들이 수효가 많거나 강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언약을 맺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동행하신 것이었으니 말이다(신 7:7).

모세는 이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이 잊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직 너희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했다(신 4:7-9).

이 특별한 언약의 백성이 된 이들이 겨우 양파와 파, 물과 길 때문에 언약의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옳은가?

코로나19를 겪다 보면, 원망이 늘어나기 쉬운 게 현실이다. 마스크를 언제나 착용하는 건 답답하고 귀찮다. 언제 질병에 걸릴지 모르는 위협은 어떤가? 경제적인 압박이나 떨어져 나가는 관계 혹은 갈등을 겪는 관계 속에서 외로움이나 고통을 느낀다.

하지만 모세는 우리에게 말할 것이다.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임을 잊지 말라고. 우리가 죄 지은 대로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은혜를 날마다 베풀어주신다. 밤에도 졸지 않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

아직 약속의 땅 천국에 도달하기 전이니, 광야에서 불편한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질병은 언제든 있다가 사라지고,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수고와 슬픔뿐인 세상에서 불평과 원망 거리를 찾으려면 한도 끝도 없다.

언약의 백성은 광야에서 우리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 불평을 멈추라. 하나님께서 듣고 계신다.

“하나님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라.”

모세는 언약의 제2세대 백성에게, 그들이 겪은 어려움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혔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 8:3-6).”

세상에 그 어떤 부모가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식을 어려운 환경 속에 밀어 넣을까? 악한 부모라도 자식에겐 좋은 것을 줄줄 안다. 예수님은 “하물며”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 백성을 선하게 대하신다고 확답하셨다(눅 11:13).

모세는 예수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한다. 광야길, 그 험하고 주리고 힘든 여정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이 있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훈련하신 것이다. 그들이 먹는 것에 의존하여 살기보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며 승리감에 젖어 살기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살도록 그들을 빚으신 것이다.

때로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무서운 심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들을 멸절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바른길로 인도하기 위해 사랑의 매를 대신 것이다.

우리는 왜 코로나19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 우리 삶에 끼어들었는지 다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란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우리가 아직 연약하고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새 언약을 맺으셨다. 우리 영혼의 영원한 목자와 감독이 되셨고, 우리를 그분의 제사장 나라, 백성으로 삼아주셨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롬 8:28), 모든 일을 통하여 “오직…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히 12:10)”신다. 당시에는 징계가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히 12:11).

우리는 입 밖으로 불평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틀어막는 게 아니다.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아버지가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을 신뢰하고 그 목적을 믿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워야 한다(빌 4:11).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허락하신 모든 일에 선하신 뜻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 처하더라도 능력 주시는 언약의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 모세가 우리에게 말할 것이다. “원망을 그치고 하나님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라.”

”그의 말을 들으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 18:15).”

모세는 언약의 백성에게 자기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실제로 하나님은 모세가 말한 그 선지자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일으키셨는데, 모세는 직접 그분을 변화산에서 만났다(눅 9:30-31).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앞에 엎드린 제자들에게 모세 대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눅 9:35).”

고난 속에 하나님은 더 큰 소리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주변에 있는 소리가 아무리 크고 무서워도, 우리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최악의 사건이 죽음이라고 해도, 우리는 무덤 속에서 그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여 영원히 그분과 함께 살 소망이 있다.

무섭게 따라오는 애굽 군사들과 홍해 사이에 갇혀 공포심에 떨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했던 것처럼, 거인처럼 장대한 가나안 백성이 진 치고 있는 곳에 하나님 말씀을 믿고 들어가 싸워 차지해야 했던 것처럼, 코로나19 및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의 음성을 따라 살면 우리는 약속하신 땅에 안전하게 도착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모세는 말한다. “그의 말을 들으라”, “그의 말을 믿어라!” 그의 말을 믿는 자는 바울처럼 외칠 수 있으리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조정의
▲조정의 목사.
조정의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유평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