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선함 믿고 그곳에 희망 두고 강조하는
소위 ‘인간 중심 혹은 사회주의’ 신학파들,
집권 세력 연대해 교회를 봉사단체로 여겨
비성경적인 세속 정치 하려면, 교회 떠나길

그런데 말입니다 다친이 칼럼

‘다친 이(The Wound)’라는 필명의 그리스도인이 ‘그런데 말입니다’라는 코너로 독자 여러분들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시무 7조’로 큰 화제를 모은 ‘진인 조은산’의 ‘기독교 버전’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필명 ‘다친 이’ 님은 범상치 않은 글솜씨로 교회와 사회에서 일어나는 주요 이슈들을 쓴소리와 함께 성경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대안을 모색해볼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무슨 자격이 있어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보통 사람으로서 답답하고 속이 상해서, 그래서 마음이 많이 아파서 한 마디 지껄여 봅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이자 사상가인 도스토예스프스키(1821-1881)는 1849년 불과 28세의 젊은 나이에 국가 정치범이 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총살 직전에 황제의 특사를 받아 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이번엔 시베리아로 유배를 가서 그곳에서 4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시베리아 감옥은 차라리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곳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의 경험을 훗날 <죽음의 집 기록, 1882>라는 작품에 고스란히 담아 두었습니다.

그곳은 영혼을 할퀴는 악마의 발톱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비참한 지경에 처한 인간 군상들이 어떻게 타락하고 부패하는가를 목격합니다.

그는 사람 취급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죄수들의 막장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정말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살기 위해 다른 죄수를 밥 먹듯이 살인하는 현장 속에서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그는 소위 악마의 선물이라고 하는 간질 발작을 얻기까지 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이 작품은 ‘인간의 죄에 대한 종합 백서’입니다. 그래서 칼빈주의 5대 교리 중 하나인 인간의 ‘전적 타락’을 예시할 때, <죽음의 집 기록>이라는 작품이 자주 등장하곤 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얻으려면 김철웅의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참조하세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 받은 은혜의 선물들은 너무 많아 열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중 최고의 선물은 인간에게 ‘생래적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생래적(生來的) 자유를 가집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이 완전한 자유를 지닌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뻐하는 대로, 또 각자의 열망을 기초로 자유롭게 행하고 자유의 만족을 구하며 최고의 행복을 구가합니다.

극복 스톤 롤 슬라이드 투쟁 어려움 저항 심연 도전 장애물 경험 불편 역경

그러나 우리는 본성적으로 죄인입니다. 그래서 죄악된 것을 열망합니다.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인 더글라스 윌슨은 “피조물로서 우리는 왼편으로 돌거나 오른편으로 돌 자유가 있다. 그러나 죄인으로서 우리는 왼편으로 돌아 죄 안으로 들어가거나, 오른편으로 돌아 죄 안으로 들어간다”고 말했습니다.

죄인은 악한 마음을 가지므로 항상 죄를 열망할 뿐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기 이전의 모든 죄인은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라는 성경의 증언에 비추어, 구원받을 희망조차 없는 존재입니다.

한 마디로 거듭나지 못한 인간은 ‘인간 짐승’입니다. 다른 짐승은 몸을 물어 상처를 내지만, 인간 짐승은 사람의 마음을 물기에 더욱 악한 존재입니다.

성당에 다닌다는 한 지인이 자신은 인간이 선하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다며, 현 정부의 ‘사람이 먼저다’는 구호가 얼마나 멋지냐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필자는 그분에게 “당신이 정말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한다면, 왜 당신은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 믿지 않느냐”고 되물었습니다.

돌아온 그분의 답은 성경과 관계없이 자신은 예수님을 믿으며, 사랑의 하나님은 인간을 절대로 악한 존재라고 여기지 않고 미워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인간 존재의 선한 능력을 응원하시는 분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예수님 말씀은 믿지 않는 모순에 대해, 그 분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육에 속한 사람과 성령에 속한 사람을 분별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고전 2:14)”라고 증언합니다.

성경은 거듭나지 못한 죄인을 ‘육에 속한 자’라 부릅니다. 이 사람은 완전히 죄악에 물들어 부패하고 전적으로 타락(total depravity)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가질 수 없고 주님께 나아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절대로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실제로 복음을 듣고 성령의 세례로 말미암아 구원의 믿음을 선물로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죄 가운데에 있습니다. 비록 죄책을 면제받았지만, 여전히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입니다.

청교도 존 오웬은 이것을 ‘죄의 경향성’으로 해석했습니다. 다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이 죄를 마음으로부터 멀리하고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에 순종하는 삶으로 바뀌고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
▲ⓒPixabay 제공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 인간의 선함을 믿고 그곳에 희망을 두고 강조하는 소위 ‘인간 중심의 신학파들’ 혹은 ‘사회주의 신학파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더욱 희한한 것은 이들이 현 집권 세력과 연대하여, 교회를 마치 선한 인간들의 봉사단체라도 되는 양 행세한다는 점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교회는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장이요, 이 사회정의는 경제적 정의 곧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는 곳이며, 나아가 사회주의 이념을 기초로 자유 대한민국의 근본적 체질을 바꾸고자 혁명을 꿈꾸는 강력한 종교집단이 됩니다.

이들에게 자본주의는 거악이요, 사회주의는 평등한 세상의 완성입니다. 이들은 ‘근대 자본주의의 근원이 프로테스탄티즘, 즉 칼빈주의에 뿌리를 둔다’는 막스 베버(Marx Weber, 1864-1920)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이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선택적 확신자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다시 바벨탑을 쌓아 자신들의 이름을 널리 빛내겠다고 덤비는 ‘신(新)바벨탑주의자들’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세속 정치를 하려거든 교회를 떠나십시오. 비성경적인 교회론을 주장하며 교회 안에서 신학자 혹은 목회자 행세를 하지 마세요.

그리고 제발 바라건대, 설교하지 마세요. 그 설교로 얼마나 많은 성도를 미혹하려 하십니까? 제발 그런 설교로 은근히 친정부를 독려하고 이에 반대된다고 여기는 자들을 정죄하거나 저주하지 마세요.

물론 무조건 정부를 반대하고 방해하는 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선동 세력들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아니하는지부터 먼저 살피십시오.

물론 교회는 국가의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고 응원하며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정치 선전장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다친 이(The Wounded)